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조난 사건
소한의 고향 마을을 나선 지 벌써 한 달,
함께 여정을 나선 지 벌써 두 달째입니다.
당신은 소한과 꼭 ♥ 끌어안은 채로 눈을 떠
조심스럽게 작은 한숨을 내뱉어봅니다.
고향에서의 사건 이후부터 어쩐지
소한은 마치 분리불안이라도 걸린 것처럼
당신에게 툭하면 밀착하고 있기 때문이죠.
잠들기 직전부터 몸을 꽉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는다던지,
툭하면 손을 잡고 머리를 쓰다듬는다든지...
식사를 할 때면 당신의 몫을 먼저 챙겨주거나
먹기 힘든 음식의 경우 뼈나 가시를 다 발라준다든지...
소한은 "추워서 붙어자야겠다", "면역력이 약해진 것 같다",
"네가 빨리 먹어야 출발 시간이 빨라진다" ... 같은 말들을 하지만
그게 한 달이나 지속되고 있다 보니
변명이나 꼼수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소한.
깨어있는 거 다 알아.


언제까지 날 손난로처럼 쓸 작정이야?
목에 난 상처는 다 나았으면서!




이 거짓말쟁이야.


대체 그 면역력은 언제 회복되는 거야?
너 튼튼한 거 다 알거든?




너무 딱 붙어서 자잖아.


(굴이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만 눈을 조금 긁어서, 슬쩍 소한의 등허리에 집어넣는다)






갑자기 왜 이렇게 느긋해졌나 모르겠네.

(잠시 얻어낸 유예에 따뜻하게 숨을 고르며) 10분 뒤 봐, 라비. (너를 폭 끌어안은 채로 다시 잠을 청한다)

에휴... 그래. 자자. (마저 눈을 붙인다)
어떻게든 다시 잠을 청하려고 하면
소한의 팔이 당신을 포근하게 감싸 안습니다.
분명... 처음엔 당신의 잠꼬대가 먼저였을 텐데.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거죠?
그렇다고 무언가 사심이 담겼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것이
마을에서의 짧게 다가왔던 입맞춤 말고
무언가 접촉에 더 진전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입술이 다가온 건 그때가 마지막이었고,
그저 그 이후부터 몸이 밀착되어 있는
빈도수가 늘었을 뿐이죠.
눈에 띄게 잦아진 게 문제지만...
소한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가끔 열이 오르는지 얼굴이 붉어지는 걸 빼면
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니까요.
짐작이 갈 턱이 없습니다.

'친구한테도 이렇게 고집불통이니 배우자에겐 어떻겠어.'
그러거나 말거나
맞닿은 가슴팍과 끌어당겨 묻힌 뺨에서 느껴지는 체온은
따뜻하기 그지 없습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꽉 붙어서 자게 되려나 싶네요.
인간 손난로가 된 기분입니다.
그리고 소한은 그 손난로를 아주 애용하는 중이고 말이죠.





안 자는 거 다 알아.

...
갑자기 이상형은 왜.



그렇다는 건 너도 "좋은 사람"의 기준이 있다는 거 아냐?

똑똑하면 더 좋긴 하겠지.




...
(마저 툴툴거리려다가 슬쩍 너를 내려다보며) 자기 주관 강한 사람이면 더 좋긴 하겠어.

근데 조건 되게 까다롭다.
귀여운데 예뻐야 하고 착하고 사려깊기까지 한데 똑똑해야 하고.
평생 네 이웃으로 살아줘야겠네...

(툭) 평생 갈 이웃사촌이 있다는데.






...
그건 싫은데.





그렇게 생각하니까 역시 넌 결혼하는 게 좋겠다.







(꼭 붙은 채로 네 정수리에 뺨을 댄다)

만약 네 이상형에 부합하는 사람을 결혼 적령기가 넘어서도 못 찾으면 우리 집(결혼했다는 가정)에서 사는 것도 허락해줄게.

