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낯선 방랑자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리자,
소금기가 서린 눈가에 뻑뻑한 통증이 가장 먼저 전해집니다.
멍하니 시선을 옮기면, 어느새 산장 안은
타오르는 벽난로의 모닥불이 뿜어내는 주황빛 온기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당신의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은 흙먼지로 더럽혀졌던 낡은 옷이 아니라,
깨끗하게 정돈된 포근한 침상이군요.
어디선가 들려오는 보글보글 소리와 함께 코끝을 간지럽히는 고소한 수프 냄새가
이 지독한 현실 속에서 이질적인 평화로움을 자아냅니다.
차디찬 눈밭에 쓰러져 죽음만을 기다리던 자신이
왜 아직도 숨을 쉬고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고개를 돌려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면
로만을 죽였던 남자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화로 앞에 앉아 무심하게 냄비를 젓고 있습니다.
비릿한 피 냄새와 절망만이 가득했던 이곳에 채워지는
식욕을 돋우는 냄새가 오히려 더욱 비참합니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보다는 동생을 혼자 두고 온기 있는 방에 누워 있다는 죄책감에
입술이 파르르 떨립니다.
장작 타는 소리마저 마치 어서 일어나
이 가혹한 삶을 이어가라고 등을 떠미는 것 같습니다.

(마른 입술을 움찔거리다가 힘이 잔뜩 빠진 목소리로) 왜 데려왔어?
죽게 내버려두지.


하...하하... 네가 뭔데 나더러 죽지 말라고 하는 건데?
내 동생은 아무렇지도 않게 죽였으면서 네가 뭔데!






피도 눈물도 없을 거면 나도 죽게 냅뒀어야지. 하...아니면 동생에 이어서 나도 고통받길 바라는 거야?





(옆에 놓인 가방을 뒤적이다가, 쇠로 된 물통을 네쪽으로 툭 던진다) 마셔. 마시고 생각해.



내 동생도 죽여줘서, 나도 죽여줘서 고맙네. 이 미친 새끼야.
'그래, 차라리 이런 거라도 마시고 죽는 편이 좋겠지...' (뚜껑을 열어 술을 단숨에 입안으로 들이붓는다. 목구멍으로부터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이 느껴진다. 그래도 가슴을 갈기갈기 찢는 듯한 죄책감과 슬픔보다는 독한 술이 몸안에 흘러들어오는 감각이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어 남김없이 전부 삼켜낸다.) 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액체가 불길처럼
목구멍의 점막을 긁어내립니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 위장 속으로 떨어지는 화끈거리는 고통이,
오히려 마비되었던 감각을 일깨우는 기분입니다.
독한 알코올의 향이 코끝을 찌름에도,
입안에 남은 묘한 알싸한 맛이 마치 아까 뺨에 튀었던
로만의 피 맛 같다는 착각이 들어 소름이 우수수 오릅니다.
순간 속에서 울컥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기운에
우욱- 작은 헛구역질이 납니다.
그럼에도 머릿속을 헤집던 날카로운 슬픔들이
조금 뭉툭해지는 감각은 선명하네요.
방금까지 소리를 질렀는데 기운이 금세 빠져나가고
술기운이 빠르게 돌며 몸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집니다.
당신은 빈 물통을 손에 쥔 채 초점 없는 눈으로
타오르는 모닥불만을 응시합니다.
지독하게 쓰디쓴 뒷맛이 혀끝에 머물며
이 맛이 당신의 삶이라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헛웃음도 나오려다 마네요.
차라리 이대로 영원히 잠들고 싶습니다.
부모님도 죽고, 동생마저 죽은 이 상황에서
위안이라고는 그것뿐이라.




내... 내 독약... 내놓으라고...


(비틀비틀 일어나 나가는 문으로 향한다) 죽을 거야. 이대로 나가서 죽을 거야... 흑... 로만- 로마안-








진짜 죽으러 갈 거야... 말리지 마.

너 죽으면 동생이 천국에서 환호라도 한대?

(붉어진 눈시울로 너를 노려보며) 그 아이는... 유일하게 남은 내 가족이었단 말야...
그 애를 네가 죽였어. 알아...?
내 동생을 죽인 살인자가 "살라"는 말을 내가 들을 것 같아?



저항 안 할 거니까


버리고 가면 그만인데.



안 먹는다고 했잖아!
그냥 버리라고... 바깥에서 얼어 죽게 놔두라고...
왜... 왜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당신 진짜 싫어. 죽어서도 저주할 거야... 흑...



물 갖다줄게. (다시금 몸을 일으킨다)
술기운이 머릿속을 끈적하게 휘감으며 시야가 속절없이 무너져 내립니다.
뒤돌아가는 남자를 향해 내뱉던 저주 섞인 말들은
결국 스스로의 비참함을 이기지 못한 채 웅얼거림으로 흩어 사라집니다.
억지로 밀어넣은 독주 탓에 위장이 뒤틀리는 기분입니다.
무심한 남자의 뒷모습을 끝으로,
깊고 어두운 심연 속으로 의식이 속절없이 추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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