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낯선 방랑자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리자,
소금기가 서린 눈가에 뻑뻑한 통증이 가장 먼저 전해집니다.
멍하니 시선을 옮기면, 어느새 산장 안은
타오르는 벽난로의 모닥불이 뿜어내는 주황빛 온기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당신의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은 흙먼지로 더럽혀졌던 낡은 옷이 아니라,
깨끗하게 정돈된 포근한 침상이군요.
어디선가 들려오는 보글보글 소리와 함께 코끝을 간지럽히는 고소한 수프 냄새가
이 지독한 현실 속에서 이질적인 평화로움을 자아냅니다.
차디찬 눈밭에 쓰러져 죽음만을 기다리던 자신이
왜 아직도 숨을 쉬고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고개를 돌려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면
로만을 죽였던 남자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화로 앞에 앉아 무심하게 냄비를 젓고 있습니다.
비릿한 피 냄새와 절망만이 가득했던 이곳에 채워지는
식욕을 돋우는 냄새가 오히려 더욱 비참합니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보다는 동생을 혼자 두고 온기 있는 방에 누워 있다는 죄책감에
입술이 파르르 떨립니다.
장작 타는 소리마저 마치 어서 일어나
이 가혹한 삶을 이어가라고 등을 떠미는 것 같습니다.
라비헨:'저 남자가 있는 걸 보면... 로만이 죽은 건 역시 꿈이 아니구나.'
(마른 입술을 움찔거리다가 힘이 잔뜩 빠진 목소리로) 왜 데려왔어?
죽게 내버려두지.
소한:(천천히 냄비를 젓고 있다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조금 들었다, 다시 수프를 끓이는 일에만 집중한다) 죽지 말라고 데려왔지. 당연한 거 아닌가.
라비헨:당연한 거...?
하...하하... 네가 뭔데 나더러 죽지 말라고 하는 건데?
내 동생은 아무렇지도 않게 죽였으면서 네가 뭔데!
소한:(무덤덤하게) 의식도 없었고, 변이는 거의 끝에 다다랐지. 괜한 고집 부리지 마. 더 고통스럽기 전에 보내주는 게 도리니까.
라비헨:분명히 의식이 있었어. 네가 괴물이라 취급할 아이가 아니었단 말이야!
소한:그대로 둬서 동생을 괴물로 만드는 게 목표였어? (한숨을 푹 쉬고는, 이내 수프 든 냄비를 들어올려 옆에 내려둔다)
라비헨:충분히 살릴 수 있었는데 네가 죽인 거잖아!
소한:그렇게 생각하고 싶으면 생각하든가. (국자를 들어 그릇에 수프를 나누어 담는다)
라비헨:당신은 피도 눈물도 없지? 내 동생은 차가운 바닥에 있는데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아...?
피도 눈물도 없을 거면 나도 죽게 냅뒀어야지. 하...아니면 동생에 이어서 나도 고통받길 바라는 거야?
소한:망상은. (쯧, 혀를 차고는 수프를 가져다 주려다가, 이대로는 그냥 바닥에 던져버릴 것 같아서 다시 내려둔다) 술 마실래?
라비헨:뭐...?
소한:술 마실 거냐고. 남은 게 좀 있는데.
라비헨:너 같으면 이 상황에 술이 넘어가겠어? 꺼져.
소한:이런 상황이니까 마시라는 거지. (내가 왜 얘랑 이따위 실랑이를 해야 하지? 점점 귀찮아진다)
(옆에 놓인 가방을 뒤적이다가, 쇠로 된 물통을 네쪽으로 툭 던진다) 마셔. 마시고 생각해.
라비헨:(툭, 소한이 던진 물통이 제 손에 넘어온다. 이새끼 진짜 뭐지?? 고개를 팍 들고 독기 서린 눈으로 쏘아본다) 지금... 지금 나랑 장난해?? 내가 너인 줄 알아? 사람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기나 하는 거냐고!
소한:신경 써줘도 지랄... 죽고 싶으면 거기 있는 거 다 마셔. 그럼 골로 간다.
라비헨:(네가 던져준 물통을 마치 오물이라도 되는 양 쳐다보다가) ... 하, 그래. 신경 써줘서 고맙네, 개자식아.
내 동생도 죽여줘서, 나도 죽여줘서 고맙네. 이 미친 새끼야.
'그래, 차라리 이런 거라도 마시고 죽는 편이 좋겠지...' (뚜껑을 열어 술을 단숨에 입안으로 들이붓는다. 목구멍으로부터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이 느껴진다. 그래도 가슴을 갈기갈기 찢는 듯한 죄책감과 슬픔보다는 독한 술이 몸안에 흘러들어오는 감각이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어 남김없이 전부 삼켜낸다.) 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액체가 불길처럼
목구멍의 점막을 긁어내립니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 위장 속으로 떨어지는 화끈거리는 고통이,
오히려 마비되었던 감각을 일깨우는 기분입니다.
독한 알코올의 향이 코끝을 찌름에도,
입안에 남은 묘한 알싸한 맛이 마치 아까 뺨에 튀었던
로만의 피 맛 같다는 착각이 들어 소름이 우수수 오릅니다.
순간 속에서 울컥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기운에
우욱- 작은 헛구역질이 납니다.
그럼에도 머릿속을 헤집던 날카로운 슬픔들이
조금 뭉툭해지는 감각은 선명하네요.