(...가 뒤늦게) ...근데 갑자기 웬 애 취급?

애 취급 싫으면 안 하고.



마누라 딸리고 애 딸린 집에 초대하는 거였어? 가족들 의사도 없이?

생각만 해본다는 거지.




밥도 잘하고, 손재주도 좋은데.


에휴... 예쁘고 귀엽고 똑똑한 여자가 부디 소한을 좋아해야 할텐데.




소한 너, 생각해봐.
집에 들어왔는데 눈길만 휙 주고, "왔어?" 하는 배우자랑-
재빠르게 너한테 와서 "왔어? 사랑하는 남편-" 하는 배우자랑 누가 더 좋아?

둘 다 싫어.

그럼 결혼을 어떻게 하게?






이거 맞아?


산 사람이 있을 지가 문제지.







흐음...




뭐긴. 그렇게 생각하라는 거지.

음...
음~ (사실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없어서 즉석으로 생각하는 중)
다정하고, 마음씨가 착하고, 표현이 많으면 좋겠지?
아, 키는 좀 작은 게 귀엽겠다.





건장한 성인 남자 달게 생겼는데도 결혼해주겠다는 여자 어디 잘 찾아봐.
... (불현듯 여자 한 명에 남자 둘이 결혼했다는 모 신문 기사가 떠오름)



별로일 게 뭐가 있어?






소한의 뒷모습은 평소보다 유난히 뻣뻣합니다.
대답하기 곤란할 때마다 특유의 '딴청 피우기'를 하긴 하지만,
이번에는 어쩐지 도망치는 기색도 섞여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투덜거리며 그를 따라 굴 밖으로 나옵니다.
'나랑 안 다닐 거잖아'라고 말하던 그 짧은 순간의 낮은 목소리.
그건 단순히 파트너를 잃기 싫어하는 불평이라기엔,
묘하게 '버려지기 싫어하는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죠.
혹시 당신의 말이 '예정된 이별'처럼 들린 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정확한 건 소한만이 알겠죠.
당신은 오늘따라 유독 시니컬한 소한을 따라
다시금 설원을 건너갈 채비를 합니다.
.
.
.
대체 왜 저러는 걸까요?
아니 어디서 기분이 상한 거야?
소한은 아침 식사를 먹고 배낭을 짊어지는 내내 토라지더니
기나긴 눈밭을 걸어가는 동안에도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평소에는 그렇게 꼭 붙어있으려고 안달이더니.
당최 영문을 알 수가 없네요.
당신은 소한의 손목과 연결된 밧줄 끈이 달랑거리며 흔들리는 모습만
멍하니 바라보며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입니다.
점차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기 때문일까요.
아주 조금은 덜 추운 것도 같습니다.
하긴 북부에서의 빙하기는 도저히 사람이 살 날씨가 아니었죠.
영하 50도까지 이른 적도 있었으니...
이 정도로도 감읍할 따름입니다.



기분이 안 좋아보이는데.











오늘따라 왜 저렇게 퉁명스럽담?
이해할 수가 없네요.
당신은 소한을 쫓아 탁탁 거리를 좁힙니다.
줄이 느슨해지며 아래로 늘어지는 감각이 날 때쯤일까요
소한은 여전히 대놓고 툴툴거리는 기색이면서도
천천히 걷는 속도를 줄입니다.
...나란히 걷고 싶으면서 괜히 퉁명스럽게 굴기는.
완전 바보가 따로 없네요.
그때...

| 기준치: | 80/40/16 |
| 굴림: | 73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사아아악-!
고막을 반으로 쪼개버리는 듯한 돌풍 소리가 들립니다.
순간적으로 그 선명하고 날카로운 소리에 온몸이 섬뜩해집니다.
단순한 눈보라 소리가 아닙니다.
그보다 더 흉포하고, 거칠기 짝이 없는,
야수의 숨결 같은 소리네요.

