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내게 되돌려줄 100시간

 




당신은 건조한 표정으로 어제자 재방송인 뉴스 화면을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습니다.
정오를 살짝 넘긴 시간,
병동 앞 대기실은 tv화면의 뉴스 소리나
간간히 들리는 대화 소리를 제외하곤 조용합니다.
좀비 사태가 발발한 후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24시간 안에 감염된 사람을 좀비로 만드는 파이로젠 바이러스에 의해
인류는 이대로 멸망되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좀비 사태 이후 25개월이 지난 후인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학자들에 의한 바이러스에 대한 치료제가 개발되었고,
인류는 이를 희망이자 구원이라 불렀습니다.
물론 치료제의 공식이 적힌 낡은 노트를 작성한 사람이 소한이고
그것을 가져온 사람이 당신이라는 것은 아주 소수의 정부 관계자만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요.
당신은 가방에서 몇 일 전에 당신 앞으로 온 편지를 꺼내 펼칩니다.
몇번이고 반복해 읽어 내용을 거의 다 외워버린 편지는 구겨지다 못해 너덜거립니다.

도착한 편지

연합정부 바이러스 관리팀으로부터

안녕하세요,  라비헨 님.

소한 님의 치료 날짜가 결정되었습니다. 치료제 투여는 11월 13일 오후 1시에 예정되어 있습니다.


파이로젠 바이러스에 대한 치료제,  Pi1225-SH 는 투여 후 시간의 경과에 따라 순차적 단계로 그 효과가 나타납니다.


1단계. 치료제 투여 전, 바이러스에 완전히 감염된 상태로, 흔하게 우리가 ‘좀비’라고 부르는 단계입니다. 

2단계. 치료제 투여 24시간 후. 활력징후(체온, 맥박, 호흡, 혈압) 이 정상에 가까워지며 공격성이 줄어듭니다. 하지만 아직까진 인간보다는 좀비에 가까운 상태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합니다.

3단계. 치료제 투여 48시간 후. 흔히 말해 이성이 돌아와, 이 단계부터 환자와 의사소통, 즉 대화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환자들의 대부분이 드문드문 기억상실 증상을 보이는데 약의 부작용인지, 바이러스의 부작용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4단계. 치료제 투여 72시간 후. 몸 안의 바이러스가 대부분 사멸된 상태이지만 여전히 일부 바이러스들은 불활성화 상태로 존재하는 ‘보균자’ 상태입니다. 완치자와 다르게 좀비 바이러스 감염의 최종 단계를 나타내는 ‘시력’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입니다.

5단계. 완치 단계로 바이러스가 몸 속에서 완전히 사멸되어 1달 안으로 시력이 돌아오게 됩니다. 몇가지 검사를 추가로 받은 후 격리시설에서 퇴원할 수 있습니다.


앞서 알려드린 대로 소한 씨는 현재 아리마테아 병원의 수용시설에 격리되어있으며 치료제 투여 후 3단계 부터 면회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라비헨 님이 인류의 재건에 지대한 공헌을 해주신 것을 감안한 바, 동봉한 확인서와 함께 11월 14일에 수용시설을 방문하시면 자세한 치료절차를 안내해드립니다.


소한 님의 빠른 쾌유를 빕니다.