방금까지 소리를 질렀는데 기운이 금세 빠져나가고
술기운이 빠르게 돌며 몸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집니다.
당신은 빈 물통을 손에 쥔 채 초점 없는 눈으로
타오르는 모닥불만을 응시합니다.
지독하게 쓰디쓴 뒷맛이 혀끝에 머물며
이 맛이 당신의 삶이라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헛웃음도 나오려다 마네요.
차라리 이대로 영원히 잠들고 싶습니다.
부모님도 죽고, 동생마저 죽은 이 상황에서
위안이라고는 그것뿐이라.
소한:(취기가 돌 만한 시기까지 기다리다가, 천천히 옆으로 다가간다) 괜찮아?
라비헨:(술기운이 머리끝까지 차올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잘 익은 사과처럼 붉게 달아오른다. 몽롱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기만 할 뿐 말이 없다) ...
소한:(네 손에 들린 물통을 뺏어들고 좌우로 흔들어본다) 진짜 다 마셨네. 이 귀한 걸. 독한 놈.
라비헨:(물통이 손에서 빠져나가자 시선이 천천히 네 쪽으로 향한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내놔.
내... 내 독약... 내놓으라고...
소한:다 마셔서 한 방울도 없구만, 뭘. (어이가 없으려니 이 정도로 없었던 적도 없어서, 툭 바닥에 던진다) 진정했네. 수프 먹을래?
라비헨:싫어... 네가 만들어준 수프 따위...
(비틀비틀 일어나 나가는 문으로 향한다) 죽을 거야. 이대로 나가서 죽을 거야... 흑... 로만- 로마안-
소한:(탁 붙잡아 끌어당겨 도로 침상에 앉힌다) 나가서 얼어죽지 말고 수프 먹어. 독 탔으니까 그것까지 먹으면 진짜 골로 간다. 어때?
라비헨:하하... 미...친 새끼...
소한:내가 뭐.
라비헨:네 밥인 거 모를 줄 알아? 내가... (딸꾹) 등신으로 보여...?
소한:술 취한 병신으로는 보여. 먹을래?
라비헨:(실실 웃으며 가운데 손가락을 똑바로 세운다) 좆-까-
소한:너나 까, 멍청아.
라비헨:내가 미쳤냐? ... '이 새끼랑 대체 왜 이러고 있는 건지...'
진짜 죽으러 갈 거야... 말리지 마.
소한:산 사람은 살아야지.
너 죽으면 동생이 천국에서 환호라도 한대?
라비헨:하... 어차피 로만이 없으면 꿋꿋하게 사는 의미도 없어.
(붉어진 눈시울로 너를 노려보며) 그 아이는... 유일하게 남은 내 가족이었단 말야...
그 애를 네가 죽였어. 알아...?
내 동생을 죽인 살인자가 "살라"는 말을 내가 들을 것 같아?
소한:나보고 동생을 죽인 살인자라고 하면서, 넌 나 왜 안 죽이는데.
라비헨:... 네가 날 죽이는 게 더 쉬워 보이니까.
소한:참나. (어이가 없어서 품을 뒤져 작은 잭나이프를 던지듯 건넨다) 그럼 죽여.
저항 안 할 거니까
라비헨:이럴 거면 내 동생은 왜 죽인 거야...?
소한:하... 어이가 없네. 나 살자고 죽였겠어?
버리고 가면 그만인데.
라비헨:그럼 버리고 갔어야지. 이 재수 없는 새끼야... (혀가 잔뜩 꼬여 뭉개진 발음으로 웅얼거리며 삿대질 하다가 어지럼증에 뒤로 고꾸라진다) 흐...
소한:(뒤로 고꾸라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켜, 거실측에서 수프 그릇과 나무 스푼을 들고온다) 먹고 죽은 듯이 잠이나 자.
라비헨:(빙글빙글 시야가 돌고, 눈앞의 남자가 괴물인지 사람인지조차 분간이 가질 않는다. 수프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자 비참함이 극에 달해 소리지른다) ... 안 먹어.
안 먹는다고 했잖아!
그냥 버리라고... 바깥에서 얼어 죽게 놔두라고...
왜... 왜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당신 진짜 싫어. 죽어서도 저주할 거야... 흑...
소한:그래라. 나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커져서 저주도 하고 죽이는 것도 해. (다시금 수프 그릇을 앞으로 내민다)
라비헨:싫다니까... 안 먹겠다ㄱ, 욱... 우욱- (수프 그릇을 밀어내려다 갑작스런 토기에 헛구역질을 한다) '방 안이 온통 로만의 피냄새로 가득한 것 같아...'
소한:(너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수프 그릇을 뒤로 물리고 적당히 내려둔다) 오늘까지만 여기서 묵고, 내일은 이동할 거야. 아침에 깨울 테니까 일어나.
물 갖다줄게. (다시금 몸을 일으킨다)
술기운이 머릿속을 끈적하게 휘감으며 시야가 속절없이 무너져 내립니다.
뒤돌아가는 남자를 향해 내뱉던 저주 섞인 말들은
결국 스스로의 비참함을 이기지 못한 채 웅얼거림으로 흩어 사라집니다.
억지로 밀어넣은 독주 탓에 위장이 뒤틀리는 기분입니다.
무심한 남자의 뒷모습을 끝으로,
깊고 어두운 심연 속으로 의식이 속절없이 추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