느낌이 안 좋아.


뭔가... 눈사태가 일어나기 직전이랑 비슷해.

소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습니다.
대기를 짓누르던 무거운 정적이 일순간
'콰아앙—!' 하는 파열음과 함께 산산조각 납니다.
사방으로 얼음 파편이 거칠게 튀어나가는 것에 잠시 눈앞을 가렸다가
다시 눈을 떠 확인한 것은
저 멀리 지평선 끝에서부터 하늘과 땅을 이으며 요동치는
거대한 백색 기둥입니다.
단순한 자연현상으로 보기 어려울 만큼
설원의 눈과 얼음, 산소까지 빨아들이며 몸집을 불리는 거대한 괴물 같습니다.
토네이도의 중심부는 회색빛 소용돌이로 가득 차 있고,
그 외곽은 날카로운 얼음 파편들이 초속 수십 미터의 속도로 회전하며
모든 것을 갈아버릴 듯한 기세를 내뿜습니다.
아까 들었던 '사아아악—!' 하는 소리는 전주곡에 불과했습니다.
이제는 수천 개의 얼음 결정이 동시에 깨지는 듯한 굉음이 고막을 직접 타격합니다.
당신과 소한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십니다.
방랑자로서 수많은 위기를 넘겨왔지만
자연이 주는 이 압도적인 폭력 앞에서
어찌할 도리가 있을 리 없습니다.

가자!


| 기준치: | 75/37/15 |
| 굴림: | 3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 기준치: | 65/32/13 |
| 굴림: | 95 |
| 판정결과: | 실패 |
뒤에 있던 당신이 앞에서 뛰고
소한은 그런 당신을 바짝 뒤쫓습니다.
공포스러운 얼음 기둥을 차마 돌아볼 새도 없이
발바닥이 뜨끈하고 아릿해질 정도로 달리고, 달리고, 달리고
바짝 당겨지지 않는 손목에 달린 끈으로 소한이 잘 따라오고 있겠거니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리다가...
돌풍 소리가 안전 거리를 유지할 만큼 멀어졌을 때 멈춰섭니다.
바람은 싸늘하고 차가운데도 숨은 거칠게 헉헉거리고
필사적으로 도망쳤던 이마에서 난 땀방울이 냉기를 맞아
작게 얼음처럼 굳어 있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한참이나 무릎에 손을 짚고 헉헉거리다가
끈 매어진 손목을 들어 이마의 결정들을 잠시 걷어냅니다.
그때,
덜렁,
손목에 매인 끈의 반대편 끝이
당신의 앞에서 축 처집니다.
소름이 돋아오릅니다.

손목에는 끊어진 밧줄 조각만이 처량하게 매달려 흔들리고 있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당신은 미친 듯이 왔던 길을 되돌아 달리기 시작합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폐가 터질 듯 아파오던 고통은 온데간데없고,
심장이 발등까지 떨어지는 것 같은 공포만이 차오릅니다.
손목에 매달린 밧줄 끝은 아무런 저항 없이 스르륵 끌려옵니다.
누군가 칼로 벤 듯 매끄럽게 잘린 것이 아닙니다.
거대한 힘에 의해 짓이겨지고 뜯겨 나간 듯한 거친 단면.
토네이도에 휘말린 파편 중 무언가가 두 사람 사이를 가르고 지나간 것이 분명합니다.
그 와중에도 돌풍이 쓸고 지나간 자리는 공포스러울 정도로 매끈합니다.
당신이 필사적으로 밟고 왔던 눈길도, 당신을 뒤쫓던 소한의 묵직한 발자국도,
거대한 백색 소용돌이가 모두 삼켜버린 지 오래입니다.