2025년 11월 5일, 연합정부 바이러스 관리팀 올림

치료제가 완성된 후인 이듬해 1월,
연합정부는 파이로젠 바이러스와의 싸움을 전면적으로 공표했습니다.
하지만 희망을 갖기도 잠시, 사람들은 또 한번의 절망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치료제가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이러스에 대한 치료제를 투여받은 후 완전한 인간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치료제를 투여했음에도 바이러스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비활성화 상태로 몸 안에 계속 남아있는 사람들 또한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바이러스에서 돌연변이 같은 것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학자들은 치료제를 조금씩 바꿔나가며 계속해서 실험을 거듭했지만
불특정 다수에 대해 치료제가 효과를 보이지 않는지에 대한 원인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류가 직면한 또 하나의 난관이 있었습니다.
만들어져야 하는 치료제의 양에 비해 공장과 자원은 부족했습니다.
또한 치료제를 투여한다고 무작정 감염자들이 인간으로 돌아온 것도 아니니,
결국 정부는 그들을 수용소에 모은 후 생존자들에 의해 신원이 확인된 이들에게
순차적으로 치료제를 투여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연합정부는 당신의 말에 따라
노트의 작성자인 소한을 찾는 것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지만,
알다시피 정부는 그것 말고도 할 일이 많으니까요.
멸망 이후 조금씩 회복하기 시작한 세계는
평화로웠던 시절보다 모든 것이 몇 배로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당신 역시 세계를 재건하기 위한 생존자의 일원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왔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정부는 수용소의 좀비들 중 소한을 찾았고,
몇 달을 기다려야하는 다른 감염자들과 다르게 소한에게는
1주일이라는 짧은 시간 만에 치료제의 투여가 결정된 것입니다.
이 곳 아리마테아 병원은 당신이 사는 곳에서 꽤나 멀리 떨어져 있는,
안전지대 외곽에 위치한 병원입니다.
좀비 사태 이후 폐병원이 된 곳을 건물째로 좀비 감염자들을 위한 시설로 쓰고 있으니
병원보단 수용소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편지와 함께 본인확인을 거치고 접수를 마친 당신은
소한이 있다는 7층으로 안내를 받았습니다.
감염자들이 입원하고 생활하는 병동은 외부의 출입이 차단 된 폐쇄병동인지라,
병동 앞 면회실에선 당신을 포함한 스무명 남짓한 사람들이
저 안에 있을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긴 긴 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오를 넘기고 오후 1시에 가까워질 때,
당신은 비로소 직원이 당신의 이름을 호명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라비헨 님, 안으로 들어가시죠.”
짧은 복도를 지나, 당신은 굳게 닫힌 철문 앞에 도착합니다.
직원이 카드를 찍자 문이 열리며 병동의 모습이 보이네요.
중앙 스테이션을 주위를 둘러싸는 병실들과 처치실, 면회실,
심지어 협소하지만 ‘환자들’을 위한 휴게공간…
겉보기에 이곳은 평범한 병동입니다
이런 곳에서 소한이 지내고 있는걸까요.
주변을 잠시 둘러보지만, 그럴 틈을 주지 않고
직원은 빠른 발걸음으로 당신을 한 진료실로 안내합니다.
진료실은 한쪽 벽 가운데 널찍한 유리창이 있는 것만 빼면 평범합니다.
라비헨:
지능
기준치:50/25/10
굴림:11
판정결과:어려운 성공
특수유리로 만들어 진 듯한 창을 통해 반대편 방을 볼 목적으로 설치된 듯합니다.
반대쪽 방은 지금 불이 꺼져 있습니다.
당신이 자리에 앉자 손에 든 차트를 확인한 의사는 당신에게 말합니다.
레나 리센:안녕하세요 라비헨 씨. 저는 72병동 담당의사 레나 리센 입니다. 소한 씨의 보호자, 맞으시죠.
이미 DNA나 지문 등으로 본인 확인을 거쳤지만… 잠깐 확인을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그는 책상 옆에있는 리모콘의 한 버튼을 누릅니다. 그러자 얼마 후,
쾅!!!!!
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면 불이 켜진 유리창 너머에는 소한이 서 있습니다.
헤어진 후 처음 보는 소한은 당신이 기억하던 소한이던가요?
그는 바이러스의 감염자, 좀비잖아요.
창문 너머에서 낮은 신음소리가 들리고,
창과 맟닿은 이마에서 흐르는 피가 뭉개집니다.
환자복을 입고, 무표정한 얼굴로 유리창 너머에 서 있는 소한.
당신을 알아본걸까요, 아니면 그저 빛에 반응한걸까요.
연록색 눈동자의 동공은 희게 번뜩입니다.
...
레나 리센:...
소한 씨가 맞나요?
라비헨:...
(유리창 너머의 소한에게 시선을 떼지 못 한 채) 네... 맞아요.
레나 리센: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그는 당신의 대답을 듣고 차트에 무언가를 적고, 다시금 버튼을 누릅니다.
불이 꺼지자 좀비, 아니, 소한이 어둠 속으로 삼켜지고,
새카만 유리창엔 당신의 표정이 반사됩니다.
레나 리센:보시다시피 지금 상태에선 면회가 불가능합니다. 면회가 허용되는 건 3단계 부터 입니다.
이미 편지에 동봉된 안내자료를 보셨겠지만... 다시 한 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치료제는 어제 오후 1시에 투여된 상태입니다. 소한 씨는 현재 2단계의 상태이고요.
치료제를 처음 투여받은 환자, 그러니까 좀비는 100시간동안 1단계부터 4단계를 거치며 서서히 인간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100시간 후 5단계가 되어 완치판정을 받을 경우 퇴원이 가능합니다. 첫 치료 시 완치율은 대략 30%정도이고, 4단계에서 5단계로 넘어가지 못한다면 이곳 병원에 격리된 채 추가적인 치료를 받게 됩니다.
완치된 환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좀비일때는 의식도 기억도 없는 상태였다고 합니다. 치료제가 투여되며 서서히 기억이 돌아오죠. 현재 연구가 이루어 지고 있지만 학자들은 바이러스 감염 후 좀비가 될 때 파이로젠 바이러스가 뇌에 침입한 결과로 기억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또한 약물 부작용인지, 바이러스 때문인지 아직 모르지만 3, 4단계의 환자들이 이따끔 액팅 아웃, 그러니까...발작을 하며 공격성을 보이는 때가 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경우 안정제를 투여한 후 독방에 얼마동안 격리하는데 그러면 수 시간 후에 괜찮아지므로,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레나 리센:...제가 드릴 설명은 여기까지 입니다. 질문이 있으십니까? 최대한 대답해드리고 싶지만 아시다시피 대기 인원이 많아서 많은 시간을 할애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라비헨:(이미 편지를 외울 정도로 알고 있는 내용이라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유리창에 손을 얹는다) ... 없습니다.
