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파랑 아람 마을

  






소한의 고향이자 한때 해안의 활기를 책임졌던 마을이자 중소도시.
그곳의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싸늘하게 식은 철가루 냄새와
소금기 섞인 찬바람이 두 사람을 맞이합니다.
깊은 계곡을 따라 내려온 강물이 바다와 만나는 하류,
한때는 거대한 증기기관차들이 쉼 없이 연기를 내뿜으며 달리던 철길이
이제는 하얀 눈 아래 파묻혀 있고,
해안가에는 날갯짓을 멈춘 채 그대로 얼어붙은 갈매기들이
기괴하게 쓰러져 있습니다.
곳곳에는 증기기관을 제조하던 거대한 공장들의 철골 구조물이
앙상한 갈비뼈처럼 솟아 있습니다.
무너진 지붕 사이로 고드름이 고드름이 톱니바퀴처럼 엉켜 있고
수리를 기다리다 방치된 거대한 증기 기관의 잔해들이
마치 살이 다 갉아먹힌 고래의 뼈처럼 이곳저곳 늘어서 있습니다.
소한:... (처참한 고향의 모습을 보고 다시금 말이 없어진다)
라비헨:살면서 이만큼 거대한 마을은 처음 봐.
소한:마을이랑 중소도시 규모에 걸쳐 있어서. 아버님이 공장을 설립하시고 규모가 커지면서, 일자리가 필요한 사람들 유입이 좀 있었대.
(저 멀리 굳어버린 해안을 바라보며) ...파도는 아직도 얼어 있네.
라비헨:그럼 너네 아버지가 사실상 여기 대장...? '뭐라 할지 모르겠다.' 이었던 거지?
(계속 눈을 크게 뜨고 여기저기 두리번거린다) 바다는 이렇게 생겼구나... 신기한 것도 엄청 많다...
소한:...원래 전혀 이렇게 안 생겼어. 바보야.
원래는 파도가 일렁이면서 속이 시원해지는 소리가 났다고.
온 김에, 공장에도 들리자. 급하게 탈출하느라 하나만 챙겼지만, 홍심석이 몇 개 더 남아 있을 거야.
라비헨:(삐죽) 바보라니- 바다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 내가 어떻게 알겠어?
너네 집 공장을 또 털자는 얘기야?
소한:(턴다는 말은 좀 이상하지만) 그렇지.
라비헨:그래도 괜찮아?
소한:안 될 거 있어?
라비헨:지금이야 공장 가동을 안 하고 있다지만... 썩 기분이 좋을 것 같지 않아서.
소한:... 좋진 않지. 그래도 필요하잖아.
(죽은 어머니 아버지도 아직 거기 그대로 계실지 모르고... 잠시 아랫입술을 물어다 떼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너를 슬며시 바라본다) ...방랑자들이 드나들었을 테니 몇 개나 남아있을진 모르겠지만, 하나라도 더 얻으면 여정이 쉬워질 거야.
라비헨:'방랑자들이 털어간 것도 기분 나쁠 것 같은데.' (한때 생기가 돌던 고향을 처참한 상태로 마주한다는 게 어떤 기분일지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소한의 마음을 가늠하기 어려워서 더 묻지 않기로 한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그래.
소한:...일단 집으로 갈까. 무기부터 챙겨야지.
건물이 무너졌을지 아닐지는 모르겠네. 내가 떠날 땐 워낙 아수라장이었거든.
라비헨:정말 괜찮겠어? (보기 힘든 걸 다시 마주할지도 모른다는 말조차 입으로 내뱉기 어려워 말을 아낀다) 나 혼자 둘러보고 올까?
소한:(신경을 써주는 것 같긴 한데 그게 오히려 불편하다) ...내가 언제 너 혼자 보낸 적이나 있냐. 괜찮아, 어디나 다 이런 모양새잖아.
라비헨:그렇긴 하지...
그럼 가보자.
소한:(어쩐지 쉽게 나서질 못하고 손을 조금 떨다가) ...그래.
두 사람은 녹슬어버린 철골 구조물 사이를 지나 주택가로 향합니다.
지붕이 깨진 주택들은 이미 주인을 잃은 지 오래지만,
집집마다 달린 작은 증기 배관들은
과거 이 도시가 얼마나 풍요로운 열기를 누렸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람이 빈 파이프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며
마치 도시가 흐느끼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를 냅니다.
빙식체가 없어서 다행이지만, 꼭 누군가 보고 있는 기분입니다.
당신이 뒤따르는 내내 소한은 무표정인 듯도, 쓸쓸한 듯도 한 얼굴로
익숙하게 기억에 남아있던 길을 더듬는 듯 걷다가도
이따금 특별한 건물 여러 곳에 눈길이 쏠리는지 멈춰섭니다.
아무리 무던한 그라도 이런 처참한 고향 풍경 앞에서는
그저 평범한 한 사람에 지나지 않겠죠.
당신은 소한을 따라 도시 주택가의 외곽까지 건너갑니다.
곧, 숲과 인접한 작은 석조 건물의 모습이 보입니다.
넓은 대지 위에 세워진 2층 규모의, 아담하면서도 너른 석조 주택.
본채 옆으로는 두 개의 별관이 날개처럼 붙어 있고,
그중 하나인 창고 문 사이로 녹슨 덫과 가죽 부스러기들이 보입니다.
정원 한가운데의 작은 연못은 이제 바닥까지 투명하게 얼어붙어,
마치 거대한 수정 구슬처럼 정원의 정적을 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간의 풍랑을 맞아서인지 지붕 한 쪽은 무너져 쓰러져 있고,
그 파편들이 정원 구석구석에 틈틈히 널려 있네요.
소한:(부연 입김을 공중에 뱉어내며 눈을 깜빡이다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작게 입을 다신다) ...잠시 쉬어갈 순 있겠네. 들어가서 잠시 앉자.
라비헨:'진짜로 어마무시하게 잘 살았었잖아?' 그래...
소한:... 무슨 생각해.
라비헨:... 네가 괜찮은지 신경쓰여.
소한:안 괜찮아도 뭐... 별 수 있나. (손끝이 잘게 떨려 가죽장갑을 벗고 제 손바닥을 잠시 내려다본다)
라비헨:(그런 네 손을 같이 보다가 작게 숨을 내쉬고는 그 위에 제 손을 올려준다) ... 챙길 거 다 챙기고 나면, 같이 기도라도 할까.
소한:... (가만히 제 손 위에 얹어지는 네 손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접어 가볍게 주무른다) ...무슨 기도?
라비헨:어... 다들 좋은 곳으로 갔기를 기도하는 걸로...? '뭐라도 위로하려고 꺼낸 말인데, 평소에 기도 같은 건 안 해봐서 이게 맞나 싶네...'
소한:... (내가 저 세상으로 보냈는데. 기도한다고 무언가 달라질 것 같진 않고... 까지 생각하다가 너를 잠시 바라본다. 얘가 기도해주면... 괜찮으려나) ...그래. 그러자.
라비헨:이 마을에서 난 이방인이지만, 그래도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늘면 좋지 않겠어?
(어색하게 턱을 긁적이며) 파트너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기도 하잖아.
소한:...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네 손을 마디마디 매만지다가, 이윽고 작게 피식 웃어버린다) ...좋은 파트너네.
라비헨:'아이씨... 괜한 말을 했나? 평소에 안 하던 짓 하니까 민망해 죽겠네...'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소한:그래. 춥다.
당신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소한을 따라
어정쩡하게 열려 있는 현관을 지나 거실로 들어섭니다.
실내에 들어서자마자 2층으로 가는 계단이 놓여 있고,
그 옆으로 널찍하게 자리한 응접실 겸 거실이 있네요.
안으로 들어가 주변을 살펴보면
먼지로 인해 모든 것들은 채도를 뺏긴 채 부옇게 물들어 있습니다.
가장 먼저 벽면을 장식한 짐승들의 박제가 위압감을 주고,
소한의 아버지가 사용했을 법한 구식 수렵용 총기들이 훈장처럼 걸려 있습니다.
반면, 그 살벌한 장식 아래에는 우아한 곡선의 상아 피아노가 덮개가 열린 채
연주해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고,
선반 위에는 매끄러운 유약을 바른 백자들이 창백한 달빛을 머금고 있습니다.
고요하고도 야성적인 예술적 취향이 기묘하게 공존하는 공간이네요.
한쪽 벽면을 차지한 가죽 소파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구석에 찢긴 곳 없이 푹신하게 놓여 있고
소파가 놓인 그 위, 가장 잘 보이는 벽면 중앙에
묵직한 오크나무 틀에 담긴 유화가 반쯤 덜렁이고 있습니다
가족 모습이 담긴 초상화인가봅니다.