들리면 대답해!

| 기준치: | 80/40/16 |
| 굴림: | 37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눈앞을 가로막는 백색의 장막 너머로
당신은 필사적으로 청각을 곤두세웁니다.
당신의 감각은 이제껏 살아온 것 중 손꼽힐 없을 정도로 예민하게 날이 서 있습니다.
아주 작은 눈송이가 바스라지는 소리,
얼음판이 수축하며 내는 비명조차 놓치지 않을 기세입니다.
하지만, 들려오는 것은 잔인할 정도의 정적뿐입니다.
보통의 눈보라라면 바람의 울음소리라도 들려야 하건만,
토네이도가 지나간 자리는 진공 상태처럼 고요합니다.
당신의 가쁜 숨소리와 고동치는 심장 소리만이 고막을 때릴 뿐,
소한의 낮은 목소리도, 신호탄이 되어줄 날카로운 총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당신은 무릎까지 빠지는 눈더미를 헤치며 아까 달려온 길을 되짚으려 하지만,
이미 지형도 바뀌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언덕이었던 곳은 평지가 되어 있고,
얼어붙은 개울물 위로 눈이 함빡 쏟아져
평지나 다름없어 보입니다.

'어디로 가야 하지? 지도도 소한이 갖고 있고...' 진짜 X됐네...

| 기준치: | 50/25/10 |
| 굴림: | 36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당신은 불현듯 조난 상황일 때를 대비해 챙겨뒀던
가방 속 호루라기를 떠올려냅니다.
고작 이런 걸로 소한이 저를 찾아올 수 있을진 확신이 없지만...
그래도 가만히 서 있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입니다.
당신은 얼어붙은 손으로 급히 가방을 뒤지며 호루라기를 찾다가
잘 보이지 않자 배낭도 뒤집어깝니다.
툭툭 쏟아진 물건들 사이를 헤집어내자 곧
작은 뼈로 깎인 호루라기가 당신의 손에 들어오네요.

안 하는 것보단 낫겠지. (숨을 최대한 크게 들이마시고 호루라기를 분다)
당신은 차가운 손을 벌벌 떨며 작은 뼈 호루라기를 입술에 가져다 댑니다.
소한이 구조대도 없는데 조난 상황은 왜 걱정하냐는 말에
억지를 부려 챙겼던 물건입니다.
지금 당신에게 남은 유일한 동아줄이기도 하죠.
피이이이이익—!!!
당신이 폐부의 공기를 쥐어짜 내 불어넣자,
작고 초라해 보이던 호루라기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날카롭고 높은 고음을 내뱉습니다.
그 소리는 둔탁한 눈보라의 벽을 뚫고,
얼어붙은 대기 속을 화살처럼 날카롭게 가릅니다.
주변의 정적을 무참히 깨부수는 그 소리는,
길을 잃은 누군가에게는 유일한 등대이자
굶주린 포식자들에게는 만찬의 종소리 같은 것이겠지요.
당신은 호루라기를 입에서 떼고, 심장이 터질 듯한 기세로 주변을 살핍니다.
하지만, 바람 소리뿐입니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그 이상의 소리를 들을 수 없네요.

눈 속에 파묻힌 거면 어쩌지?
온통 눈밭인데 어딜 파야 하는 거냐고...
가면서 파이프로 땅을 찔러보기라도 해야 하나...
(주변에 소한의 물건으로 보이는 게 있는지 살펴본다)

| 기준치: | 55/27/11 |
| 굴림: | 91 |
| 판정결과: | 실패 |
눈을 부릅뜨고 하얀 장막 속을 훑어보지만,
지독한 운명은 당신의 편이 아닙니다.
토네이도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공포스러울 정도로 매끈하고 깨끗합니다.
소한의 손목 끈 하나, 그가 흘린 물건 하나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사방이 그저 끝없는 백색의 무덤일 뿐입니다.
너무 집중해서 눈밭을 노려본 탓인지, 이제는
하얀 눈 위에 검은 잔상들이 떠다니기 시작합니다.
무엇이 소한의 흔적이고 무엇이 그저 흙먼지인지 분간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당신이 망설이며 배회하는 1분 1초마다
새로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은 소한이 남겼을지도 모를
마지막 단서까지도 지워내버리는 중이네요.
작은 희망까지도 바스러지는 것 같습니다.
소한은 눈 속에 묻혔는지 바람에 날아갔는지 알 수 없고,
생존에 필요한 물품도 없고,
심지어 당장 쉬어갈 곳도 없습니다.