레나 리센:...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러시다면-
그 때 짧은 노크 소리가 들리고 아까 그 직원이 들어와 말합니다.
“선생님, 대기 환자가 많습니다.”
레나 리센:죄송합니다만, 이만 가보셔야겠군요. 아마 내일도 같은 시간에 방문해주시면 면회가 가능할 것입니다.
…행운을 빕니다.
짧은 인사를 하고 진료실을 나가자 직원은 당신을 출구로 안내합니다.
그가 입구 옆에 출입 카드를 찍자 병동의 자동문이 열리고,
당신을 앞서 밖으로 나간 요원이 다음 차례의 대기자를 호명하는
바로 그 순간,
“거기 비켜!!!!”
-하는 소리에 뒤를 돌아볼 새도 없이,
당신의 뒤에서 달려온 누군가가 당신을 밀치고 문 밖으로 뛰쳐나갑니다.
라비헨:
민첩
기준치:75/37/15
굴림:23
판정결과:어려운 성공
당신은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벽을 짚어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보균자가 탈출했다!!”
“72병동 환자 탈출, 지원 바란다!!”
당신을 밀치고 병동을 뛰쳐나간 건 환자복을 입은 ‘보균자’ 입니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지 비틀거리면서도 날쌘 걸음으로 복도를 달리는 그를 피해
복도의 대기자들이 홍해처럼 갈라집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지원 요청을 듣고 반대쪽 복도에서 나타난 보안요원의 손에 붙잡히고,
곧이어 병동에서 달려온 다른 직원들에 의해 사지에 억제대가 채워집니다.
이 모든 과정이 5분도 안 되는 찰나에 이루어지고,
짧은 탈출이 끝난 그는 장정들의 손에 들려 병동 안으로 짐짝처럼 운반됩니다.
“나가게 해줘, 나는 인간이야, 갇히기 싫어, 나가게 해줘…”
고통스러운 울음소리는 무거운 철문 뒤로 사라지고,
복도엔 무거운 적막이 감돕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직원은 다음 차례의 보호자를 호명하고,
남은 대기자들은 다시금 순서를 기다립니다.
하지만 아마 여기 있는 모두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죠.
바이러스에서 완치되지 못한다면,
내 소중한 누군가는 평생을 저 안에 갇혀 지내야 할 것이라는 것을요.
과연 당신의 소한은 당신 곁으로,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요.
돌아오는 길의 하늘엔 꼭 당신의 마음처럼 먹구름이 가득 껴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당신은 거실의 소파에 쓰러지듯 눕습니다.
하루 종일 날이 흐린 탓에 불을 키지 않은 널찍한 거실은 어둑합니다.
지금 당신이 살고 있는 이 집은 연합정부가 생존자들에게 제공한 안전지대 안의 아파트,
그 중에서도 제일 넓고 좋은 축에 드는 곳입니다.
4인 이상 가족들에게 주어지는 넓은 아파트에서 당신은 혼자 살고 있는 것이나,
매달 나오는 지원금 같은 것…
멸망 이후의 이 과도기에 당신은 부족한 것이 없게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야 노트를 완성한 것은 소한이지만 노트를 가져온 것은 당신이니까요.
그래봤자, 소한이 곁에 없다면 이런 모든 것들은 무슨 상관일까요.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집안을 둘러보니 정돈되지 못한 부분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소한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에 우울하게 지내느라
집안일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었더랬죠.
...100시간이 지나기까지 남은 시간은 대략 72시간.
희망을 놓지 말아야죠, 그게 설령 30%의 희망일지라도.
언젠가 소한이 당신 곁으로 돌아올 때, 이런 엉망인 집으로 돌아오게 할 순 없으니까요.
우선 너저분한 거실부터 치워봅시다.
소파 위에 켜켜히 쌓인 겉옷들, 탁자 위의 다 마신 컵들,
구석구석 먼지들도 가득이네요.
라비헨:
하아... 30%라-
치료제가 있어도 완전히 돌아올 수 있는 확률이 고작 30%라니... 하하...
3년이나 기다렸는데 이대로 소한이 원래 상태로 돌아오지 못하면 어떡하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는... 이미 3년이나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는데.
집 안은 고요합니다.
그리고 그 정적을 간간히 메꾸는 것은 윗집에서 들리는 티비 소리,
옆집 가족들의 대화 소리, 웃음 소리…..
불이 켜진 주방을 제외하고 집 안은 어둡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무(無)의 공간 같아요.
이 넓은 공간과 어둠 속에서 느껴지는 호젓한 외로움에,
당신은 그릇을 치우고 평소보다 일찍 자리에 눕습니다.
잠이 들기 전 언젠가 소한과 함께 이스트베일의 마을에서
나란히 누웠던 침대가 문득 떠오르네요.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잠시 잠을 청한 그 낡은 침대 위에서 그때 우리가 무슨 대화를 했었는지,
소한은 나를 어떤 표정으로 바라보았는지…
소한과 함께한 시간을 되짚어보면 생생하게 기억나는 순간들도 있지만
꽤나 옅어진 기억들도 많네요.
내일 소한을 만난다면 기억이 돌아오는건
당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라비헨:(낮에 본 "인간이 아닌" 상태의 소한이 계속 떠오른다. 분명히 공격성을 띄고 있던 모습... 어쩌면 처음 보자마자 자신을 알아봐주지 않을까 했던 바보 같은 기대를 품었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진다)
다음 날 당신은 시간에 맞춰 병동으로 도착하였습니다.
어제와 같은 직원이 오늘은 당신을 사무실이 아닌
소한이 있다는 병실로 안내합니다.
“면회시간은 오후 다섯 시까지입니다.”
작은 병실 안은 낮인데도 커튼을 쳐 놓아 어둑합니다.
유일한 광원인 정면의 tv에선 대기실에서 나오던 것과 같은 뉴스가 틀어져 있고
작은 화장실과 냉장고, 벽에 붙은 서랍장,
그리고 방 안을 제일 크게 차지하는 침대에 앉아 있는 소한.
그는 멍한 표정으로 tv화면을 바라보다
정확히 당신 쪽으로 고개를 돌립니다.
소한:(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 라비?
….헤어진 후 이렇게 만나는 것은 몇년 만인가요.
가까이서 본 소한은 당신이 기억하던 마지막 모습보다
훨씬 마르고 수척한 모습입니다.
좀비로 변하고 난 후 생긴 상처인지, 몸 군데군데엔 반창고가 붙여져 있습니다.
라비헨:
Spot Hidden Roll
기준치:55/27/11
굴림:60
판정결과:실패
방 내부에 특별할 것은 없어 보입니다.
소한은 당신을 잡으려 이리저리 손을 뻗지만
아직 시야가 온전하지 않은 탓인지 허공만 휘적거립니다.
소한:(조금 조급해하며 열심히 손을 휘적인다) 어디, 어딨어 라비...?
라비헨:아... '맞다, 시력은 아직 안 돌아온다고 그랬지.'
(익숙할 만큼 들었던, 이제는 머릿속에서 거의 흐릿해져갔던 "라비"라는 애칭을 듣자마자 금방 눈물이 차오른다) 소한...
(네게 한 발짝씩 천천히 다가가 손을 잡아주며) 나...여기 있어.