초상화 속에는 젊고 강인해 보이는 소한의 아버지와,
우아하고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어머니,
그리고 그들 사이에 선 어린 시절의 소한이 그려져 있네요.
어린 소한은 지금의 무뚝뚝한 표정과는 달리,
아버지의 어깨에 기대어 살포시 웃고 있습니다.
지붕 깨진 틈으로 들어온 눈보라가 초상화 틀 위에 하얗게 쌓여 있어서일까요,
빛바랜 캔버스 속 미소들이 더욱 애잔하게 다가옵니다.
소한:(부러 구경하지 않으려하며, 거실에 놓인 서랍장부터 뒤적인다) ...
라비헨:... '얼굴은 어머님을 많이 닮았네. 성격은... 아버님 영향이 큰 건가?'
소한:(서랍을 천천히 닫으며 생각에 잠긴다. 분명 여기 뒀는데... 먼지 때문에 보이지가 않네.)
라비헨:(피아노 건반 위를 무심코 눌러본다) '이건 소한의 취미였을까, 어머님 취미였을까?'
소한:(뒤늦게 피아노 건반 눌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며) ...그것도 신기해?
라비헨:(흠칫- 나쁜 짓을 몰래 하다 들킨 것마냥 작게 놀란다. 아닌 척 시선을 피하며) 아니, 뭐...
수색중이었어.
소한:...그냥 평범한 가정집이야. 수색할 거 따로 없어.
음식이나 비품은 내가 어디 있는지 아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떠올려봐.
라비헨:어... 새 옷...?
소한:창고 열면 나 어릴 때 입던 옷은 많을 거야. 또?
라비헨:어릴 때라니...
흥...
소한:네 키랑 덩치가 작은 게 내 탓인가. 나 16쯤에 네 키였을걸.
라비헨:그-러-니-까- 내가 작은 게 아니라 네가 엄청나게 큰 거라고 전부터 얘기했거든?
소한:그것도 맞지.
라비헨:난 평균이라고, 평균!
소한:그래도 네가 상대적으로 작잖아.
라비헨:...
소한:쬐끄매가지고.
라비헨:크, 큰 게 꼭 좋은 건 아니거든?!
그리고 안 쬐끄매!
소한:쬐끄맣거든? 그러니까 귀여워 보이는 거지.
라비헨:씨... 기껏 생각해줬더니만 열받게 하기나 하고...
소한:어쩌겠어. 이미 다 컸는데. 받아들여. (툭)
라비헨:아직 더 클 수 있어!
소한:그래. 화이팅. (안 믿음)
라비헨:이게...!
(슬쩍) 넌 그럼 뭘 먹고 이렇게 컸는데?! 어?!
소한:글쎄. 고기랑 생선인가.
라비헨:...
지금도 질리도록 먹고 있는 거잖아.
소한:그렇지. 유전이겠지.
라비헨:아냐. 더 클 수 있어.
(손가락질하며) 너... 진짜 그 키에서 딱 기다려.
난 아직 22살이니까 가망이 있거든?
소한:(건성) 그래. 죽기 전에나 따라와.
라비헨:짜증나, 너!
소한:매번 짜증난대.
라비헨:자꾸 내 키 무시하잖아!
소한:딱히 무시한 적 없는데.
라비헨:작다고...! 막! 쬐끄맣다고 했잖아!
소한:사실이니까.
라비헨:나중엔 사실이 아니게 될 거라니까?!
아니, 그리고 안 작다고!
소한:그래. 빨리 커. (마저 다른 서랍장을 뒤지다가, 찾던 것을 발견한다. 열쇠 꾸러미다.)
라비헨:이익...!!! '짜증나, 짜증나!! 저 자식 머리털을 다 뽑아버리고 싶어!!'
소한:(너를 뒤돌아보며 열쇠 꾸러미를 달랑거리며 보여준다) 궁금해서 묻는 건데, 오늘 여기서 잘 거야?
라비헨:...? 자야지?
아, 네가 힘들면 다른 집에서 자도 상관없어.
소한:상관없어. (잠시 집안의 내부 파이프를 둘러보다가, 네게 손을 내민다) 홍심석.
라비헨:? 또 뭘 하려고. (홍심석을 건네준다)
소한은 홍심석을 건네받자마자 주방 구석에 위치한
육중한 주물 보일러 앞으로 향합니다.
거실과 2층 침실로 이어지는 구리 배관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시작점입니다.
소한은 어디선가 찾은 황동 렌치를 배관 밸브에 끼우고
온 힘을 다해 돌립니다.
'끼이익—!'
비명을 지르던 밸브가 열리자, 그는 미리 눈을 녹여 준비해둔 물을
보일러 탱크 안으로 콸콸 들이붓습니다.
그리고는 보일러 하단의 연소실을 열고,
그 정중앙에 붉게 빛나는 홍심석을 안착시킵니다.
정교한 급수 밸브가 소한의 손을 따라 몇 바퀴 돌아가더니
차가운 물방울이 뜨거운 돌 표면 위로 '치익—' 소리를 내며 한 방울씩 떨어집니다.
순간적으로 발생한 고압의 증기가 텅 빈 배관을 타고
실내 모든 파이프를 격렬하게 울립니다.
그리고는 처음에는 기침하듯 털털거리던 파이프들이 이내
'웅—' 하는 낮은 진동음을 내며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고동치기 시작하네요.
그와 동시에, 구리 배관에서 따뜻한 김이 오르기 시작합니다.
싸늘하던 실내인지라 그 김이 무척 뽀얗게 보입니다.
소한:(천천히 연소실을 닫으며) 증기 보일러 틀었어. 밤새 따뜻할 거야.
라비헨:증기 보일러...?
어떻게 한 거야?
소한:(끄덕)
뭐긴 뭐야. 증기 기관에 들어가는 거랑 똑같은 식이지.
물 한 방울씩 떨어뜨려서 가열시키고, 그 증기를 파이프 내부에 돌게 하는 방식이야.
라비헨:저 돌은 대체 정체가 뭐야?;;; 돌덩이 하나로 그런 게 가능하다고?
무슨 판타지 세계관에 온 것 같네.
아, 괴물이 있는 마당에 그렇게까지 이상한 건 아닌가...
소한:...자각이 너무 느린 거 아니야?
라비헨:그치만 너네 집부터 시작해서 이 마을은 신기한 것 투성이인걸.
소한:네가 너무 깡촌에서 살았던 거라고...
라비헨:깡촌 무시해?
때묻지 않게 순수한 거라고 해줄래?
소한:...
순진하다고는 해줄게.
라비헨:... 네가 말하니까 안 좋은 뜻 같아.
소한:어쨌든 사전적 의미는 같을 텐데.
라비헨:네 입에서 나오니까 바보라는 말을 순화시킨 것 같아.
소한:틀리진 않지. 용케 알아챘네. 눈치가 빨라졌어.
라비헨:너어 -!!! (씩씩거리며) 넌 여기서 자! 난 다른 데서 잘 거니까!
소한:(어이 X) 당연히 거실에서는 안 자지. 같이 가.
라비헨:싫어!
소한:뭐만 하면 싫대. (쪼르르) 어디로 가는데.
라비헨:따라오지 마! (쿵-쿵- 소리를 내며 2층으로 올라간다)
소한:(쪼르르 따라간다)
라비헨:(으르릉-) 따라오지 말라니까?
소한:여기 우리 집이거든? (어이 X)
라비헨:...
그럼 나 집 나갈래.
소한:심통 부리기는.
라비헨:집주인이 손님한테 막말해. 마음에 안 들어.
소한:그럼 어떻게 해야 마음에 드는데.
라비헨:...
하아... (손가락으로 숫자를 표현하며) 첫째, 난 쬐끄만 게 아니야.
둘째, 난 바보도 아니야!
취소해!
소한:알았어, 취소할게.
사실 진짜 바보라고도 진짜 작다고도 생각 안 했어.
라비헨:(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주춤거린다) 뭐,야...? 갑자기 왜 이렇게 순순해?
구라 치지 마.
소한:기준을 상대적 기준에서 절대적 기준으로 바꾼 것 뿐이야.
라비헨:(뭔 소린지 못 알아들음) 상대적...에서 절대적...?
소한:(...평범한 사람들보다 똑똑하긴 하지만 여전히 바보로군) 그래. 그러니까 그만 화내.
라비헨:'못 알아들었다고 하면 분명히 또 바보라고 놀릴 게 뻔해.' (알아들은 척하고 고개를 휙 돌린다) 그래...! 특별히 착한 내가 봐줄게!
소한:그래. 식사는 뭐 먹을래. 잠부터 잘 거야?