'너무 멀리까지 가면 오히려 못 찾을 확률만 높아질테니, 주변을 빙 둘러보자.' (호루라기를 한 번 불고, 소한의 이름을 부르기를 반복하며 주변을 배회한다) 소한...! 소한-!
그렇게 얼마나 주변을 배회했을까요.
한참이나 찬기에 노출된 얼굴 근육이 뻣뻣하게 얼어굳고
이가 딱딱 부딪힐 만큼 추위가 몰려옵니다.
구조물도 없는 허허벌판에 너무 오래 선 채로 찬 바람을 맞았습니다.
...설마 정말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요.
생명에 지장이 갈 정도로 크게 다쳤다든가.
아니면 눈 속에 파묻혀 질식사했다든가.
홀로 거칠게 살아온 것을 생각하면 그의 생사를 걱정할 일이 없을 텐데도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은 초조해집니다.

(도리질치며 애써 부정한다) 아냐, 혼자서도 잘만 살아남았으니까 이번에도 살아있을 거야. 분명히 그럴 거라고...
(파르르 떨며) 흐으... 너무 추워...
이 정도 날씨면 소한은 분명 더 추울텐데...
발견하기도 전에 동사하는 거 아니야?
하씨... 쓸데없는 생각 그만하자.

하얗게 질린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오는 외침은
차가운 눈가루에 섞여 허공으로 흩어집니다.
발가락 끝의 감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고,
허벅지는 천근만근 무거워 마치 진흙탕 속을 걷는 기분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멈출 수 없습니다.
지금 멈추면, 저 하얀 장막이 소한을 영원히 삼켜버릴 것만 같으니까요.
그저 살피고, 호루라기를 불고, 이름을 부르는 것만 반복하며
얼마나 더 걸었을까요.
시야를 가리는 눈보라 사이로, 평소와 다른 이질적인 형태가 눈에 들어옵니다.
자연스러운 설산의 곡선이 아닌, 인위적이고 묵직한 사각형의 실루엣.
소한이 늘 등에 매고 다니던 가죽 배낭입니다.

(배낭이 있는 곳으로 서둘러서 발걸음을 옮긴다)
당신은 필사적으로 눈을 헤치며 다가갑니다.
반쯤 눈에 파묻힌 소한의 배낭은, 붉은색 가죽 끈이 밖으로 삐져나와 있고
겉면은 토네이도의 위력에 긁혀 넝마가 되어 있습니다.
배낭의 어깨끈 하나가 무언가에 쓸린 듯 끊어져 있습니다.
주인과 강제로 분리된 듯한 모습에 속이 싸해집니다.
자연 재앙이라고는 생각했지만, 그 위력 앞에서 찢긴 가죽을 보니
가까스로 살아있대도 소한의 몸이 성치 않을 것만 같습니다.

(하늘을 보며) '슬슬 해가 기울고 있어. 만약 밤이 될 때까지 소한을 못 찾으면 분명...'
(입을 꾹 다물고는 소한의 배낭을 챙기고 목에 피맛이 느껴질 정도로 크게 이름을 부른다) 소한...! '배낭이 여기 있으니 분명 근처에 있을 거야.'