소한:(허공을 더듬거리다가, 따뜻한 손이 닿자 반사적으로 끌어당겨 안으며) 찾았다...
라비헨:(떨리는 손끝으로 너를 부서질 듯 마주 안으며) 너무...
(어깨에 이마를 파묻으며 결국 훌쩍거린다) 너무... 보고 싶었어...
소한:(기억이 없는 탓에 훌쩍거리는 너를 의아해하며) ...울어? 왜 울어?
라비헨:(손끝을 바짝 세워 더욱 더 끌어안고, 서럽게 우느라 어깨를 한참이나 들썩이다가) ... 네가, 흑... 내 곁에 없었어서...
(눈물 젖은 얼굴을 들어올리며 뺨을 쓸어내린다) 나... 너무 힘들었는데, 그동안 정말 보고 싶었는데... 네 말 듣고 싶어서 얌전히 기다렸어...
소한:(네 이름과 네가 제게 소중한 사람이었다는 감정은 기억이 나는데, 사귀던 사이였는지 아니면 제일 친한 친구였는지, 자신이 일방적으로 좋아하던 사이였는지는 알 수가 없어서 조금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내가 얼마나 오래 옆에 없었어...?
라비헨:3년...
소한:...그전까지 우린 계속 붙어 다녔어?
라비헨:응... 항상 붙어 다녔어.
그래서 네가 없는 3년이 너무 힘들었어...
소한:(어떤 사이였는지 제대로 기억이 안 나는데도 네가 훌쩍이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입맞추고 싶은 충동이 든다. 그래도 그러면 안 되겠지. 억지로 마음을 잡아 누르며 너를 품에 꼭 가두고 등을 쓸어준다) 그... 라비. 나 기억이 거의 없어서. 네가 나한테 중요한 사람이라는 건 기억이 나지만 얼굴도 성격도 우리 같이 겪었던 일들도 기억이 잘 안 나.
기억에 중간중간 먹칠을 한 것 같아. 내가 어디에 살았고 무엇을 좋아했고 무엇을 싫어했는지,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고…
...미안해. 나만 몰라서.
설명 좀 부탁해도 될까?
라비헨:(눈을 반쯤 접어, 애써 웃는다) ...물론이지. 내가 다 설명해줄게.
(네 손을 들어 제 뺨에 대고 비빈다) 아직은 앞이 안 보이니까 내 얼굴은 이렇게 만져서 확인해줘. 그럼 더 알기 편할 거야.
어디서부터 설명하는 게 좋을까...
소한:(만지작만지작... 엄청 말랐네. 전에는 말랑... 했던 것 같은데)
라비헨:우리의 첫만남부터 얘기할까...
(네가 만지도록 내버려 두고 속눈썹을 내리깔며) 솔직히, 평화롭진 않았어. 네가 내 동생은 이미 좀비가 되어서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곧바로 죽였거든.
난 동생이 다시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란 희망을 버리지 못했어. 애초에 동생이 감염되었다고 믿으려 하지도 않았지.
...지금은 치료제가 나왔지만, 그래도 너를 지금까지 원망하는 건 아냐.
네가... 날 걱정해서 그런 판단을 내렸다는 걸 아니까.
(작게 힘없이 웃으며) 너를 쭉 원망하고 싶었고, 너랑 다니고 싶지 않았는데... 네가 막무가내로 날 동료로 삼았어. 하하...그땐 진짜 뭐하는 놈인가 싶었지.
소한:(솔직하게) 듣기만 하면, 그냥 미친 새낀데. (본인이 했다는 기억이 없어서 신랄함)
라비헨:그걸 이제 인정하는 거야? 너도 참...
안 가겠다고 버텼는데, 나를 들쳐 매더니 그대로 질질 데려갔다니까?
동생이랑 정했던 목표인 캘버리 교도소까지만 함께하고 그 후엔 흩어지려고 했는데... 음...
너를 쭉 미워할 수가 없었어.
악인으로 삼기에 너는- 마음이 가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소한:...내가 어떤 사람이었는데? 뭘 했길래.
라비헨:처음엔 또라인가 했는데, 무심하게 잘 챙겨줬지.
내가 우울해하니까 네가 가진 보급품을 나눠줬어. 그 중엔 술도 있었거든? 내가 홧김에 쭉 들이마시고 취하니까 나더러 "화상아." 라면서 한숨을 푹푹 쉬었어.
소한:...그거 잘 챙겨준 거 맞아? (난 또라이였구나)
라비헨:나름...? 왜 마음이 계속 갔던 건진 나도 잘 모르겠네.
네 동료는 내가 처음이 아니었다고 했어.
네가 살던 마을의 친구와 동행하다가, 친구도 감염자가 되어서 네 손으로 처리했다고 들었어. 그 외에 또 다른 동료도 있었지만... 마음이 간 건 내가 처음이라고 했지.
(피식) 네가 어느 순간부터 나더러 귀엽다 귀엽다- 해서 드디어 이 좀비 사태를 오래 겪더니 미쳐버린 건가 했다니까?
소한:(여전히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잔상은 조금씩 선명해진다) ...그건, 기억이 나는 것 같은데. 하지만 정말로 귀여웠는걸.
단순하고 별것 아닌 하찮은 것에도 행복해하고, 잘 웃고, 잘 먹고, 잘 자고...
아기 토끼, 같다고 생각한 것 같아.
라비헨:남들이랑 크게 다를 거 없는 것 같은데?
소한:단순해서 귀여웠지.
솔직하고, 잘 웃고, 잘 울고... 내 입장에서는 별것 아닌데 너무 행복해하니까, 네가 태양 같았어.
(피식) 맞다, 네 이름이 라비(Ravi; 태양)이었지. 부모님이 이름 잘 지어주셨네...
라비헨:갑자기 그런 얘길 들으니까 민망하잖아...
난 아무 생각 없이 했던 행동들인데.
아, 그건 있다. 솔직히 너 좀... 재미없는 놈이라고 생각했어.
표정 변화도 별로 없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전혀 몰랐었거든.
맨날 애새끼니- 화상이니- 하는 욕은 다 하다가 갑자기 귀엽다 귀엽다 하면서 안고 자려고 하니까 내가 얼마나 다른 의미로 무서웠는지 알아?
소한:...뭘, 무서워하기까지.
라비헨:너라면 안 무섭겠어? 날 엄청 한심한 것처럼 보다가 갑자기 귀엽다 소리 하면서 엉겨 붙는데.
소한:음... (제가 듣기에도 좀 그렇긴 하다) 어... 그럼 마지막까지 내가 널 짝사랑하는 관계였어?
라비헨:...아니.
(다시 설명하려니까 민망해서, 소한이 앞이 안 보인다는 걸 알면서도 시선을 돌린다) 네가 자꾸 의미심장하게 행동하고... 계속 안고 자다 보니까 나도 감겨버렸어.
소한:('감겼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한다)
라비헨:그러니까...
하아- 정확히 말하자면, 네가 온갖 핑계를 대면서 안고 자려고 하고 "친한 친구" 끼린 그럴 수 있다면서 뽀뽀도 하니까... 나도 슬슬 기분이 이상해서...
어쨌든 사귀는 사이였다고...!
소한:(작게 키득거리며) 왜 목소리가 커졌어. 귀엽네.
아, 얘기 들으니까 기억이 나는 것 같아. 맛있었지.
라비헨:ㅁ, 뭔 소리야?
소한:네가.
라비헨:대체 무슨 기억부터 돌아온 거야???
뭐가 기억났길래 "맛있었다" 라는 말이 나와?
소한:흠...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전부 다, 였던 것 같은데.
라비헨:"전부 다" 라니...?
소한:몸 말이야.
라비헨:왜 하필 그것부터 먼저 기억난 거냐고...
소한:너무 맛있었나 보지.
(그렇게 태연히 작게 웃으며 말을 잇다가, 천천히 웃음이 사라진다) ...내가 괴물인 상태로 널 만났다면 분명 못 참고 다 뜯어먹었겠지.
...
(별안간 덮치는 기분나쁜 기억에 휩쓸려 안고 있던 네 어깨를 밀치더니, 몸을 웅크린다. 표정이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진다) 나, ...기억났어. 난 괴물이야. 인간들 살을 뜯어먹으며 살고, 그 감각이 아직도 생생해. 그때, 그때 차라리 죽어버렸어야 했는데.
당신은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합니다.
차마 넌 괴물 같은 게 아니라고, 입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이렇게나 무너져 벌벌 떠는 소한의 모습이 낯설어 굳어버린 건지.
그렇게 입술을 말아넣었다 빼고 있으면