라비헨:아직 배가 고프진 않아.
아, 나 필요한 거 생각났어.
소한:뭔데?
라비헨:전에 그... 그거 있잖아. (이름을 안 말해줘서 모른다)
네가 나한테 줬던 까만 음료 말야.
소한:아. 코코아.
라비헨:그거 여기도 있어?
소한:있을걸. 누가 털어가지만 않았다면.
의외네, 술을 더 달라고 할 줄 알았더니.
라비헨:흥- 남의 집에서 술타령이나 할 놈으로 보여?
나도 눈치는 있거든?
소한:응.
라비헨:야!
소한:그럼 안 마실 거야?
라비헨:...
... ...
소한:참고로 우리 집엔 술이 좀 많거든.
라비헨:(슬-쩍) 뭐... 집주인이 같이 마시자면야...
소한:도둑 들었어도 다 못 털어갔을걸.
...나도?
라비헨:난 손님인데 남의 집에 와서 혼자 술 털어마시는 건 웃기잖아.
예의도 아니고.
소한:나쁜 제안은 아니지만, 나 부상중인 거 기억하지?
라비헨:...
(딱히 아쉽진 않고 기회로 보며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한다) 그러면...! 흠흠... 어쩔 수 없네!
(팔짱을 낀 채 어깨를 으쓱으쓱거린다) 내가 불쌍한 소한 대신 많이 마셔줘야지!
소한:보통은 이런 상황이면 안 마시겠다고 하지 않아? 주정뱅이.
라비헨:...
소한:술꾼.
라비헨:네가 유혹했잖아.
먼저 제안했잖아.
소한:맞지.
라비헨:원래 성의는 무시하는 거 아니랬어.
소한:그냥, 본인 입으로 말해놓고 마시겠다고 하는 게 웃겨서.
그래, 마시다가 죽지만 마라.
라비헨:네가 뺏을 거 다 알거든?
소한:당연하지.
라비헨:'쟤를 재운 다음에 몰래 마셔야 하나...' 안 죽을 거야. 걱정도 많아.
소한:(영 걱정되는데...) 그래. 믿는다.
라비헨:어쨌든! 마저 가자고. 2층으로.
소한:그래.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세 가족이 각자의 공간을
누렸을 넓은 복도가 나타납니다.
지붕이 무너진 탓인지 문틈새로 비치는 커다란 침실은 반쯤 잔해로
주저앉아 있고, 그나마 구석의 방은 멀쩡한 모양새네요.
복도 끝, 소한의 방은 조금 물건이 많기는 해도
적당히 깔끔한 모양새입니다.
창문 너머로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은백색의 설원과,
저 멀리 멈춰버린 공장 굴뚝들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책장은 책 대신 반쯤 전시대처럼 각종 모형 기차와 태엽 장치들이 늘어서 있네요.
책상 위에는 십자 드라이버와 일자 드라이버가 널려 있고,
무슨 용도인지 모를 설계도면도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차갑게 꽝꽝 얼어붙은 머핀이 접시 위에 놓여 있네요.
한 입 먹다 만 것입니다.
정말 이걸 그대로 두고 가야 할 정도로
급박했던 상황이었나보군요.
옷장은 사이가 활짝 열려 있고, 서랍장도 드문드문 그런 모양새입니다.
파이프를 타고 도는 열기가 슬며시 실내를 채우자
창문은 조금씩 물기가 맺히며 축축해지고 있습니다.
생활감 가득하면서도 급박했던 흔적을 보자, 기분이 무척이나 묘합니다.
소한:(반쯤 낯설고 반쯤 익숙한 곳을 걸어들어가며, 열린 서랍장을 하나씩 닫는다) 편히 앉아. 서 있지 말고.
라비헨:(네 말에 근처에 있는 침대에 앉아 두리번거린다) '기분 되게 묘하네. 친구 집 오면 이런 느낌인가?'
(침대가 얼마나 푹신한 건지 통통- 튀며) 침대 엄청 좋다. 이런 침대에서 잤던 거야?
소한:( 마음에 드나 보네...) 뭐, 그렇지.
창고에 이불이랑 예전 옷 있을 거야. 가져다줄 테니까 누워서 쉬든가 해.
라비헨:엇, 여기서는 챙길 거 없어?
소한:어차피 자고서 나갈 거라며. 내일 챙기지 뭐.
라비헨:그래. 다녀와.
소한이 방을 나서자, 삐걱거리는 문소리와 함께
혹한의 겨울을 잠시 잊게하는 열기만 방 안에 감돕니다.
증기열에 머핀 표면의 성에가 녹아내려 눈물처럼 뚝뚝 떨어지는 모습이
멀찍이 보이며 가슴 한구석이 어쩐지 묘해지네요.
라비헨:(소한이 나가는 걸 확인하고는 털썩- 상체를 편하게 뒤로 눕는다.) 친구 집에서 자기로 하면 이런 기분이려나...
... (멍 때리고 천장을 바라보며 팔을 양옆으로 뻗은 채 위아래로 휘적휘적한다.) 여긴 시트도 엄청 부드럽네... 부자들은 다 이런 곳에서 자는구나.
귀여워
당신은 침대의 푹신함에 몸을 맡깁니다.
그동안의 노숙 동안 딱딱한 얼음 바닥과 한기에 절여졌던 몸이
비로소 주인을 만난 가구처럼 편안하게 가라앉습니다.
방 안은 이제 제법 훈훈합니다.
당신의 코끝에는 오래된 종이 냄새와
소한의 몸에서 가끔씩 풍기던 옅은 바닷소금 냄새,
그리고 보일러가 돌아가며 내뿜는 쇠 냄새가 섞여 들어옵니다.
슬슬 더워지네요.
라비헨:으- 더워... 슬슬 옷은 벗어야겠다. (누운 채 옷 한 겹만 남기고 나머지를 휙- 바닥에 아무렇게나 팽게친다)
휴- 이제 살 것 같네. 딱 좋다. (마저 팔을 휘적휘적거린다)
방 안의 열기가 후끈하게 달아오르자, 당신은 무거운 겉옷들을 허물 벗듯 벗어 던집니다.
얇은 옷차림으로 푹신한 침대에 몸을 파묻고 있자니,
이곳이 지독한 빙하기의 한복판이라는 사실조차 아득한 꿈처럼 느껴지네요.
그렇게 얼마나 그 푹신함과 따뜻함에 취해 있었을까요,
방문이 열리며 소한이 양팔 가득 무언가를 안고 들어옵니다.
차가운 바깥 공기를 묻혀온 그가 방 안의 후끈한 열기와 당신의 가벼운 옷차림을 마주하자,
입구에서 잠시 굳어버립니다.
그의 품에는 창고 깊숙한 곳에서 방금 꺼내온 듯한 두툼한 거위털 이불과
보들보들한 양모 담요, 그리고 보기만 해도 포근해 보이는 캐시미어 스웨터가 들려 있네요.
소한:(가져온 옷더미를 침대 빈 곳에 툭 내려놓으며) 이거. 세탁은 다 해둔 채로 보관해서 깨끗해. 스웨터는 좀 크겠지만, 잠옷 삼아 입어. 캐시미어라 따뜻할 거야.
라비헨:(갸웃) 캐시미어? 더울 것 같은데.
소한:... 추운 데 너무 있어서 체온 조절이 고장났어? 빙하기인데 이 정도는 입어야지. (;;)
라비헨:그치만 여기 엄청 따뜻하단 말야.
소한:... (기껏 겨울 옷으로 챙겨왔더니) 알았어. 그럼 이건 가방에 챙기고, (옷장을 열어 가벼운 면 티셔츠를 툭 꺼내 네게 던지려다가, 끊임없이 침대 시트 위에서 휘적거리는 너를 빤히 바라본다) ... 침대가 그렇게 좋아?
(기분 한 번 엄청 묘하네...)
라비헨:침대가 좋은 게 아니라 네 침대가 엄청 푹신하고 좋아.
(휘적휘적)
소한:네가 내 침대에서 그러고 있으니까 나 기분이 좀 이상한데.
라비헨:?
왜?
손님이 이러고 있어서?
소한:아니... 그런 기분은 아닌 것 같은데. (이 오묘하고도 긴장되는 느낌은 뭐지...?)
라비헨:뭐야, 그게?
(흘긋) 그거 입으라고?
소한:(끄덕...) 바지도 답답해 보이는데, 반바지라도 줄까.
라비헨:주면 나야 좋지.
소한:그래. (옷장 서랍을 뒤적거리다가 네게 다가가 툭 내민다)
이렇게 입고도 안 춥겠어?
라비헨:(네가 준 옷을 받으며) 땡큐.
