00 도입




살죽을 에는 듯한 칼바람이 찢어진 코트 사이로 파고듭니다.
동생 로만을 업은 어깨 위로 전해지는 건 따스한 온기가 아니라,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한기뿐이네요.
빙식체와의 전투에서 입은 상처가 검게 변하며
로만의 어린 숨통을 조여오고 있습니다.
눈앞을 가로막는 설산의 풍경은 온통 하얀 절망뿐이라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는군요.
지켜주지 못했다는 슬픔과 무력감이 한데 엉켜
눈앞을 일렁이며 물들입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은 뜨거운 눈물이 아니라
시리도록 차가운 자책입니다.
동생의 작은 몸이 제 등 뒤에서 조금씩 굳어갈 때마다
심장이 날카로운 얼음 조각에 찔리는 기분.
내가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혹은 그 괴물의 발톱을 미리 알아차렸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들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헤집어 놓습니다.
로만의 창백한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 그저 앞만 보고 달리지만,
발을 내디딜 때마다 무력감이라는 늪에 빠져드는 것만 같네요.
신이 있다면 묻고 싶을 정도로 이 가혹한 세계가 원망스럽고,
끝내 동생을 지켜내지 못한 제 손이 너무나도 증오스럽습니다.
희망이라는 단어는 이미 이 설원 어딘가에 파묻혀 버린 것 같아,
숨을 쉬는 것조차 죄악처럼 느껴지는군요.
그럼에도 멈출 수 없는 건, 제 등에 업힌 이 작은 생명이
아직은 꺼지지 않은 가냘픈 불꽃이기 때문입니다.
지독한 정적 속에서는 당신의 거친 숨소리와
곧 멈출 것만 같은 로만의 미약한 맥박 소리뿐입니다.
이 설원을 헤멘 지 벌써 7시간...
이대로 가다가는 둘 다 부상 때문이 아니라
얼어죽을지도 모를 상황입니다.
숨을 돌릴 만한 곳이 주변에 있을까,
당신이 황급히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면...
라비헨:
Spot Hidden Roll
기준치:55/27/11
굴림:93
판정결과:실패
온통 새하얀 이곳에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로만을 등에 이고 나르느라 배어난 땀이
차갑게 식어할 수록 당신의 체온도
바닥도 모른 채 계속 떨어져만 갑니다.
그렇게 얼마나 더 주변을 헤멨을까요...
한 시간 정도가 지난 뒤에 다시 주변을 둘러보면...
라비헨:
Spot Hidden Roll
기준치:55/27/11
굴림:18
판정결과:어려운 성공
희미해지는 시야 너머로 지워지다 멎은
사람의 발자국이 보입니다.
당신이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고개를 올려다보면
그 뒤에는 낡은 산장의 실루엣이 남아 있습니다.
라비헨:(자신이 제대로 본 게 맞는지 눈을 천천히 깜빡인다)헉... 헉...
(실낱 같은 희망을 품고 옅게 입꼬리를 끌어당긴다. 말이 없어진 로만으로 슬쩍 고개를 돌리고) 많이 춥지? 조금만 참아, 로만. 곧 따뜻하게 해줄게...
로만:(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채로 흐느끼듯) ㅎ... 응... 형아... (말을 하다가 쿨럭, 소리를 내며 피를 조금 토해낸다)
라비헨:로만, 로만...! (깜짝 놀라 황급히 네 입가에 제 손을 받쳐주고 다른 손으로 등을 토닥여준다) 미안해... 미안해...
로만:(그런 형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가느다란 숨만 내쉰다)
라비헨:(눈이 금방이라도 젖어들려는 것을 꾹꾹 누르고는 다시 로만을 제대로 업는다) ...사람 발자국을 발견했어. 어쩌면 우릴 도와줄지도 몰라. 그러니...
(과연 동생이 인간으로 남을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점점 사라져서,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린다) 그러니까... 조금만 견뎌줘.
당신은 축 늘어져가는 로만의 몸을 꽉 끌어당기고는
산장이 있는 방향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갑니다.
눈이 종아리까지 쌓인 탓에 발이 푹푹 들어갑니다.
떨리는 손으로 문을 밀치고 산장 안으로 들어서면
근처에는 사람의 발자국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사람의 온기가 닿지 않은 적막이 가득합니다.
그래도 실내는 불씨가 꺼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조금 따뜻하게 데워져 있습니다.