몸을 웅크리고 몸을 덜덜 떨던 소한이
일순간 고개를 홱, 치켜올리고 당신에게 달려듭니다.
쿵!!
벽에 등이 부딪히고 곧바로 소한의 억센 손아귀가 당신의 목을 조여옵니다.
라비헨:
근력
기준치:55/27/11
굴림:2
판정결과:극단적 성공
당신은 손에 힘을 주고 소한의 손아귀에서 쉽게 빠져나갑니다.
의아하죠, 저렇게 울분에 받쳐 있는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
당신을 노려보는 붉게 충혈된 흰자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그 누구도 비할 수 없다는 좌절한 눈동자를 하고 있으니까요.
소한은 왜 울고 있는 걸까요.
어쩐지 그 얼굴 앞에서 공포심이나 분노보다는
측은함이라는 감정이 먼저 치고 올라옵니다.
소한:(천천히 손을 떼어내고, 그대로 바닥에 쪼그려 앉아 울기 시작한다) 나는, 나는... 난 그러고 싶었던 게 아닌데... 내가... 흡... 내가...
라비헨:(안쓰럽게 네 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인다. 열심히 말을 고르려다 너를 한껏 안아주며 등을 토닥인다) 응... 알지.
(스르르 눈을 감으며 달래듯 속삭인다) 다 알고 있어. 네가 일부러 그러려던 게 아닌 거...
아직 시간이 필요해서 그럴 뿐이야.
...소한.
(네 두 뺨을 잡아 고개를 들어올리며) 나 봐봐. 멀쩡하잖아.
소한:(앞이 안 보이는데 대체 무얼 보라고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눈동자만 정처없이 흔든다)
당신이 그렇게 울먹이는 소한을 달래고 있으면,
방 문을 열고 보안요원들과 의료진들이 방 안으로 들어옵니다.
보안요원이 당신에게서 소한을 떼어낸 뒤 억제대를 채우고,
직원 중 한명이 당신을 방 밖으로 내보냅니다.
“괜찮으신가요? 잠시 나가 계셔야 겠습니다.”
당신은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문 밖으로 밀려납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얼추 정리된 듯,
문을 열고 나온 레나 리센은 당신에게 말합니다.
레나 리센:...어제 말씀 드렸던 상황입니다. 진정제를 주사했으니 곧 괜찮아 지겠지만, 원칙적으로 이런 상황이 있으면 최소 24시간동안 면회가 제한됩니다. 따라서 내일은 면회가 불가능 할 것 같습니다. 상태가 안정되는 것을 지켜보고 연락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셔야겠군요.
라비헨:(씁쓸하게 입을 다물었다가) ... 알겠습니다.
(굳게 닫힌 방문을 바라보며) '안녕...소한.
어쩔수 없이 집으로 돌아온 당신은 소파에 앉아 아까의 놀란 마음을 가라앉힙니다.
날이 흐린 탓에 불을 켜지 않은 집 안은 어둑합니다.
불과 몇시간 전만 해도 소한과 대화를 나누던 것은 그저 찰나의 환상같이 느껴집니다.
닫힌 문의 틈새에서 새어나오던 소한의 울음 섞인 비명소리와
의료진들의 급박한 대화 소리…
소란스러웠던 병동과 다르게 어제와 같은 적막함이 집 안에 가득 차올라
마치 그 속에서 익사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때 소파의 한 구석에 올려져 있는 tv의 리모콘이 보입니다.
라비헨:
기준치:45/22/9
굴림:36
판정결과:보통 성공
당신이 tv를 틀자 최초로 치료제에 의해 인간으로 돌아온
00씨에 대한 인터뷰가 나오네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옆에 앉는 사람의 손을 꼭 붙잡고,
화면엔 잔잔한 나레이션과 함께 감성적인 멜로디가 흘러나옵니다.
당신은 그런 TV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봅니다.
추억이 담긴 물건들, 기억이 되돌아 오도록 도와주는 것…
저 사실이 정말일까요?
어쩌면 이게 소한이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는 단서가 될까요?
라비헨:
지능
기준치:50/25/10
굴림:75
판정결과:실패
소한의 기억이 돌아올 만한, 이 집에 있는 물건은
소한이 작성하던 낡은 노트 한권 뿐입니다.
하지만 소한의 기억이 드문드문한 걸 생각해보면
저 노트마저 기억하지 못할 확률이 높겠죠.
소한에게 중요한, 소한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이 있을 곳...
...과거에 소한의 집에 물품을 챙기러 들렀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하지만 너무 거리가 멀어서 하루만에 가기엔 무리겠죠...
라비헨:(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 떠올라 상체를 벌떡 일으키고 중얼거린다) ...사과파이.
소한이 좋아하는 것 중에 사과파이가 있었잖아.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거라고 했고, 나랑 있을 때도 한 번 먹었으니까 분명 도움이 될지도 몰라.
(머리를 감싸며) 으으... 사과파이는 한 번도 안 만들어봤는데... 소한이 만든 것 만큼의 맛을 낼 수 있을까?
일단 사과랑 다른 재료부터 사야겠다. (벌떡 일어나서 나갈 준비를 한다)
당신은 장바구니로 쓸 가방을 챙겨들고 얼마간을 걸어
아파트 근처에 위치한 마트로 향합니다.
길목에 위치한 상가들은 문을 닫은 곳 보다 연 곳이 더 많습니다.
재정비를 거쳐 곧 오픈을 앞두고 있다는 가게들도 보여요.
아침에 들렀던 안전지대 외곽에선 병원을 제외하곤 아무 것도 없었는데요.
거주 구역을 주변으로 상권이 발달하는 것은 당연한걸까요.
저녁 시간이 가까워져서인지, 마트 안엔 장을 보는 사람들이 꽤나 많습니다.
라비헨:일단... 사과랑... 밀가루? 시나몬도 사야겠지? (미리 휴대폰으로 찾아놨던 사과파이 레시피를 확인한다)
당신이 휴대폰 검색창에 사과 파이 만드는 법을 검색하자
다양한 포스트들이 주르륵 뜹니다.
가만히 넘기다 보면, 재료는
박력분 밀가루, 버터, 설탕과 소금, 시나몬 가루, 레몬즙, 전분 가루가 보통이네요.
라비헨:(삐질...) 살 게 생각보다 엄청 많네.
설탕이랑 소금은 있으니까 레몬즙이랑 전분 가루만 찾으면 되겠다.
당신은 마트의 활기찬 조명 아래에서 카트를 밀며
재료들을 하나씩 찾아 나섭니다.
박스 가득 쌓인 붉은 사과와 고소한 냄새가 나는 유지류 코너,
밀가루와 전분, 시나몬 가루 등의 분말류를 파는 코너,
소한이 예전에 당신에게 자주 타주었던 코코아 분말이 놓인 코너 등등
당신은 마트 구석구석을 돌고 물건을 고른 뒤 계산대에서
계산을 마치고, 장바구니가 두둑해진 채로 집으로 향합니다.
집에 돌아오면, 어느새 기울어져 버린 해가 사라져
실내는 어두컴컴하게 잠겨 있군요.
라비헨:(주방의 불을 켜며) 직접 뭔가를 만드는 건 진짜 오랜만이네. 어색하다...
'소한을 찾았다는 소식이 들리기 전까진 완전 대충 살았었지...'
(소매를 걷으며) 한 번 만들어 볼까!
당신은 한참이나 쓰지 않아 먼지가 쌓인 주방의 조리대를 가볍게 청소하고
방금 장봐온 식재료들을 하나씩 늘어놓습니다.
자, 조리 도구를 꺼낼 시간입니다.
라비헨:
Sleight of Hand Roll
기준치:50/25/10
굴림:27
판정결과:보통 성공
당신은 커다란 커다란 볼에 밀가루와 설탕, 소금을 한데 체 쳐 내리고
냉장고에서 갓 꺼낸 단단한 버터를 칼로 잘게 조각내어 밀가루 속에 집어넣고는
휴대폰을 슬금슬금 살피며 계속해서 베이킹을 이어나갑니다.
손끝의 열이 닿지 않도록 주의하며 밀가루와 버터를 부슬부슬한 소보로 상태로 만들고,
얼음물을 조금씩 나누어 부으며 반죽을 뭉친 뒤
가볍게 뭉쳐낸 반죽을 둥글게 납작하게 만들어 비닐에 감싸고, 냉장고에 넣어 휴지시킵니다.