난 열이 많잖아. 원래도 추운 지방에서 살았고.
(별 생각없이 툭) 여기서 갈아입는다?
소한:(어쩐지 입술이 바짝 마른다) ... 그래.
라비헨:(침대가 얼마나 좋은 건지 누운 채 허물 벗듯이 꾸물꾸물거리며 바지를 훌러덩 벗고, 반바지로 갈아입는다. 상의도 같은 방법으로 갈아입고는) 하- 이제 좀 편하네.
너도 갈아입지 그래?
소한:(얘 너무 경각심이 없... 아니 없는 게 당연한데. 왜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그래. (천천히 옷장 안을 뒤적거리다가, 두텁기 짝이 없는 방한복들을 벗어내고 검은색 티셔츠와 긴 면 바지를 걸쳐 입는다)
(다 입으니까 조금 쌀쌀한데... 얘는 괜찮은 건가. 슬쩍 바라보다가 옆에 나란히 눕는다) 너 진짜 추위 안 탄다.
라비헨:(농담) 이 정도는 내 고향에선 아주 따뜻한 날씨로 쳐.
넌 추워?
소한:조금. (이불을 끌어당겨 허리 아래를 덮는다)
라비헨:그럴 땐 아주 좋은 방법이 있지.
(사심을 담아 양모 담요를 먼저 올리고 그 위에 거위털 이불을 덮어준다) 따뜻한 걸 겹쳐서 덮으면 두 배로 따뜻해진다는 말씀이야.
소한:(갑자기 무슨 생각일까, 충동적으로 너를 끌어안으며) 이러면 세 배고?
라비헨:?? (무슨 상황인지 이게 어떤 의도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눈만 크게 뜬 채 깜빡깜빡거린다) 어... '이게 뭐지? 친구끼리 원래 이러기도 하나? 많이 추운 건가?'
그...렇지?
소한:...그래. 그럼 이러고 있자. (네 머리통을 당겨 품에 가두고는, 이불을 더 끌어당긴다)
라비헨:'보일러도 틀었는데 어째 야영할 때보다 더 붙는 것 같네. 그렇게 추운가?' (품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올려다본다) 오늘따라 추위 잘 타네, 너.
(갸웃) 상처 때문에 그런가?
소한:(품속에서 저를 빼꼼 올려다보는 시선에, 반사적으로 시선을 피해버린다. 이유 모르게 발끝이 이불을 살짝 문지르고, 더운 건지 뺨이 살짝 붉어지면서도 이상하게 떼어두기가 싫다. 이게 무슨 기분이지?)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다가 상처 때문이냐는 네 말에, 그대로 납득한다) ...그런가본데.
라비헨:상처가 벌어진 건가?
(한숨) 그러니까 내가 나을 때까진 최대한 조심하고 무리하지 말라고 했잖아...
(네 목을 빤히 살피고는) 상처가 벌어진 건 아닌 것 같은데...
소한:(슬쩍 네 허리에 손을 놓고 당기려다가, 불현듯 스치는 살갗에 맥박 뛰는 속도가 조금 빨라진다) ...내가 보기에도 그건 아닌 것 같고, 면역 떨어져서 그런 거 아닐까.
라비헨:확실히... 최근에 네가 무리하긴 했지. 열도 났었고, 그 상태에서 많이 걷기도 했고...
여기서 계속 요양할 수도 없는데... 어떻게 해야 면역을 회복할 수 있으려나?
넌 알아?
소한:(부정맥이라도 생긴 건가, 심장이 살짝 덜그럭거린다) ...따뜻하게 하면 비교적 금방 나을걸.
라비헨:그럼 밥 먹기 전까지 이러고 있어야겠네.
...?
(미간을 찌푸리며) 너 괜찮아?
소한:... 응. 갑자기 왜?
라비헨:심장 소리가 엄청 크게 들려.
다시 열 오른 거 아냐?
소한:...추운 곳에 있다가 따뜻해지니까 혈관 확장돼서 그렇겠지.
라비헨:그래? (단순-) 그렇구나.
소한:(물끄러미 시선만 내려 품 안에 든 너를 바라본다. 귀엽기만 한 줄 알았더니, 이렇게 보니까 좀 예...) ...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라비헨:(심각-) '얘 진짜 상태 괜찮은 거 맞나...?' 너 진짜 열 없는 거 맞아? 얼굴도 좀 빨개졌어.
소한:(아무리 생각해도 몸 상태가 이상한 것만은 부정할 수가 없어서) ...열 기운이 남아있긴 한가 봐.
라비헨:진짜?! 그거 큰일이잖아...
(조금 올라가서 너와 눈높이를 맞추고 이마를 맞대며) 어디 한 번 봐봐.
흠... 열은 딱히 없는 것 같은데.
소한:(네 얼굴이 다가오자 흠칫 놀라 그대로 굳는다. 얼굴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뜨겁게 달아오르고, 작게 벌어진 입에서 숨결 하나하나 덜그럭거리며 떨린다) ...놀, 랬잖아.
라비헨:...? 전에도 이렇게 했었잖아.
소한:... 그, 건 그렇지. (덜그럭)
(눈동자가 제 의지와 없이 굴러가 속눈썹 음영진 눈과 코끝, 입술까지 닿더니 귀끝까지 훅 붉어진다)
(내가 왜 이러지? 왜 이러는 거야? 고작 이 녀석 귀엽다고 이러는 건가? 아니 아무리 귀여운 걸 봐도 이 정도였던 적은 없는데. 진짜로 머리가 잘못됐나. 라비 말이 맞았나? 혼란스럽다)
라비헨:(심각22) 아까보다 더 빨개졌네.
물수건이라도 갖다줘?
소한:(물수건을 가져다주겠다는 네 말이 멀어지겠다는 뜻으로 자동 해석되어 들리자, 더 꼭 붙들어 안으며) 따뜻하게 체온 나눠줘야지, 또 어딜 가.
라비헨:네 얼굴이 색만 보면 엄청나게 불덩이니까 걱정돼서 그렇지.
열이 없는 건 확실한데 왜 그러지? 이불을 너무 덮었나?
소한:...글쎄. 체온과 얼굴이 붉어지는 건 아직 상관관계가 입증되지 않아서- (까지 생각하다가 네 흘러내리는 티셔츠 넥라인 아래 비치는 살갗을 보고는 정신이 혼미해져 조금씩 떨어진다) ...심부 체온이 높아진 걸 수도 있으니까 잠시 떨어져 있자.
라비헨:'거 참 변덕스럽네... 환자니까 내가 이해해줘야지.' ? 그래.
소한:(혹여 시선이 또 아래로 스칠까 싶어 이불을 끌어올려 네 턱밑까지 척 덮는다)
라비헨:윽, 난 안 추운데 왜 나까지 덮어주는 거야?
소한:추운 환경에서 추위를 덜 타는 것도 면역력 약화의 징조일 수 있어. 덮고 있어봐. (근거 X)
라비헨:...?? 그런 거야?
소한:(끄덕)
라비헨:'쟤는 나보다 아는 게 많으니깐 맞는 말이겠지.' 알았,어...
소한:(몸을 정자세로 틀어 멍하니 천장만 올려다본다. 내가 진짜 아프긴 아픈가보다. 별일을 다 겪고)
라비헨:근데... 꼭 이러고 있어야 해? 나 더워.
벗으면 안 돼?
소한:...뭘 더 벗게.
라비헨:당연히 옷이지.
소한:... 이불은 덮고 있어.
라비헨:보통은 옷을 벗지 말고 이불을 덮지 않는 게 정상 아니야?
소한:이 경우엔 이불이 보온성이 더 좋으니까, 반대로 해야지.
라비헨:그래? 전혀 몰랐어.
그럼 옷 벗을게. (꾸물꾸물)
소한:(제가 한 말이 논리적으로 틀리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옆에 누워 꾸물꾸물 옷을 벗는 너를 보니 기분이 더욱 이상해진다) ...
라비헨:(이불 옆으로 휙휙 셔츠와 반바지를 놓는다) 이제 됐어?
소한:(네 쪽을 보지 않으려 애쓰며 이불을 또 네 턱끝까지 끌어올린다) 그래. 이제 뭐할 거야.
라비헨:음... 혼자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옷도 벗었으니까 좀 잘까.
소한:그래도 되지. 마침 간만에 따뜻하기도 하고.
라비헨:그럼 같이 자자.
(눈을 감으며) 먼저 일어나면 깨워줘.
소한:...알았어. (심장이 입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다고 자기세뇌하며 눈을 감는다)
당신은 따끈하고 포근한 침대에 파묻혀
작게 가르랑소리를 내다가 숨소리를 낮춥니다.