당신은 급히 주변의 지푸라기 침상을 찾아
로만을 그 위에 뉘여봅니다.
차갑게 식어가는 소년의 피부는 이미 푸른빛이 가득합니다.
당장 숨이 끊어지더라도 이상할 게 없는 수준.
당신은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하며 내부의 화로에 놓여 있는
부싯돌을 찾아 땀이 뻘뻘 나도록 불을 피우고
로만에게 다가옵니다.
피로 푹 젖은 방한복을 벗겨내면
이미 피는 차갑게 꽁꽁 얼어붙어 상흔과 한데 뭉쳐 있고
점점 시퍼런 색이 피부를 물들여가고 있습니다.
라비헨:하아... 불을 피웠으니까 금방 따뜻해질 거야.
(로만의 이마를 쓸어주며 금방이라도 젖을 것 같은 눈으로 인간의 형태를 잃어가는 동생의 몸을 훑는다) 아직 정신을 잃으면 안 돼. 네가 말했잖아. 함께 적도로 가자고...
졸려서 그런 거지...? 응? 많이 피곤했지, 로만... 그래서 이렇게 조용한 거지?
(로만의 창백해진 손을 두 손으로 꼭 붙잡고 절절하게 내뱉는다) 제발... 너마저 나를 두고 가지 마... 부탁이야...
겨우 피워 올린 화로의 불꽃이 주황빛 그림자를 벽에 드리우지만,
로만의 몸은 그 열기를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잘게 떨리던 동생의 손가락마저 이제는
딱딱한 나무토막처럼 굳어가고 있을 뿐입니다.
가슴이 미어집니다.
대답을 기다리며 로만의 얼굴을 살피지만,
아이의 입술은 굳게 닫힌 채 그저 실낱같은 숨을 간신히 내뱉을 뿐입니다.
돌아오는 것은 점차 잦아드는 가냘픈 신음과
타오르는 장작이 탁탁 튀는 소리뿐.
당신은 식은땀에 흠뻑 젖은 로만의 뺨에
손을 갖다댑니다.
그리고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고 맙니다.
손끝에 닿는 이질적인 감촉.
부드러워야 할 아이의 살결이 당신이 손대자마자 하얀 각질이 일더니,
마치 허물을 벗듯 힘없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립니다.
당신이 이럴 리 없다고 조급하게 동생의 뺨을
거칠게 문질러 닦고 비벼내면
각질은 피부를 찢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자욱하게 떨어져 공기까지 떠돕니다.
그리고 그 아래로 비치는 건
인간의 피부가 아닌,
딱딱한 외골격의 푸른 빛깔.
안 된다며, 제발 이러지 말라며 로만의 몸에 붙은 조각들을 거칠게 털어내 보지만
이미 시작된 변이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적도로 가자던 그 약속이, 함께 눈을 뜨기로 했던 내일이
이 차가운 각질들처럼 힘없이 바스러져 가는 것 같아 목이 메어옵니다.
당신은 이미 반쯤 괴물로 변해가는 로만을 품에 안은 채
잔인한 현실을 부정하며 로만의 이름만 목놓아 부릅니다.
그때,
덜컥, 소리가 나더니
산장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섭니다.
라비헨:(갑작스런 문소리에 흠칫 놀라 낯선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한다) ㄴ, 누구야?
갑작스러운 침입자의 등장에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누군지도 모를 형체를 향해 경계 어린 눈빛을 던지면서도,
로만을 품에 안은 두 팔에는 더욱 힘이 들어갑니다.
문틈으로 들이친 설풍과 함께 실내로 발을 들인 남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두툼한 방한복으로 무장한 상태입니다.
검은 두건 위로 켜켜이 쌓인 눈 가루가 화로의 열기에 녹아내리기도 전에,
그 큰 덩치와 압도적인 냉랭함에 숨이 막힙니다.
두건 틈새로 살짝 비치는 백색의 머리카락과, 그 사이로 번뜩이는 날카로운 눈매는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서늘합니다.
그는 당황한 당신의 물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제 집인 양 익숙하고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산장 안을 가로지릅니다.
바닥을 울리는 그 일정한 발소리가 이곳이 원래 그의 영역이었음을
얘기하는 듯합니다.
이윽고 발걸음이 당신의 앞까지 다다릅니다.
소한:(얼굴을 감싸고 있던 두건을 내리고, 눈 묻은 방한복 모자도 벗어젖히며) ...방랑객인가.