너무 열중한 덕인지 이마에는 얇은 땀방울이 맺히지만
가볍게 슥슥 닦아내고 사과 필링도 만들어낸 뒤
냉장고에서 반죽을 꺼내 파이틀 위에 채우고 필링도 도톰하게 넣은 뒤
오븐에 밀어넣고 한참을 기다리고 있자,
아주 천천히 사과 파이가 오븐 안에서 서서히 부풀어 오릅니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요,
띡- 띡- 띠리리링-
고요한 정적을 깨고 경쾌한 전자음이 울려 퍼집니다.
당신은 오븐 타월을 양손에 두껍게 감아쥐고,
심호흡을 한 뒤 조심스럽게 오븐 문을 당겨 엽니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오븐 내부에 갇혀 있던 뜨겁고 진한 열기가 확 밀려 나옵니다.
잘 구워진 버터의 고소한 풍미와 달콤하게 졸여진 사과,
그리고 알싸한 시나몬 향이 한데 뒤섞인 완벽한 향이 주방을 집어삼키듯 퍼져 나갑니다.
생각보다 잘 나온 것 같네요.
어두컴컴하고 쓸쓸했던 집안을 가득 채운 온기와 달콤한 냄새에
입가에 아주 오랜만에 엷은 미소가 번집니다.
소한이 먹으면, 정말 좋아하겠죠.
라비헨:와아- 처음 만든 것 치고 엄청 그럴싸한데?
역시 옛날 솜씨 안 죽었네.
... (잔잔하게 미소 지으며 사과 파이를 바라본다) 소한이 좋아했으면 좋겠다.
당신은 황금빛으로 바삭하게 구워진 사과 파이가 잘 식은 것을 확인한 뒤
냉동실에 밀어넣고 가볍게 주방을 정리한 뒤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해 침대에 눕습니다.
내일은 소한을 보러 가지 못하지만, 모레가 되면 정확히 5일.
소한이 병동에서 바로 나올 수 있을 수도 있으니,
내일은 집 청소라도 간단하게 하는 편이 좋겠죠.
이렇게 좋은 집에서 거지꼴로 살았다는 걸 알면
오랜만에 화상이니, 애새끼니, 하는 소리를 할 수도 있겠지만요.
물론 그게 이제는 기분 나쁘진 않을 것 같지만,
그동안 잘 지냈겠거니 걱정이라도 덜어줄 수 있다면야.
당신은 소한이 어서 나아 곁으로 오기를 희망하며
천천히 무른 잠에 빠져듭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라비헨.
당신은 아침 일찍이 일어나 묵은 먼지가 끼어 있는
아파트의 창문부터 전부 활짝 엽니다.
라비헨:켁, 켁- 어우, 먼지...
(삐질...) 확실히 너무 돼지우리처럼 방치하긴 했나 보다.
당신은 우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며
적적하니 거실의 TV도 가볍게 틀어둡니다.
...마침 날씨마저 대청소를 하기에 안성맞춤이네요.
시작해봅시다.
라비헨:
민첩
기준치:75/37/15
굴림:10
판정결과:극단적 성공
소한:
(To GM)rolling 2+1d5
2+
(
2
)
=
4
라비헨:
Sleight of Hand Roll
기준치:50/25/10
굴림:32
판정결과:보통 성공
라비헨:
Scavenge Roll
기준치:60/30/12
굴림:48
판정결과:보통 성공
소매를 단단히 걷어붙이고 머리띠도 쓴 뒤
먼지털이와 빗자루, 걸레를 들고 당신은 분주하게 몸을 움직입니다.
일단 먼지털이부터.
당신이 긴 먼지털이를 들고 높은 가구 위와 책장, 가전제품 위를 털어내면
툭툭 가볍게 털어낼 때마다 하얗게 피어오르는 묵은 먼지에
결국 콜록콜록 짧은 기침이 나옵니다.
아 미치겠네, 청소를 얼마나 안 한 거지...
그래도 이대로 멈출 수는 없지요.
당신은 선반들과 테이블, 소파를 조심스럽게 걸레로 닦아내고
소파의 틈새까지 꼼꼼히 털어냅니다.
커다란 빗자루를 들고 먼지 가득한 바닥을 쓸어내리면
슥슥, 고요한 집안에 바닥을 쓰는 마찰음이 경쾌하게 울립니다.
오랫동안 대충 살아오며 쌓인 생활의 때와 먼지 더미가 쓰레기받이에 가득 담길 때마다,
마음 한구석의 케케묵은 무력감도 함께 쓸려 나가는 기분이 듭니다.
걸레를 몇 번이나 빨아오며 마침내 바닥의 서걱거리는 먼지 감각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당신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렸습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집안 전체로 쾌적하게 순환됩니다.
어둑하고 가라앉아 있던 실내는 먼지 하나 없이 말끔하게 정돈되어,
비로소 ‘사람이 살고 있는 집’처럼 바뀌었네요...
몇 시간이나 청소를 한 거람...
이 정도면 소한이 돌아와도 화상 소리는 안 들을 것 같습니다.
라비헨:(청소 도구를 정리하고 소파에 죽은 듯이 풀썩 늘어진다) 으으.... 죽겠다...
잔소리 안 들으려고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벌써 해가 다 졌네.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러게 진작 사람 사는 꼴로 살지 그랬어요...
커다란 통창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것을 보며
당신은 뒤늦게 배가 꼬르륵거리는 것을 느낍니다.
조금 쉬다가 씻고 저녁 먹은 다음에 오늘은 하루를 마무리할까요.
라비헨:귀찮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
어제 만들어 놓은 사과파이로 떼워야겠다...
어차피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소한 줄 사과파이는 새로 만들면 될 테니
당신은 냉장고에서 사과 파이를 꺼내 가볍게 해동하고는
저녁을 간단히 때웁니다.
흠, 어느 호텔 셰프가 만들었는지
정말 맛있네요.
그렇게 다 먹고 정리한 후 씻고 침대에 눕자
하루 종일 움직인 탓인지 피로가 몰려옵니다.
오늘은 일찍 잡시다, 내일은 아침부터 사과 파이를 굽고
소한을 만나러 가야 하니까요.
눈을 뜬 당신은 더럽고 헤진 옷을 입고,
낮설지만 어딘가 눈에 익은 거리에 서 있습니다.
손에 쥔 쇠파이프에선 핏방울이 떨어지고,
당신의 발 밑엔 좀비들의 시체가 즐비합니다.
이곳은 당신이 생존하며 지나쳐 온 수많은 장소들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그 때와 다르게 당신 곁에 소한은 없네요.
이것이 과거이고 꿈 속이라면 소한 또한 당신 곁에 있어야 하는데…
소한을 찾기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찰나, 또 다른 좀비 한 무리가 당신을 공격해옵니다.
팔과 다리가 반사적으로 움직이며 손에 쥔 무기를 휘두릅니다.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좀비들이 쓰러지고, 허공엔 살점과 핏방울이 흩날립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당신을 공격하던 마지막 좀비가 무기에 맞아 천천히 쓰러집니다.
그리고 한발 뒤늦게 깨닫습니다.
그 좀비는, 당신이 그리도 사랑하는 소한이라는 것을.
땅에 쓰러진 좀비, 아니, 소한일까요.
그는 당신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희미하게 당신을 부릅니다.
"라, 비..."
번쩍, 하고 꿈에서 깨어나면 방 안은 아직 어둡습니다.
쿵쾅대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숨을 크게 몰아쉬고 나면,
아직도 생생한 손 끝의 감각에 양 손이 떨려옵니다.
지금 시간은 오전 5시, 아무래도 다시 잠들긴 그른 것 같아요.
그리고 마저 잠든다고 해도, 소한에게 줄 사과파이를 구울 시간은 부족하겠죠.
당신은 무겁게 몸을 내리누르는 무게를 이기고 커튼을 걷은 뒤 창문을 엽니다.
새벽의 습하고 짙푸른 공기가 방안에 가득 찹니다.
침대에 걸터앉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면