이런 좋은 침대에서 잠을 잤다니,
본인은 부정하지만 도련님은 도련님입니다.
하암- 작은 하품이 입가를 비집고 나오고
노곤노곤한 졸음이 코끝을 자욱하게 메웁니다.
한숨 자고 일어나서 저녁 먹자고 하면
딱 맞겠네요.
당신은 아무런 경계심 없이
달콤한 꿈나라 열차에 몸을 맡깁니다.
.
.
.
한편... 라비헨이 그렇게 잠에 든 이후
소한은 감고 있던 눈꺼풀을 다시 들어올려
한참이나 천장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다가
몸을 뒤척거립니다.
몸이 이상하긴 제대로 이상한 모양이죠.
아니면 라비헨의 말도 안 되는 말마따나
머리에 이상이라도 생긴 거든가...
그럴 가능성이 적다고는 하나 배제할 수 없긴 하지요.
이 가혹한 빙하기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으니까요.
소한은 일단 잡생각은 뒤로 밀어두기로 마음 먹고
곱게 잠든 라비헨을 슬쩍 보다가 손을 뻗어
창가 근처의 커텐을 치고는, 다시 눈을 감습니다.
몸이 이상할 땐 휴식을 취하는 게 답이니까요.
.
.
.
그렇게 얼마나 선잠을 잤을까요.
소한은 따뜻하게 엉겨드는 말랑한 체온에 감싸여
손끝을 잘게 떨다가 눈꺼풀을 들어올립니다.
그리고 한 박자 뒤늦게 눈치챕니다.
...라비헨의 잠버릇은 고약했다는걸.
속옷까지 벗은 채로 엉겨든 라비헨을 보고 있자니
뭐, 다른 생각보다 '애새끼는 애새끼다'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찾아옵니다.
귀엽든 말든, 자세가 불편한 건 불편한 거죠.
소한은 잠시 라비헨을 정자세로 편하게 돌리려
몸을 일으키려다가 멈칫합니다.
가만히 몸 옆에 내려둔 손등에서 느껴지는
이 따뜻하고 물컹하고 무른 것은 대체...
이게... 이게 뭐야?!
부정하고 싶지만 이런 건 어떻게
눈치가 이리도 빨라지는지 모를 일입니다.
진정했던 심장이 덜그럭거리며 이상 신호를 보이고
민망하기 짝이 없어 얼굴이 화끈 달아오릅니다.
미친 새끼...! 지금 뭘 몸에 비비고 있는 거야!
와중에 묘한 분위기 속에서 막 깨어난 몸은
건강함을 자랑하듯 반쯤 일어서 있군요.
하아...
X발, 쌓였었나.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잡생각은 그만 하고 저녁이나 차려야겠군요.
일어나면 라비헨에게 한소리 하긴 해야겠습니다.
.
.
.
그리고... 한참이나 쿨쿨 잠에 취해 있던 라비헨.
당신은 곰돌이가 되어 숲에서 꿀단지를 푹 찍어먹는
아주 평화로운 꿈을 꾸다가 잠에서 깹니다.
라비헨:(머쓱) 엄청 푹 자버렸네. 곰이 되는 꿈까지 꾸다니...
소한은 아직 자는 건가? (힐끔)
옆자리를 돌아보면 침대는 텅 비어 있습니다.
굳이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아래층에서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납니다.
아무래도 식사 준비중이 아닐까 싶네요.
라비헨:뭐야... 깨우라고 말했는데. (궁시렁거리며 근처에 벗어뒀던 옷들을 다시 입고 내려간다)
옷을 차곡차곡 입고 계단을 내려가
거실을 넘어 빙 둘러 주방으로 향하면
소한이 가볍게 달큰한 팬케이크를 굽고 있습니다.
앞치마까지 두른 모습이 묘하게...
본격적이고 웃깁니다.
확실히 본인 집이 편하긴 제일 편한가보군요.
라비헨:'앞치마가 미니 사이즈처럼 보이네. 웃기다...' (네 등 뒤로 다가가 옆구리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며) 왜 안 깨웠어?
소한:... (네가 오는 소리는 들었지만, 부러 무표정으로 천천히 뒤돌아본다) 네 잠버릇이 또 한몫해서. 잊었어.
라비헨:? 이제 익숙해진 거 아녔어?
소한:익숙해졌지.
라비헨:근데 잊을 게 뭐가 있어?
소한:네가 알몸으로 내 손에 좆 비비고 자고 있는데, 그거 당하고도 멀쩡하면 내가 사람이냐.
라비헨:아.
(뒷통수를 긁적이며) 네가 옷 벗어야 면역 회복에 좋다며.
일부러 비비려던 건 아냐.
소한:그렇다고 거시기 비비라는 뜻은 아니었거든? ...
하아... 그건 그렇겠지.
(자꾸 그 촉감이 생각나서 미치겠다)
라비헨:그렇게 불쾌했어? 이미 볼 거 다 봐서 깨우고 넘어갈 줄 알았는데.
소한:(불쾌... 했나? 잘 모르겠다) ...당황해서 그랬지.
(잠깐, 근데 나는 왜 불쾌하지 않았지?)
(빤히 너를 내려다보다가 여전히 애새끼 같은 얼굴에 납득한다. 흠. 강아지가 발정기 온 기분이어서 그랬던 건가. 그럼 말이 되지)
라비헨:? 왜 그렇게 훑어봐?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소한:아니. 강아지처럼 발정기라도 왔나 해서.
라비헨:(인상을 팍 쓰며) 뭐?
소한:그 상황에서 눈을 뜨면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거든.
라비헨:그런 게 올 리가 없잖아.
소한:(심각...) 쌓인 건 아니고?
라비헨:(질색) 누가 들으면 내가 너한테 자위한 줄 알겠어. 아니거든?
소한:나도 자느라 어떻게 된 건진 모르거든? 딱 붙어 있길래 물어본 거야.
라비헨:잠버릇인데 내가 어떻게 알아? 흥... 앞으로 안 붙으면 되지.
소한:말만 그렇게 해도 붙을 거 다 알아.
뭐라고 하려던 건 아니고, 쌓였으면 알아서 처리하고 오라고 하려고 했지. 아님 말고.
라비헨:그런 거 아니라니까...
소한:아니면 됐어. (다시 프라이팬에 시선을 고정하고 착 뒤집는다)
라비헨:'거 참 거시기 한 번 닿았다고 사람을 아주 발정난 개 취급하네... 도련님은 도련님이다 이건가? 되게 유난이야, 진짜.'
소한:(슬며시 물 끓이고 있던 주전자를 들고는, 컵에 따르며) 코코아 마실 거야?
라비헨:... 마실래.
... ... '쟤도 근데 쌓일 수 있나? 24시간 내내 표정이 안 바뀌니깐 고자일지도 몰라.'
소한:(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능숙하게 찬장 칸을 열어 코코아를 두 숟갈 크게 퍼내고는, 네게 줄 몫을 만든다)
라비헨:(도저히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그만 충동적으로 입을 연다. 조금 잘못된 방법으로) 야, 소한.
너 제대로 기능은 하는 거야?
거시기 말이야.
소한:(열심히 코코아를 젓다가 뚝 멈춘다) ... 갑자기?
라비헨:거시기 좀 닿은 걸로 발정난 개 취급을 하니까 궁금해서 그렇지.
소한:혹시나 싶어서 풀고 오라고 얘기한 거지.
라비헨:나랑 계속 붙어다녔으면서 혼자 처리하러 가는 것도 못 봤고.
소한:(별 시답잖은 얘기를...) 먹고 살기 바쁘고 날씨는 얼어 죽겠는데 그거 신경쓸 틈이 있으면 그거야말로 발정난 거지.
내 말이 틀려?
라비헨:그건 그렇긴 해.
나도 딱히 생각난 적도 없고.
(심플-) 제대로 기능하면 다행이고.
소한:(어이 X) 내 거시기 사정에 걱정은.
네 거시기나 챙겨.
라비헨:물어볼 수도 있지. 오늘따라 되게 예민하네.
소한:...
라비헨:내 거시기 잘 챙기고 있잖아.
소한:...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모든 의지를 잃음) 그래. 앞으로도 잘 챙겨라.
라비헨:? 그래.
빨리 코코아나 줘.
소한:넌 내가 코코아 타주는 기계로 보이냐. (당연하게 요구하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가루 뭉친 곳 하나 없이 곱게 타서 건네준다)
라비헨:그야 코코아 위치를 난 모르잖아.
(코코아를 두 손으로 받으며) 여기 주인님은 너고.
소한:나참... 주인 취급을 하고는 있는지. (그러다가 잠시 고민하고는, 찬장에서 마시멜로우를 꺼내 퐁당 담가준다)
라비헨:(둥둥 떠다니는 마시멜로를 빤히 보다가) 이건 뭐야?