| 기준치: | 80/40/16 |
| 굴림: | 93 |
| 판정결과: | 실패 |
마음은 급한데, 발을 뗄 때마다 눈은 무릎까지 차오르고
몸 상태는 점점 한계에 다다르기 시작합니다.
목이 터져라 부르는 외침도 본인의 귓가에서만 웅웅거리고
거친 눈보라 탓에 그마저도 금세 묻혀 사라집니다.
너무 크게 소리를 지른 탓일까요, 아니면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일까요.
귀 안쪽에서 '삐이-' 하는 소음이 들리기 시작하며 주변의 모든 음성을 차단해 버립니다.
해는 점차로 기울며 세상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합니다.
시야가 좁아집니다.
마지막 희망조차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려는 순간,

| 기준치: | 80/40/16 |
| 굴림: | 8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소름으로 부르르 떨려오는 뒷목 그 언저리에서
귀가 쫑긋 섭니다.
모든 감각이 마비되고, 세상이 백색 소음으로만 가득 차던 그 절망적인 찰나.
당신의 고막을 뚫고 들어온 것은 바람 소리도, 환청도 아니었습니다.
탁, 타드득— 탁.
지극히 인위적이고, 지극히 규칙적인 암석의 마찰음.
살아있는 존재가 내는 소리입니다.

당신은 바람결에 쉽게 묻혀버릴 외침을 내지르며
소리가 흘러드는 곳으로 다가갑니다.
저녁 노을이 물들어가는 하늘의,
어스름한 보랏빛 그림자가 드리운 절벽 틈새.
아슬아슬하게 깎아지른 절벽 끝, 눈 쌓인 바위 틈새로 고개를 내밀자
겨우 발끝 일부만 디딜 수 있는 암벽 틈새에
소한이 한쪽 팔로 어떻게든 암벽을 붙잡고 붙어 있습니다.
몰골이 처참하기 그지없습니다.
단정하고 꼿꼿하던 머리카락은 눈과 피에 엉겨 산발이 되었고,
날카롭게 베인 뺨에서는 붉은 피가 얼음장 같은 공기를 만나
검붉고 딱딱하게 굳어 있군요.

| 기준치: | 53/26/10 |
| 굴림: | 25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소한...!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에 잠시 안도하지만 누가 봐도 아슬아슬한 상황을 확인한다. 무작정 팔을 뻗으며) 잡을 수 있겠어?






이미 한 번 끊어졌었는데 괜찮을까?


근처에 있던 네 배낭을 가져왔어. 도움이 될만한 게 있을까?

| 기준치: | 60/30/12 |
| 굴림: | 50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잠시 생각했다가) 등반용 갈고리랑 카라비너. 가장 가장 안쪽에 있을 거야. 카라비너 고리 안쪽을 밧줄로 단단히 묶어서 이쪽으로 내려주면 내가 잡을 수 있어.

정신줄 놓지 말고 기다려!


(네가 정신을 잃을까봐 계속 큰소리로 말을 건다.) 소한! 정신 차려!
(서둘러 갈고리를 내려주며) 이거 잡아!

너 혹시 몇 kg이야.





다 갖고 있어.


이 상황에선 못 해도 해야지...!
넌 꽉 버티고 있어! (계속해서 쫑알쫑알 말을 걸며 소한의 말대로 밧줄을 허리에 감고 배낭을 앞뒤로 둘러맨다.) 네 말대로 했어!


하나, 둘-! (발등부분에 힘을 주며 온몸을 뒤로 눕는다)

| 기준치: | 55/27/11 |
| 굴림: | 78, 61, 80 |
| +2: | 실패 |
| +1: | 실패 |
| 0: | 실패 |
| -1: | 실패 |
| -2: | 실패 |
당신은 뒤로 힘껏 누우며 체중과 근력으로
소한을 어떻게든 끌어올립니다.
그러나 다리의 버티는 힘이 부족했던 탓일까요.
당신의 발끝이 옅게 언 눈 위를 스치며
몸이 속절없이 앞쪽으로 끌려갑니다.
엉덩방아를 찧은 엉덩이가 얼얼해집니다.