도시의 건물들 너머로, 마치 캘버리에 들어서던 그때처럼 서서히 동이 터옵니다.
아침 햇살을 등지고 당신을 떠나보내던 소한.
그제 당신의 목을 조를때 처럼, 그때도 그는 울고있었던가요.
유언처럼 마지막에 그가 당신에게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살아남아줘.
그 말이 저주처럼 남아 당신은 죽고싶을만큼 괴로운 순간들에도
죽지 못한 채 지금까지 삶을 이어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에겐 또다시 100시간이 주어졌습니다.
당신을 내게서 떠나보낼 100시간이 아닌,
당신이 내게 되돌아올 100시간.
사무치게 그리운 느낌에 가슴 한쪽이 저려옵니다.
이제 남은 시간은 12시간.
당신은 언젠가 소한과 함께 바라보았던 아침 해를 바라보며 다짐합니다.
당신이 인간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만은 너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소한:
(To GM)rolling 2+1d6
2+
(
1
)
=
3
라비헨:
Sleight of Hand Roll
기준치:50/25/10
굴림:19
판정결과:어려운 성공
당신은 이른 새벽에 깨어나 소한에게 줄 사과 파이를 재차 굽고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집 밖을 나섭니다.
오늘 집으로 돌아올 땐 이 길을 함께 걸을 수 있을까요.
당신은 산책이라도 할 겸, 평소와 다니던 길과 다른 길을 걷습니다.
지난 나흘 간 소한이 낫지 못할까 두려웠던 마음은 잦아들고
소한이 다시 곁으로 돌아왔을 때의 상황이 먼저 떠오릅니다.
집에 들어서 물건이 왜 이리 적냐고 타박하고, 같이 요리를 하고,
같이 씻고, 입맞춤을 나누고, 함께 껴안고 잠이 들고.
소박하기 짝이 없는데도 3년 동안 너무나 그리워해서
눈물을 차오르게 하는 순간들이 말이죠.
당신은 소한에게 선물할 사과파이가 든 상자를 든 채
병원 앞으로 조용히 향합니다.
그러던 그때, 당신의 시선에 병원 앞 횡단보도에 모인
사람들이 보입니다.
성별도, 나이도 제각각이지만 그들은 공통적으로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피켓과 판넬, 확성기 같은 것을 들고 있네요.
라비헨:
민첩
기준치:75/37/15
굴림:36
판정결과:어려운 성공
횡단보도를 건너던 당신은 병원 앞으로 밀려드는 사람들에 부딪힙니다.
순간 중심을 잃었지만 다행히도 넘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당신을 밀치고 지나간 사람들은 병원 앞에 모여 현수막과 피켓을 들고
일제히 구호를 외치기 시작합니다.
“좀비는 사람이 아니다! 괴물이다!”
“괴물은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거대하게 꿈틀대는 악의가 형상화 된 것 같습니다.
치료제가 개발되고, 좀비로 변한 사람들이 원래대로 돌아오고,
그렇게만 된다면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것이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님을 깨닫습니다.
소한이 설령 인간으로 돌아온다 하더라도
그가 이전처럼 인간으로 인정받을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좀비였던 소한은 스스로를 인간으로 생각할까요.
그런 복잡한 마음으로 병실의 문을 열면
그제처럼 방안의 침대에 앉아있는 소한이 보입니다.
병실 안의 tv에선 아까 그 시위 장면이 뉴스로 보도되고 있네요.
소한:(문 열리는 소리에 돌아보다가, 익숙한 발걸음 소리에 자연스럽게 너라는 것을 알아채고 입가에 미소를 맺은 채로) ...왔어, 라비? 기다렸어.
(네가 괜히 걱정할까봐 슬쩍 리모콘을 들어 TV 전원을 끈다)
라비헨:(신경쓰지 않는 척 웃으며 다가간다) 오래 기다렸어?
소한:...응, 아주 많이. (너를 껴안고 싶어서 또 여기저기 팔을 휘적거린다)
라비헨:아. (사과파이를 잠시 근처에 놓고 먼저 안아준다) ...몸은 어때? 괜찮아?
소한:(네 등을 놓치기 싫다는 것처럼 꽉 안으며) ...응, 지금은 괜찮아. 저번엔 미안.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라비헨:사과 안 해도 된다니까...
그저 치료되는 과정 중에 하나일 뿐인걸.
나 없는 동안 어떻게 지냈어?
소한:...별 일 없었어. (가볍게 네 품에서 뺨을 비빈다) 이 곳은 모든게 규칙적으로 흘러가. 기상, 식사, 약먹기, 신체검사, 점심, 약먹기, 자유시간, 저녁, 약 먹기, 취침…. ….나는 이 방을 혼자 쓰지만 다른 사람들은 6명이 한 방을 쓴다고 들었어. 내가 왜 특별 취급을 받는지 모르겠네.
라비헨:(네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그건- 네가 엄청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라서 그래.
전에 얘기하다 말았었지?
...네가 어쩌다 감염됐던 건지 말해줄게.
분명 들으면 나보고 헛소리 하지 말라고 할 것 같아. (키득키득)
소한:...? 무슨 얘기길래.
라비헨:캘버리로 이동하는 도중, 한 연구실에서 잠시 휴식을 취할 때 네가 꿈을 꿨었다고 했어.
(스스로 말해주면서도 허무맹랑한 소리라 중간중간 피식 웃는다) 무슨... 잘생긴 남자가 나와서 치료제 공식을 알려주겠다고 했다는 거야.
당연히 공짜로 알려주는 건 아니고... 네가 감염되면 알려주겠다나-
너는 결국 그 제안을 받아들였어. 놀랍게도 꿈이 개꿈은 아니었는지 좀비한테 물리지도 않았는데 감염 증세가 시작됐었고.
원래라면 좀비로 변하는 데 24시간이면 끝나지만, 남자는 치료제 공식을 알려주기에 그 시간이 짧다는 걸 인정하고 100시간까지 늘려줬댔어.
너는 그렇게 나한테 비밀로 하고서 100시간 동안 치료제 공식을 열심히 기록하며 빨리 캘버리에 날 데려가려고 했지.
라비헨:그리고 거의 다 도착할 때쯤에 내게 감염 사실을 들켰지.
소한:... (어렴풋하지만 조금씩 기억이 나는 듯도 하다) ...그때 네가 정말 많이 울었지...
라비헨:...이제 다 기억이 나?
소한:어느 정도는...
라비헨:아직 감염도 안 됐는데 왜 굳이 그런 바보 같은 제안을 받아들인 건지 몰랐어.
... 근데 치료제 공식이 기록된 노트 마지막에 모든 건 나를 위해서- 라는 글이 있었어.
소한:... (가만히 눈을 깜빡거린다)
라비헨:진짜 바보 같다고 생각해, 여전히.
대대적으로 알려지진 않았지만 정부는 네가 기록자인 걸 인정하고 이렇게 나와 너를 특별대우 해주는 중이야.
원래라면 치료제 맞는 것도 엄청난 대기줄을 서야 한다고.
소한:... (기억난다. 네가 죽을까봐 사라질까봐, 전전긍긍하던 나날들. 함께 그리고 싶었던 미래들. 더없이 소중한 네가 이런 비참한 곳에서 떠돌이처럼 살지 않기를 바랐던 마음들)
...그렇게 된 거였구나. 기억 났어.
라비헨:다행이네. 바로 기억이 돌아와서.
(옅게 웃으며 소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 있잖아, 소한.
나중에 혹시라도 그 남자가 또 꿈에 나오면 대신 좀 때려줄래?
소한:...때렸다가 바이러스 변이체 만들면?
라비헨:...그건....
그치만 너무하잖아. 치료제라면서 완치 확률이 고작 30%라고 발표됐다고.
너 반쯤은 사기당한 거야.
소한:그건... 맞지.
그래도 이성은 돌아오잖아.
라비헨:... 사실상 오늘 내로 시력이 돌아오지 않으면 당장 나랑 함께하지 못할 수도 있어.
소한:...
그냥 눈을 뽑고, 눈이 없어서 앞을 못 보는 거지 완치는 됐다고 우길까?
라비헨:되겠냐고...
너 눈 뽑으면 나 앞으로 어떻게 보게?
소한:내 귀염둥이 없이 내가 어떻게 살아.