소한:독.
라비헨:맛있는 거구나?
흠... 신기하게 생겼네.
소한:(깡촌 사람이란... 잠시 고민하다가 실내 온도에 맞춰 말랑해진 마시멜로우를 하나 더 꺼내 입가에 내민다) 아.
라비헨:(순순히 아기새처럼 입을 벌린다)
소한:(별 감흥없이 네 입에 쏙 넣어준다) 달달할 거야.
라비헨:음...
음?
(한 번, 두 번 입 안에서 굴리다가 엄청난 자극을 받은 것처럼 상체를 꼿꼿하게 세운다. 잠깐 멈추는가 싶더니 안에서 잘게 잘라먹는 듯 씹는 속도가 빨라진다) ... 신기하다, 이거!
소한:맛있지. 천국 가라. (머그컵을 툭 치며 얼른 이쪽도 마시라고 한다)
라비헨:(지체없이 머그컵을 들어올려 호로록 마시고는) 이건 진짜 "독"이 맞는데?
소한:... (그냥 해본 소리에 눈 동그랗게 뜨고 놀라는 꼴이란... 어이없게 귀엽네) 천천히 마셔. 사레 들려.
라비헨:걱정은... (호록 마시고 중독된 것처럼 또 호로록 마시기를 반복한다) 까만 것만 마셔도 엄청 맛있었는데 하얀 덩어리랑 같이 마시니까 되게 맛있다.
소한:내일도 타줘?
라비헨:또 있어?
소한:있지.
라비헨:얼마나 있는데?
소한:손바닥 크기만큼?
라비헨:적어...
소한:그럼 먹지 마.
라비헨:싫어.
먹을 거야.
소한:(어쩌라는 건지...) 그래. 알았어. 먹어라, 먹어.
라비헨:넌 안 마셔?
소한:너 마시고 남는 양 봐서.
라비헨:음... (가만히 잔에 남은 양을 보더니 네게 툭 내민다) 마셔.
소한:?
너 마셔.
라비헨:너도 마셔야지.
원래 네 건데.
소한:내 거나 네 거나. (잠시 고민하다가, 싫지는 않아서 네게서 머그컵을 받아들고 살며시 홀짝인다)
...달아.
라비헨:그래서 맛있지 않아?
소한:... (끄덕)
라비헨:많이 마셔. 나만 주려 하지 말고.
소한:언제는 키도 나보다 커질 거라며. 욕심 부리고 많이 먹어야 크지.
라비헨:(시큰둥-) 그래봤자 너보다 커지지도 않을텐데.
소한:나 지금 너한테 맛있는 거 먹을 빌미 주는 건데. (툭)
라비헨:그런 거였어?
소한:(끄덕)
라비헨:그럼... 술 마셔도 키가 클 수 있어?
소한:... 그건 반대지 않을까.
라비헨:...
소한:술꾼.
라비헨:아냐.
소한:말 잘해야 할 거야. 술 많거든, 여기.
라비헨:맞아. 나 술꾼이야.
소한:... (어휴) 그래. 저녁 먹고 마셔.
라비헨:응!
소한:(팬케이크를 다 부치고는 접시에 옮기고, 설탕을 뿌리며) 술안주는 당근으로 전 부쳐줄까?
라비헨:저녁 먹고 그게 들어갈까...
소한:그래서 저녁으로 팬케이크만 만들었잖아.
라비헨:뭐야, 너 나 술 먹이려고 다 계획했던 거였어?
소한:네가 어떻게 나올지는 이제 안 봐도 다 보여.
당근전이 별로면, 생선포 구워줄게.
라비헨:난 생선포가 더 좋아.
소한:알았어. (식탁에 팬케이크 접시를 옮기고 물을 따라주며) 이제 저녁 먹자. 앉아, 라비.
라비헨:응. (식탁 의자에 앉는다)
소한:(이럴 땐 또 말을 잘 듣네... 식탁에 식기도 옮기고 맞은 편 자리에 앉는다) 그래서, 우리 고향은 네가 보기에 어때
신기한 거 말고.
라비헨:(팬케이크를 벌써 조각조각 잘라서 하나 입에 넣고는) 음... 엄청 시끌벅적했을 것 같아.
소한:엄청 시끄럽긴 했지. (너를 따라서 조각조각 자르고 가볍게 먹기 시작한다)
바다 처음 본다는데, 다 얼어붙은 걸 보여주게 돼서 기분이 묘하네.
(상념이 사라졌기 때문인지, 자조 때문인지 말이 괜히 길어진다) 내가 기억하는 모습은 이제 어디서도 볼 수 없겠지.
라비헨:아무래도 그렇겠지. 지금은 모든 곳이 바뀌었으니까. (냠냠...)
그래도 너는 제대로 기억하고 있잖아. 못 보더라도 말야.
소한:그렇지. ...넌 떠나온 고향에 다시 돌아가게 되면 어떨 것 같아?
라비헨:(멈칫) ... 모두들 웃고 활기차게 떠들었을 때의 모습이 자꾸 떠오를 것 같아.
소한:...역시, 아무리 다른 지역 사람이라고는 해도 느끼는 건 비슷비슷하구나.
적도로 간다는 건 고향에 죽어도 못 돌아간다는 뜻도 되는데, 그쪽으로는 생각 해봤어?
라비헨:솔직히...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어.
동생이 적도로 가자고 말한 순간부터 지금까지도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기 두렵다는 생각뿐이라서.
소한:고향에서 끔찍한 일을 겪었나보네.
라비헨:전부 다 변해버렸을 때, 부모님 두 분이서 한꺼번에 돌아가셨거든. 남들도 나랑 비슷했겠지.
(씁쓸하게 웃으며) 네 말대로 적도로 가면 다시는 고향에 갈 엄두도 못 내겠지. 그래도 괜찮아. 고향으로 돌아간다 해도 내가 뭘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거긴 많이 추우니까... 썩을 일은 없겠지. 그건 다행이라고 생각해.
소한:... (저도 상황이 별반 다르지는 않아서 섣불리 위로는 못하고) ...적도에 무사히 도착하면 나랑 이웃해. 제2의 고향으로 살아
라비헨:하하... (작게 웃음소리를 내고는 속눈썹을 내리깐다) 그럴까...
소한:(끄덕) 안 될 거 없잖아. 아는 사람 있어야 편하지.
라비헨:그렇지. 넌 적도에서 기차 만들게?
소한:...그건 고민 좀 해보고.
그래도 만약 만든다고 하면, 네가 첫 탑승객 해.
라비헨:그래그래- 내가 안전한지 테스트도 해줄게.
고민해본다는 건 뭐야? 좋아하고 만들고 싶다며.
아니면 적도에서 뭐 하려고?
소한:글쎄. 너 따라서 동업이나 할까.
만들고 싶어도 인력이나 자원 문제 때문에 현실적으로 힘들지.
내가 기차 못 만들겠다 싶으면 네가 나 끼워서 양조장 차려.
라비헨:그런 게 어디 있어? 참나- (피식)
차라리 나한테 기차 만드는 인력이 되어달라고 하는 게 낫지.
너, 괜히 나랑 동업했다가 양조장에서 술 숙성되기도 전에 다 마셔버리면 어떡하게?
소한:난 그 정도로 술꾼은 아니거든? 걱정되는 건 너지.
네가 다 마시면 뭐... 어쩔 수 있나. 다시 숙성시키든가 다음부터는 배럴을 늘리든가 해야지.
라비헨:긍정적이네. 아주 좋은 자세인걸?
소한:너 때문이잖아.
라비헨:그것 또한 좋은 거지.
소한:...
너 때문에 내가 이상해지잖아. 바보야.
라비헨:좋아지는 게 이상해지는 거야?
거 참 특이하네...
소한:당연히 이상해지는 거지. 난 고집이 세다고.
라비헨:?
지금도 세.
걱정하지 마.
소한:거 참 고맙네.
라비헨:별 말씀을 -
소한:칭찬 아니야.
라비헨:(팬케이크를 마저 입에 넣고는) 난 좋은데.
네가 이상해지는 거.
소한:...
네 뜻대로 맞춰져서?
라비헨:...? 내 뜻대로 맞추기는? 넌 좀 제멋대로잖아.
소한:많이 맞춰졌잖아.
라비헨:그건 그렇지.
소한:이젠 나 미워하지도 않는 것 같고.
라비헨:처음엔 완전 따분한 놈이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정들었어.
소한:웃기네... 넌 계속 골칫덩이처럼 굴다가, 요즘 유순해졌거든?
라비헨:네가 유순해진 거 아니고?