라비헨:(온몸의 직감이 이 남자는 로만을 구해줄 친절한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을 준다. 두려움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 있던 잭나이프를 꺼내 남자에게 겨눈다) 가, 가까이 오지 마...!
소한:(어이가 없어서 한쪽 입꼬리만 올려 헛웃음을 짓는다) 하? 침입자는 그쪽이야. 난 제법 예의있게 물어본 건데.
거기 부상자가 있나? 상태는 어떻지. 처치가 급하다면 돕겠어.
라비헨:'침입자라고? 우리가?' (뒤늦게 상황파악을 하고 천천히 무기를 내려놓는다) ... 동생이 많이 아파요. 염치 불구하지만 조금만 머무르다 가게 해주세요. 정말 조금만이면 돼요...
소한:마음대로 해. 어차피 여기가 내 집도 아니고. (눈 묻은 배낭을 끌고 가까이 다가가, 배낭을 침상 옆에 툭 내려놓는다) 기본적인 응급처치 용품뿐이다만, 쓸만할 거야. 나와 봐.
라비헨:'사실은 좋은 사람인 건가? 키가 너무 커서 내가 잘못 짐작한 걸지도...' (끄덕이고는 옆으로 슬쩍 나온다)
당신이 자리를 비켜주자 남자의 거대한 체구가 로만이 누워 있는 침상 위로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며 다가옵니다.
그가 침상 한쪽에 걸터앉아 로만의 부상 부위를 살피기 시작하자,
공기마저 무겁게 가라앉는 기분이 드네요.
가슴팍에 난 상흔부터 확인한 그의 입에서
쯧, 하고 짧은 혀차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고는 시선이 천천히 올라가더니
잠시 멈춥니다.
그의 투박한 손가락이 동생의 뺨 위로 떨어진 하얀 각질을 거칠게 훔쳐내더니,
마치 가루를 확인하듯 손가락으로 비벼봅니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니
혹시, 치료할 방법이 있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이 듭니다.
심장이 너무 시끄럽게 뛰어서 입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습니다.
그는 제법 익숙한 손놀림으로 옆에 두었던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숨을 죽인 채 그가 꺼낼 치료약을 기다립니다.
하지만 당신의 기대와 달리 가방에서 나온 물건은,
시꺼멓고, 길다랗고, 차갑고, 섬뜩하게 생긴,
위험스러운 크기의 총신.
금속성의 차가운 소리가 적막한 산장 안에 울려 퍼지며,
찰칵, 하는 명료하고도 잔인한 장전 소리가 제 고막을 날카롭게 찌릅니다.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합니다.
당신이 무어라 말리려 할 새도 없이
탕-, 하는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이 좁은 산장 안을 가득 메웁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폭음에 뇌가 상황을 인지하기도 전에,
왼쪽 뺨으로 뜨겁고 축축한 액체가 터져 묻습니다.
무의미하게 벌어진 제 입술 사이로 비명조차 나오지 않고,
시야는 서서히 붉은색으로 물들어갑니다.
이게...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얼굴에 묻은 차가운 피가 누구의 것인지도.
전혀 분간이 되지 않고 온몸이 꽁꽁 얼어붙습니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차단된 듯한 지독한 이명만이 귓가를 맴돕니다.
소한:(천천히 총을 거두며 덤덤하게) 너무 늦었어. 변이가 한참 진행됐으니까.
(자리에서 일어나고는, 총을 다시 가방에 넣고 다시금 짊어진다) 무덤으로 쓸 구덩이를 파줄 테니까 기다려.
라비헨:(총에 의해 귀에서부터 삐- 소리가 계속 울린다. 아니, 머릿속에서 울리는 건가? 시간이, 모든 감각이 전부 멈춘 것 같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피로 흥건해진 동생을 보고, 떨리는 손끝으로 뺨에 묻은 피를 훑는다. 두 눈으로 손에 묻은 피를 제대로 확인하고 나서야 삐- 소리가 멈춘다. 그리고 그 자리에 폐부를 뚫고 심장이 싸늘하게 식는 느낌이 든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뭐, 뭘 한 거야?
죽였, 어...?
소한:(담담하게) 이미 죽어 있었지. 어쩔 수 없어.
라비헨:아냐...
아니야...! 분명 방금까지 말도 했었다고!