'시간이 없어! 빨리 구해야 해!' (쓰라린 엉덩이를 문지를 틈도 없이 다시 벌떡 일어나 몸을 비틀어서라도 더 힘을 주어 눕는다)
밧줄이 팽팽하게 당겨진 허리 위로
까칠한 쓰라림이 옅게 스칩니다.

| 기준치: | 55/27/11 |
| 굴림: | 34, 90, 69 |
| +2: | 보통 성공 |
| +1: | 보통 성공 |
| 0: | 보통 성공 |
| -1: | 실패 |
| -2: | 실패 |
당신은 어릴 때 젖먹던 힘까지 쏟아부어
소한의 몸에 매달린 밧줄을 힘껏 끌어올립니다.
과하게 힘이 들어가고 조여든 허리와 등허리에서
근육이 경직되듯이 빳빳해지지만
생사의 갈림길 앞에서는 미약한 통증입니다.
아래에서 작게 소한이 신음을 토하며
갈고리를 절벽 끝에 찍고 올라옵니다.
피 범벅인 상태로 힘을 써서인지 상태가 그리 좋지 않습니다.
산 채로 움직이는 것보다 시체가 움직이는 것에
더 가까운 모양샙니다.




(숨을 돌리고는 네 양 뺨 위에 손을 올리고는 여기저기 살핀다) 나는 신경쓰지 말고, 너는? 괜찮은 거야? 또 다친 데 있어?




살아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네 어깨를 붙잡고 바짝 붙어있던 너를 떼낸다) 일단 굴 파고 소독부터 하자.


이러고 있다가는 살린 보람이 없어질까봐 걱정된다고;


보랏빛 밤이 내려앉는 설원 위로,
삽이 눈을 가르는 서걱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당신은 필사적으로 눈을 파헤치며 뒤를 돌아봅니다.
소한이 다친 머리를 부여잡고 멍하니 당신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탓에
몸을 움직이고 있는데도 마음이 더 급해집니다.
탁탁, 열심히 눈을 걷어내고 텐트를 내부에 펼친 뒤
모포를 깔고 소한을 냅다 밀어넣으면
소한은 딱히 반항하는 기색 없이 순순히 안으로 들어가더니
빨리 오라는 듯 팔을 양쪽으로 벌립니다.
...응석꾸러기가 다 됐네요.
당신이 조심스럽게 모포를 밀어넣고 응급처치 용품을 챙긴 뒤
조심스럽게 내부로 들어오면 따뜻한 홍심석의 열기가 번지며
추위는 조금씩 가시기 시작합니다.

| 기준치: | 30/15/6 |
| 굴림: | 20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당신은 배낭 가장 안쪽, 홍심석에 맞닿아 있어 따뜻하게 데워져 있던 물을
빈 가제 천에 쏟아 적시고는
엉망진창으로 피가 굳은 소한의 얼굴을 먼저 문지릅니다.
...몰골을 봤을 때도 처참하다 싶었지만,
생각보다 피를 많이 흘렸던 모양인지
천에 묻어나오는 피가 쉼 없습니다.
가까스로 상처를 닦아주고 마른 약초를 물에 빻아 빈 천에 적시고
얼굴에 올린 채 테이프로 고정하자
소한이 눈을 찡그리며 슬금슬금 안겨듭니다.





...나 한참 찾았어?

... 네가 살아있을 거라는 데에 걸고 싶기도 했고.


왜 이렇게 딱 붙는 거야? 괜히 안 하던 짓을 하니까 이상하잖아.

...
난 좋은데. (네 허리를 푹 끌어안으며 네 가슴팍에 얼굴을 좌우로 비빈다)


(심장이 콩닥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빈틈없이 붙은 몸이 따뜻해져 올 수록 가슴팍 언저리가 뭉근하게 녹은 초콜릿처럼 흐물거린다. 한치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네게 더욱 꽉 안기고 싶어 몸을 비트는 자신이 제가 알던 제 모습 같지가 않지만... 이상하게 너랑 이렇게 있는 건 너무도 평온하고, 따뜻하고, 의지가 되고, 행복하고...)
... (그렇게 한참을 조용히 침묵하다가, 가만히 고개를 들어 너를 바라본다) 라비. 나 그대로 죽었으면 어땠을 것 같아?