소한:? 너 아니야? (게슴츠레)
라비헨:난 원래부터 유순했는데? (뻔뻔)
네가 자꾸 열받게 말해서 그랬던 거지.
소한:열받게 하려고 한 적 없어. 사실만 말한 거지.
네가 찔린 게 내 탓은 아니라고.
라비헨:찔리지 않았어. 네가 자꾸 우겨서 열받았던 거지.
또 작다거나 바보라고 하면 진짜로 엉덩이를 차버릴 거야.
소한:귀엽다고 하는 건?
라비헨:... 그걸 아직까지 밀고 있어?
소한:(끄덕) 객관적인 게 아니면 네가 내 눈에 귀여워 보일 이유가 없잖아?
라비헨:객관적인 거 말고 다른 짐작가는 이유 하나 더 있잖아.
소한:뭐?
라비헨:네가 정말로 돌아버린 게 분명하지.
소한:... (어휴) 멀쩡하다고.
라비헨:그럼 이렇게 할까. 적도로 가는 중에 방랑자를 만난다면 한 번 물어보는 거야.
그 사람도 너랑 같은 의견을 내면 그땐 나도 인정할게.
소한:좋아. 두고 봐.
라비헨:어휴... 대체 어디가 귀엽다는 건지...
소한:하는 짓이 토낀데, 안 귀여우면 이상한 거지.
라비헨:난 토끼처럼 작지도 않고 풀도 안 먹거든?
소한:육식토끼.
라비헨:...?
너 진짜 제정신인 거 확실해?
소한:?
난 지금 누구보다도 이성적이야.
라비헨:이성적인데 귀엽다고 우기는 거면 너무 무서운데.
소한:별걸 다 무서워하네.
라비헨:말하는 대상이 너니까 무서운 거라고.
소한:내가 뭐.
라비헨:무표정으로 귀엽다고 하는데 그럼 안 무섭겠냐?
소한:그럼 웃으며 얘기해야 해?
라비헨:상상이 잘 안 가는데.
소한:나도 마찬가지야.
그냥 포기해. 받아들여.
라비헨:내 얘기인데 왜 네가 맘대로 받아들이라고 하는 거야? 어이없어.
나중에는 귀엽다고 무슨 소동물처럼 뽀뽀까지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소한:(어이 X) 내가 설마하니 귀엽다고 동물들한테 뽀뽀까지 할 줄 알아? 그랬으면 풍토병 옮아서 벌써 뒤졌지.
라비헨:일리가 있네. ...
(슬쩍 머리를 가리며) 쓰다듬으면 소리지를 거야.
소한:흠... 이미 쓰다듬은 적은 많지 않나?
라비헨:기억 안 나는데. 그랬었다고?.
소한:몇 번은 있었지? 이제 소리질러봐.
라비헨:...?? 싫어.
너 좀 변태 같아.
소한:?
재밌을 것 같았는데.
툭하면 변태 타령이네.
라비헨:그야 너 말하는 걸 봐.
(조금 소름끼친 듯 바르르 떨며) 툭하면 귀엽다느니, 소리지르라니 하잖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쓰다듬기까지 하고.
소한:(어이 X) 그냥 쓰다듬었는데 네가 둔감해서 잊은 거거든?
그리고 반응이 재밌는데. 이 개같은 환경에서는 재밌는 게 드물다고.
라비헨:에휴... 마음대로 해. 아주 대놓고 쓰다듬지 그래?
소한:그래. (슥슥)
라비헨:(눈을 가늘에 뜨며) ... 어째 신난 것 같은데.
소한:(귀엽다) 조금은?
라비헨:...기분 이상해. 내가 완전히 네 애완동물이 된 것 같아.
소한:흠... 그런가. 맛있는 거 얻어먹어 넌. 그럼 상부상조지.
라비헨:...? 누가 네 애완동물 한대?
소한:싫으면 안 하는 거지. (별 생각 X)
라비헨:근데 왜 계속 쓰다듬어?
(머리를 휙 옆으로 피한다) 쓰다듬는 시간 끝났어.
소한:거 참 까칠하네. (쓰다듬기를 멈추고 도로 식사에 집중한다)
라비헨:난 정상이거든. '딱히 싫진 않았지만 이상하잖아, 이런 거. ...키가 커서 그런가, 손도 엄청 크네.' (따뜻한 큰 손이 머리통을 쓰다듬는 느낌이 좋았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음)
당신은 툴툴거리면서도 소한과 함께 천천히 식사를 끝냅니다.
적당히 채워진 배에서부터 노곤함이 파도처럼 밀려오네요.
증기 보일러가 내뿜는 규칙적인 진동음과 든든하게 채워진 뱃속,
그리고 방금까지 머리칼을 스쳤던 큰 손의 잔열이 합쳐져
당신의 의식을 몽글몽글하게 흐트러뜨립니다.
방금 막 자고 일어났는데 몸이 피곤했던 걸지도.
당신이 거실 소파에 털썩 앉아 쉬려고 하면
소한은 당신의 안줏거리를 준비하는지
달큰짭짤한 생선포 구워지는 냄새가
슬며시 퍼져 나옵니다.
라비헨:(배부른 고양이처럼 고롱고롱거린다) 재난사태인 것도 까먹겠네. 엄청나게 잘 먹었다.
이곳이 멈춰버린 유령 도시의 폐허라는 사실도,
밖에는 영하 30도의 눈보라가 치고 있다는 사실도 아득한 옛날이야기 같습니다.
따뜻한 증기열에 몸이 노곤하게 녹아내릴 때쯤,
주방 쪽에서 들려오던 지글거리는 소리가 천천히 멈춥니다.
이내 거실의 고요를 깨고 다가오는 소한의 발소리와 함께,
후각을 강렬하게 자극하는 냄새가 훅 끼쳐 옵니다.
소한이 직접 말려두었던 산천어 포가 불길에 한 번 더 구워져 바삭한 질감을 뽐내고,
기름기가 배어 나와 반짝이는 표면 위로 소금이 결정처럼 맺혀 있어,
보기만 해도 입안에 침이 고입니다.
큼직한 머그잔 속에는 투명한 보드카가 따뜻한 물에 희석되어
모락모락 김을 내뿜고 있습니다.
그 위로는 말린 사과 조각이 동동 떠 있고,
과일 잼 일부가 안에서 뭉근하게 가라앉아 있네요.
알코올의 톡 쏘는 향 끝에 달콤하고 상큼한 과일 향이 기분 좋게 감돕니다.
소한:(거실 탁자에 내려두며) 첫 잔이라 가볍게 희석했어. 속앓이 하지 말라고.
라비헨:배려가 넘치네. 향만 맡았을 땐 술이 아니라 음료수 같아.
소한:맛도 괜찮을걸. 예전에 어머니가 이렇게 마시는 걸 몇 번 봤어.
라비헨:그럼... 이번에 처음 만들어보는 거야?
소한:(끄덕) 난 술에 목 매고 그런 건 아니라.
라비헨:... 어째 나는 술에 목 맨다는 것처럼 들린다?
어쨌든! 잘 마실게. (머그잔을 두 손으로 들어올려 짧게 들이킨다)
따뜻한 머그잔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집니다.
조심스럽게 한 모금 들이키자, 보드카의 알싸한 열기가 먼저 혀를 스치고
곧이어 뭉근하게 가라앉아 있던 과일 잼의 진득한 달콤함이
입안 전체를 부드럽게 감싸 안습니다.
설탕에 절여진 사과의 산미와 보드카의 묵직한 베이스가 어우러져,
마치 겨울철 축제에서 마시는 펀치 같은 느낌이 나네요.
희석된 술기운은 혈관을 따라 천천히 퍼지며, 어깨 근육을 노른자처럼 말랑하게 풀어줍니다.
라비헨:(입술에 남은 액체까지 남김없이 혀를 내밀어 훔치고는) 이거... 되게 맛있다!
소한:... 벌써 다 마셨어? 그거 도수는 세. (;;)
라비헨:그래? 술맛이 엄청 나진 않던데? 달아.
몸이 좀 뜨끈뜨끈하긴 해.
소한:어휴... 또 취해서 주정이나 부릴 거 아니면 천천히 좀 마셔. (네 손에 들린 머그잔을 뺏어다가, 잠시 잔을 기울에 아래에 남은 양을 확인해보고는) ...한 잔 더 줄까?
라비헨:내가 얼마나 주정 부렸다고... (툴툴)
더 줘.
소한:(이게 파트너인지 애새끼인지...) 알았어. 안주 먹고 있어.
라비헨:(생선포를 하나 입에 넣고 와그작거린다) 여기 서비스 좋은데?
소한:참나...
소한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빈 머그잔을 들고 주방으로 향합니다.