(눈가가 축축하게 젖어든 채 온갖 분노가 담긴 얼굴로 쏘아붙인다) 치료해준다고 했잖아...! 당신이 내 동생을 죽였어!
소한:(바락바락 내지르는 소리에 귀가 따갑다는 듯 인상을 구기며) 어쩔 수 없었어. 포기해. 괴물이 되기 전 인간일 때 죽는 게 오히려 존엄성을 지키는 일 아닌가?
라비헨:(이를 깍 깨물며) 괴물이 아니야. 내 동생이라고!! 내 하나뿐인 가족이었단 말이야!
소한:그래서 대신 죽여줬잖아. (감정 동요 없이 무심하게 눈을 깜빡인다)
라비헨:내가 언제 죽여달라고 했어? 살려달라고 했지!
소한:저건 못 살린다고. 다 알지 않나? 방랑한 지 얼마 안 됐어?
라비헨:내 동생은 내가 제일 잘 알아. 당신이 뭔데 내 동생을... 흑... 윽...
(로만이 죽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입으로라도 담기 힘들어 눈물을 뚝뚝 흘린다)
소한:(심경이 복잡한 것처럼 입술을 말아넣었다가 작게 혀를 차고는, 싸늘하게 식은 주검을 들쳐메고 일어난다) 눈물이나 계속 짤 거면 안에서 마음 정리하고 있어. 내가 인근에 묻고 올 테니까.
라비헨:싫어! 지금 사람 놀려?!
(미간을 찌푸린 채 비릿하게 입꼬리를 끌어당긴다) 죽여놓고 묻어버리겠다고...?
(당장이라도 눈앞의 저놈을 죽여버리고 싶지만 로만을 보내주어야만 한다는 생각에 목울대가 울렁거린다) 하 ... 로만을 내려놔. 내가 묻어줄 거니까.
소한:(네 체구를 위에서 아래로 스윽 훑어보고는) 그러든가. (천천히 침상 위에 다시 시신을 내려놓으며, 어디쯤에 묻는 게 적절할지 고민한다)
라비헨:(침상으로 다가가 엉망이 되어버린 로만을 끌어안고 울먹거린다) 로만... 로만... 미안해, 흑...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소한:(거실 측으로 이동해 의자에 가방을 내려놓고, 외투에 묻은 피를 슥슥 문질러 닦고는) 따라 나와. 어디쯤에 묻을지 생각했으니까.
라비헨:(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미친 사람처럼 피떡이 된 로만을 안고 연신 미안하단 말만 내뱉는다)
소한:(쯧, 작게 혀를 차고는 가방을 뒤적여 수건을 꺼내고는 다가가 네 앞에 툭 던지며 다시금 시체를 짊어진다) 가자. 가만히 있으면 위험해.
라비헨:(절박하게 옷깃을 잡으며) 안 돼... 아직 보내기 싫어. 난... 아직 보낼 준비가 안 됐단 말야...
소한:(잠시 입술을 다물었다가) ...그딴 준비가 되는 사람은 세상에 없어.
따라와. (네가 뭐라하기 전에 들쳐메고는 산장 밖으로 턱턱 걸어간다)
라비헨:안 돼, 로만... 안 돼... (남자가 마치 저승사자처럼 보인다. 이미 죽어버린 동생을 향해 힘없이 따라간다)
휘몰아치는 눈보라 사이로 로만을 짊어진 남자의 뒷모습이
마치 거대한 사신처럼 일렁입니다.
제 전부였던 아이가 차가운 고기 덩어리처럼
타인의 어깨에 들려가는 모습에 심장이 갈가리 찢깁니다.
남자의 발자국 위로 당신의 눈물이 떨어지기도 전에 얼어붙어 버리지만,
당신은 홀린 듯 로만의 축 처진 손끝만을 쫓아 걸음을 옮깁니다.
찬바람이 폐부를 찌르고 들어와 숨을 쉴 때마다 비릿한 피 냄새가 섞여 나오지만,
그런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감각이 무뎌집니다.
이윽고 숲의 초입,
그나마 눈보라가 잦아들고 볕이 머물다 간 듯한
작은 공터에 남자가 멈춰 섭니다.
그는 조심성이라곤 없는 투박한 손길로 로만을 내려놓더니,
미리 준비된 삽으로 딱딱하게 굳은 땅을 내리찍기 시작합니다.
얼어붙은 흙바닥이 비명을 지르며 파헤쳐질 때마다
당신의 영혼도 함께 도려내지는 기분입니다.