방금까지 죽기 직전이었던 사람이 말하니까 진짜로 얼마 안 남은 것 같다고.
'아까 피를 너무 많이 흘렸나? 아니면 상처가 감염된 건가?' 너 진짜 죽는 거 아니지? 어?

... (꼭 안기며) ...내가 너 두고 어떻게 죽냐?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죽어라 뛰었더니만 줄이 끊어져 있을 줄 누가 알았겠냐고...


(소한과 몸이 얽히는 것이, 그의 입술이 닿는 것이 이상하리만큼 거부감이 없어 혼란스럽다. 친한 친구라 해도 이렇게까지 가까울 필요가 있나? 이건 마치...) 너...




갑자기 엄청 어리광을 부리질 않나, 성격도 엄청 부드러워진 것 같고.
(슬쩍) 너 혹시... 머리를 세게 다친 거야?

내가 이러는 거 싫어?





아까도 뭔진 모르겠지만 삐졌던 것 같고...!

그래, 말 잘했다. 내가 왜 삐졌던 것 같은데.




난 독거 노인 확정이라며.

나도 똑같이 독거 노인으로 살으라고?!

(뻔뻔) 그래.




이참에 둘 다 고독사만 면하는 걸 목표로 하자.

너 진짜 머리 아프냐?



축하한다, 혼자는 안 살겠네.







둘 다 별로라고!








거짓말쟁이! (얼굴이 가까워지는 만큼 목이 뻣뻣하게 굳으며 고개를 뒤로 물린다) 왜, 왜 이렇게 가까이 오는 거야?






ㄴ, 너 설마... 아니지?
첫키스를 뺏어서 마누라도 못 만들게 하려는 그런 작전 아니지?!




그냥... 뽀뽀를 좀 길게 하는 거 아니야?






손 잡고 자면 생기지 않는 것도 안다고!


애, 무는 그러니까... 그...
"열심히" 뽀뽀하는 거...?

그래. 그럼 섹스는?

아기를 만들기 위한...
아이씨! 왜 내가 너한테 이걸 설명해야 하는 건데?!

넌 내가 방해 안 해도 결혼 못하겠다.
연애도.

저리 가!
떨어져!

그리고 너 말은 그렇게 해도 내일 아침도 나 끌어안고 일어날 거잖아.
하루도 안 껴안은 날이 없구만



몰라! 안 죽는다며. 응급처치도 다 해줬구만!






씨... 맨날 사람 놀리고, 장난치고...









내가 독거 노인 싫다고 아무한테나 같이 지내자고 할 사람으로 보여?





그러는 너는 잘 알아?
키스나 뭐... 거시기한 것들.
너도 누구 좋아해본 적도, 연애 경험도 없다며!

기본적인 행위 전개나 구성은 알아.



그걸 하는 걸 봤어?

(어이 X) 엄연히 정식 교육이거든?

ㅁ, 몰라도 뭐, 상대가 알려주면 그만이지!
둘 다 모르지만 않으면 되잖아!




...
... (무슨 뜻인지 뒤늦게 파악하고는 이를 드러낸다) 너-!
자꾸 저주할래?

사실만 얘기한 건데.


아서라.






내가 아무리 실전 경험이 없대도 백짓장인 너만 할까.




(손가락으로 네 검지와 중지 마디를 가볍게 쓸고 비빈다) 표현하자면 이렇게.









그리고 잘 몰라서 그렇지, 하다 보면 이 정도로 기운 빠지지는 않을 거라고!


아, 몰라. 고자만 아니면 어떻게든 되겠지!
















(완전히 몸에 힘을 빼고 눈을 감는다) 잘래...
좀 자야겠어.
피곤해.

내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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