...
그건...
라비헨:넌... ....
(민-망) 내 얼굴이랑 몸 보는 거 제일 좋아했잖아.
눈 뽑을 수 있어?
소한:많이 아쉽긴 하겠지. (존나 좋아하는데)
라비헨:그러니까 노력해 봐.
아, 너한테 도움이 될만한 것 좀 가져왔어.
(옆에 놨던 사과파이를 코앞에 갖다대며) 일단 냄새부터 맡아봐.
이게 뭔지 알겠어?
소한:(작게 코를 킁킁거리며...) ...시나몬? 사과? 잼이야?
라비헨:힌트는 네가 엄-청 좋아하는 디저트야.
소한:(잠시 깊게 고민하다가) ...사과 파이? 자기가 구웠어?
라비헨:응. 이번에 처음 시도해보는 건데 네 입맛에 맞을 지 모르겠네.
소한:네가 주는 거면 탄내 나도 먹지.
(킁킁...) 엄청 좋은 냄새 나.
라비헨:애인한테 주는 건데 어떻게 그런 걸 주냐? 바보...
먹기 좋게 미리 잘라 갖고 왔어. 잠깐만-
(한 조각을 떼서 네 입에 가져다 대며) 아- 해봐.
소한:(살짝 심장이 두근거려서, 어설프게 입을 연다) ㅇ, 아...
라비헨:'귀여워.' (작게 웃음 소릴 흘리며 파이를 입에 넣어준다)
소한:(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는다) ...엄청 맛있어. 자기 빵집 차려도 되겠다.
라비헨:하하, 과찬이야.
소한:(꼭꼭 씹어 삼키며) ...꼭 나아야겠어, 병원 밥 맛 없거든. 나가야 이것보다 맛있는 것도 먹지.
라비헨:얼른 내 얼굴 좀 확인해줘.
아마 말랐다고 놀랄걸?
소한:(허공에 맺힌 그림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더듬어 네 얼굴을 매만진다) ...알고 있었어. 광대뼈가 다 만져지잖아.
내 토끼 볼 말랑말랑하게 보존하느라 내가 엄청 고생했었는데.
라비헨:그러니까- 몸한테 협조 요청 좀 해봐.
네가 만든 요리도 슬슬 무슨 맛이었는지 까먹었단 말야.
소한:(쪼물쪼물 만지며 피식 웃는다) 제일 먹고 싶은 요리는 뭔데?
라비헨:음- 스튜가 먹고 싶어!
소한:(귀여워...) 고기 많이 넣어서?
라비헨:응!
소한:(사랑스러워) 응, 고기 많이 넣어서. 내 귀염둥이 살찌워야지. 특식으로 만들어줄게.
라비헨:너무 좋다. (벌써부터 기대하는 투로 말하며 , 설렘을 참지 못하고 네 입술에 입을 맞췄다 뗀다)
소한:(잠시 놀라 벙쪘다가, 부스스 웃으며 네 입술에 제 입술도 덮고 쪽쪽 입을 맞춘다. 아직 자신이 완치가 될지 안 될지도 모르겠지만, 너와 함께하는 이 순간만은 아무런 걱정도 사라져버려서, 그저 웃음만이 계속 나온다) ...사랑해, 라비.
라비헨:(앞이 보이지 않아 입술을 조금 비껴가도 그저 행복하게 웃으며 두 뺨과 두 눈에 차례로 입을 맞춰준다) 나도 사랑해, 소한.
소중한 사람과 같이 보내는 시간은 왜 이리도 빠르게 흘러갈까요.
어느새 시계를 보면, 남은 시간은 고작 10-20분 남짓.
밖에서는 당신의 면회 시간이 얼마 안 남았음을 알리듯
복도에서 발걸음이 울려 문 앞에 섭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한참이나 조잘거리던 입이 우뚝 멈추어 서고
그 공간에 무거운 긴장감이 내려앉습니다.
복도의 소리와 찰나의 침묵을 알아챘는지,
소한은 당신에게 말합니다.
소한:... (이제 시간이 거의 다 됐구나) ...라비, 이제 시간 거의 다 됐지? 대략 몇 십분 후에 내가 여기 남을지 너와 함께 떠날 수 있을지 결정된다는 거...
...한참이나 아무렇지 않은 척 얘기했지만... (보이지도 않는 눈을 깜빡거리면서도 고개를 낮춘다) ...난 괴물이었는데... 여기서 나가도 우리가 살 삶이 행복할 수 있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
...
...라비. 넌 나를 인간으로... 예전의 나로 바라봐줄 수 있어?
너만 그래준다고 하면... 난 다른 건 다 상관없어. 치료도, 얼마든지 버티고, 갇혀 있는 생활도 얼마든지 버틸 수 있을 것 같은데... (덩달아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아서 말끝이 흐려진다)
라비헨:...
(눈을 반 접으며 네 뺨에 손을 올리고 씩 웃는다) 무슨 바보 같은 질문을 하는 거야...
나에게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넌 괴물이 아니었는데.
갑자기 말이 많이 많아지다니, 너답지 않아.
...그저 너는 감기 같은 단순한 질병에 걸려서 치료를 받는 중인 거야.
그러니 얼른 나을 준비나 해, 바보야.
소한:(구박하는 것 같지만 그 안에 담긴 말은 다정하기만 해서, 눈에 눈물이 맺힌 채로 웃는다) 인정하기 싫은데, 이번만은 바보인 거 인정해야겠네.
(네 허리춤에 손을 넣어 꼭 끌어안고, 어깨에 뺨을 비빈다) ...난 바보니까, 똑똑한 자기 말이 다 맞겠어.
라비헨:(엄지로 네 눈가를 쓸어주며) 왜 울고 그래...
너답지 않다며 뭐라 했지만... 솔직히 네가 없는 3년 동안 나도 나답지 않았었다?
네가 희생해서까지 기록한 치료제가 정말 치료제가 맞을까- 치료제가 개발되기까지 대체 얼마나 걸릴지- 만약 개발이 되어도 너를 다시 찾을 수 있을지 같은 생각을 했어.
소한:(피식피식) 걱정꾸러기.
라비헨:지나치게 길게 느껴졌던 그 3년보다 이렇게 널 다시 만나서 대화할 수 있는 지금이 무척 행복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네가 존재하기만 한다면 난 뭐든 좋아.
소한:... (너를 가만히 끌어안은 채로, 눈물 젖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린다)
삑, 삑, 삑—….
그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리자 책상의 전자 시계에서
100시간의 종료를 고하는 알람이 울립니다.
겉보기에 소한은 아무런 변화가 일어 난 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
덜컥, 심장이 무겁게 내려앉습니다.
얼마 후 병실로 레나 리센이 들어와 당신에게 말합니다.
레나 리센:시간이 됐군요. 몇가지 검사를 할 테니 잠깐 나가 계시겠습니까?
당신은 무거워지는 심장을 내리누르며
밖으로 조심스럽게 나갑니다.
부디 소한이, 완치가 되었어야 할 텐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면
문간을 손에 쥔 소한이 당신을 보며 웃고 있습니다.
소한:...나, 조금씩 네가 보여. 퇴원해도 된대. 집에 갈까?
흐리멍텅했던 연록색 눈에 빛이 들어옵니다.
아, 아...
가슴이 턱 막히더니 가느다란 숨소리만이 새어나옵니다.
고작 30%, 그 낮고도 가망 없어 보이는 확률을 뚫고
소한이 당신에게 조금 비틀거리며 다가와 손을 잡습니다.
허공을 헤집지도 않고, 어느 정도는 맞아떨어지는 위치로.
소한:(네 손을 살짝 들어올려 손등에 입 맞추며, 네 얼굴을 올려다본다) ...집으로 돌아가자, 라비.
해가 어둑하게 지고 있는 창문 밖에서
밤의 장막이 서서히 드리우며
도시의 건물들 사이로 어둡게 그림자가 지고 있습니다.
3년 6개월하고도, 100시간을 넘어서
아주 오랫동안 외롭고 고달프고 사무쳤던 기간을 지나
소한은 마침내 당신에게로 돌아옵니다.
병원 복도인 것도 잊고 울음이 한껏 터져나옵니다.
그 모든 소박했던 꿈들이, 희망이, 기대가
헛되지 않았다는 그 사실이 얼마나 안도되는지요.
당신은 소한과 몇 가지 퇴원 절차를 밟은 후
다정하게 손을 잡고 병원 밖을 나옵니다.
삶이 완전히 바이러스 창궐의 이전같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걷는 길이 춥고 어둡더라도 맞잡은 손의 온기는
당신에게 뭐든 다 괜찮아질것이라고 말해주고 있기에.
이만 돌아갈까요, 오늘 밤은 못 다할 이야기가 많을 테니까.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