몸이 사정없이 떨립니다.
이토록 무참하게 동생을 묻어야 한다고...
삽날이 눈을 한참이나 파내다 못해 돌에 부딪혀 불꽃이 튀는 소리가 정적을 깰 때마다
당신은 로만의 이름만 되뇌이며 그 광경을 지켜봅니다.
남자가 파내려가는 저 구덩이가 로만의 무덤이 된다는 것도 믿기지 않고
그저 당신의 삶의 끝인 것처럼 눈앞이 아득합니다.
얼굴로 흘러내리는 눈물이 금세 얼어붙는 이곳에서
한참이나 눈시울이 뜨겁고도 손끝이 떨리는 건
절대로 추위 탓을 할 수가 없을 것이라
당신은 그저 넋을 놓은 채 그 광경을 바라봅니다.
한참 동안 얼어붙은 땅을 파내려 가던 삽소리가 멎고,
남자는 마침내 굽혔던 허리를 천천히 폅니다.
그의 등 뒤로 뿜어져 나오는 하얀 입김이 자욱한 안개처럼 흩어지며,
마치 거대한 벽이 세워지는 것 같은 압박감을 줍니다.
남자는 장갑에 묻은 흙먼지를 거칠게 털어내고는,
깊게 파인 구덩이와 그 옆에 놓인 로만을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번갈아 바라봅니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차가운 공기에 닿아 식어가는지,
남자의 미간은 아까보다 조금 더 깊게 패어 있습니다.
소한:(짧게 더운 숨을 토해내고는) 동생한테 마지막으로 할 말 있으면 지금 해. 바로 묻을 거니까.
라비헨:마지막...?
(눈물 젖은 속눈썹을 깜빡이며 사람의 형체조차 아니게 되어버린 로만을 바라본다.) '이게 진짜 마지막이라고...?' 로만... 너는... 흑... 정말 좋은 동생이었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고개를 푹 숙인다) 나도... 곧 따라갈게, 외롭지 않게.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흑...읏...
함께 적도로 가자고 한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
그래도 천국에서는 지금보다 따뜻하게 지낼 수 있을 거야... 흐윽... 거기서 함께하자...
제 삶의 유일하게 남은 존재를 차가운 흙 속에 뉘어야 하는 순간이
기어코 찾아오고야 말았을 때의 심정은
몹시도 처참하고 잔인하고 뜨겁습니다.
당신이 더는 아무런 말을 내뱉지 않을 때까지 한참을 기다린 남자는
마지막만큼은 존중하듯, 로만의 시신을 들어올려
깊게 파인 구덩이 안으로 조심스럽게 걸어들어갑니다.
뒤틀린 골격과 피로 얼룩진 몰골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로만의 사지를 가지런히 펴주며 마지막 예우를 갖추어 눕힙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당신의 시야는 쉼 없이 흐르는 눈물 때문에 일렁이고,
구덩이 속으로 한 삽 한 삽 던져지는 흙더미가 로만의 옷자락을 지워갈 때마다
당신의 가슴은 난도질당한 듯 헤집어집니다.
당신은 로만의 마지막 모습이 흙 아래 영영 파묻히는 모습을
단 한 장면도 놓치지 않으려 부릅뜬 눈으로 버팁니다.
솟구치는 눈물을 팔뚝으로 여덟 번쯤 닦아냈을 때엔
마침내 흙이 모두 덮이고 그 위로 차가운 눈가루가 내려앉습니다.
순식간에 지워져버린 비극의 흔적에, 지탱할 힘을 잃은 몸이
텅 빈 껍데기처럼 눈밭 위로 휙 고꾸라집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와중 남자가 근처 나무를 도끼로 찍어 내리는 날카로운 타격음이
규칙적으로 당신의 귓가에 울립니다.
그는 길게 쪼갠 나뭇가지를 거칠게 다듬고는,
주머니에서 꺼낸 노끈으로 단단히 엮어
소박하지만 단호한 십자가 하나를 만들어냅니다.
눈이 쌓인 무덤의 머리맡에 그 십자가가 깊숙이 박히는 소리를 들으며
당신은 동생을 혼자 두었다는 죄책감에 젖은 채
천천히 의식을 놓아버립니다.
당신의 동생을 죽이고 구덩이를 판 이 남자가
과연 당신의 편일지, 아닐지도 모르는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