소한은 대꾸 대신 냄비에 물을 붓는 소리로 답합니다.
주방에서 보드카 병의 뚜껑이 열리는 '톡' 소리와 함께,
잼을 뜨는 숟가락이 머그잔 안쪽을 긁는 맑은 금속음이 들려옵니다.
당신은 소한의 조언대로 바삭하게 구워진 생선포 한 점을 집어 듭니다.
짭조름한 소금기가 혀끝을 자극하자,
조금 전 마셨던 과일 술의 달콤함이 더욱 강렬한 잔상으로 남네요.
도수가 높다는 말은 정말이었는지, 확실히 몸이 평소보다 조금 따뜻하고
소파의 천이 피부에 닿는 느낌이 간질간질해진 느낌이 듭니다.
소한:(다시금 돌아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머그잔을 다시 내밀며) 자. 아까보다 물 좀 덜 섞었어. 천천히 마셔라, 진짜로.
라비헨:아까도 천천히 마신 건데... 알았어.
(머그잔을 받으며) 입에 물고 있지 뭐.
근데 넌 안 마셔?
소한:나 아직 환자야. (얘 벌써 취했나? 방금 한 말을 까먹었네)
라비헨:아, 맞다. 그랬었지 참.
아쉽다. 같이 마시면 좋았을텐데.
역시 불쌍한 소한의 몫까지 내가 마셔주는 수밖에. (꿀꺽)
소한:(어이 X) 불쌍해서 마셔주는 게 아니라 네가 많이 먹고 싶은 거잖아.
라비헨:쯧쯔- 아니지. 겸사겸사-
마침 난 마시고 싶고, 넌 술을 좋아하지만 환자니까 못 마시는 아쉬움을 내가 대신 채워주는 거라고.
소한:(해탈) 그래. 마시고서 환자한테 술주정 부리지나 마라.
라비헨:걱정도 과해. (피식) 걱정되면 먼저 올라가서 문 잠그고 자든가..
소한:혼자 놔두면 네가 몇 병을 마실 줄 알고. (;;)
라비헨:나한테 맛있는 거 줄 작정 아니었어?
제한이 있었어?!
소한:그렇다고 술독 올라서 죽을 정도로 마시라는 건 아니었거든?
이 술꾼아.
라비헨:자꾸 술꾼술꾼 할래?
그냥...! 기분 좋을 정도로만 마시는 거라고.
소한:흠. 그런데 왜 '몇' 병이라는 말에는 딴지를 안 걸지? 40도짜리 한 병으로도 사람 급사할 수 있을 정도는 되는데.
라비헨:(삐질...) 아껴 마시면 되지...
천천히... 조금씩!
소한:어휴... 화상아. (골치 아픔)
라비헨:그러게 누가 술을 알려주래?
소한:내 탓이냐, 그게? 너 살리려고 그런 거지.
라비헨:절대 탓하는 건 아니지. 술은 맛있으니까.
자꾸 화상이라 하잖아.
소한:그럼 화상 짓을 하지를 마. (;;)
라비헨:'걱정이 과하다고 하면 나중에 술을 안 줄 수도 있으니까...' 알았어, 조금만 마실게.
진짜 조금만.
소한:그래. 세 잔까지만이다.
라비헨:'꼰대 같은 새끼.' 그래. ...이건 아껴서 마셔야겠네.
소한:잘 생각했네. (네 옆에 놓인 생선포를 하나 들어 입에 넣고 우물거린다)
라비헨:(다시 잔을 입에 대고는) ... 나 궁금한 거 있어.
소한:뭔데?
라비헨:파트너가 총 두 명 있었다고 했잖아. 나를 제외하면.
첫 파트너는 이 마을에서 같이 살던 친구였고... 그럼 다른 파트너 만나기까지, 그리고 나를 만나기까지 혼자 다녔을 땐 어떻게 살아남은 거야?
추울 때는 어떻게 하고.
너 생각보다 추위 잘 타는 것 같던데.
소한:... (뭐야, 시답잖은 질문이네) 그럭저럭.
라비헨:엄청나게 많이 생략됐는데.
소한:설마하니 재밌는 이야기겠어? 그냥 불 피우고, 야영하고, 빙식체 처치하고, 빈 집 털고. 똑같았지.
라비헨:혼자 다니면 정신에 문제 생긴다길래 궁금했던 거야.
그런 패널티가 아니라면 쭉 혼자 다녔을 것 같아서.
딱히 내 도움은 필요해보이지도 않고.
소한:... (잠시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가, 입술을 달싹이며 말문을 연다) ...외로워서.
라비헨:...?
외롭다고?
소한:(끄덕)
라비헨:술꾼을 데리고 다닐 정도로?
화상을 데리고 다닐 정도로?
소한:흠... (너를 슬쩍 내려다보다가) ...넌 괜찮아.
라비헨:왜?
소한:적어도 네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는, 내가 알기 쉬워서.
라비헨:'뭔 소린지 잘 모르겠다.' 특이하네...
소한:평범하거든?
라비헨:날 성가셔하면서.
소한:성가시긴 한데, 귀엽다니까.
라비헨:대체 나랑 다른 파트너의 다른 점이 뭔데?
다 너보다 작았을 거 아냐.
소한:걔넨 안 귀여웠고, 넌 귀엽고?
라비헨:그러니까 귀엽다는 기준이 뭐야?!
소한:흠... (예상 외의 질문에 아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다) 별거 아닌 걸로도 트집 잡는데 별거 아닌 일로도 행복해하고, 정신 박살난 것처럼 굴다가도 튼튼하고.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 같으면서도 단순하고.
겉보기에도 외모가 동그랗고?
라비헨:...?
칭찬이야, 욕이야? 슬슬 열받는데.
소한:칭찬인데.
라비헨:트집 잡고 정신 박살났다고 하는 게?
소한:흠... 그걸 감안하고서도 귀여우니까 생존한 거지. (헛소리)
라비헨:(으-) 술은 내가 마셨는데 네가 취한 것 같아.
소한:뭐가. 동물 중에도 성깔이 더러운데도 인류에게 거둬져 키워지는 건 애완 용도밖에 없어.
라비헨:난 사람이거든?
아, 너랑 얘기하다 또 다 마셔버렸네...
소한:지금 네가 아무리 성깔 내도 안 버린다고 얘기하는 거거든? (자연스럽게 네 머그잔을 다시금 받아들며) 마무리 잔은 시원하게?
라비헨:아, 고백이었어? 난 또 귀엽다고 우기는 줄 알았지.
(끄덕) 시원하고 깔끔한 걸로.
소한:어떻게든 끼고 적도까지 데려가줄 테니까 염려나 마.
그래. (다시금 머그잔을 들고 주방으로 사라진다)
라비헨:흠... (팔짱을 끼고 소파에 기댄다) '표현이 어째 업고 가겠다는 것처럼 들리는걸. 같이 간다는 게 아니라.'
소한 특유의 삐딱하고 무뚝뚝한 화법이지만
뭐, 그 나름대로 무게감을 가지기는 한 모양입니다.
잠시 생선포를 우물거리고 있으면 소한은 다시 나타나
당신에게 차게 식은 잔을 내밉니다.
유리창 밖의 깨끗한 눈을 퍼담아 급속으로 얼렸는지
잔 표면에 차가운 물방울이 실시간으로 도르르 맺힙니다.
잔을 받아들어 들여다보면 투명한 얼음 알갱이들이 잘게 부셔져 있고,
그 사이로 투명한 보드카와 레몬즙 향기가 납니다.
깔끔하게 달라고 했더니 아주 얼어붙도록 줬네요.
소한:마시고 씻고 자자.
라비헨:'마시고 머리 깨지라는 건가?' 벌써?
소한:그럼 딱히 할 거 있어? 밖에는 해 지는데.
라비헨:(슬슬 취기가 올라서 얼굴이 빨개진 채 마지막 잔을 조금 들이킨다. 멍하니 잔에 들은 술을 바라보며) 넌 나한테 궁금한 거 없어?
소한:음... (그러게. 있나?) 모르겠는데. 이제 성장 환경도 알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거 취향도 슬슬 알 정도라.
한 달 내내 계속 꼭 붙어 다녔잖아.
라비헨:하하, 그렇지. 완-전 질리도록 붙어 다녔지.
그냥... 오늘 같이 배부르고 등 따시게 보내는 날은 드물잖아.
소한:흠... 그럼, 한 달이나 같이 다녀본 소감을 얘기해보는 건 어때.
아니면 미래 계획이나.
너 나중에 적도 가면 결혼은 할 거야?
라비헨:결혼...? 너무 까마득한 미래 아냐?
적도 가서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있긴 할까.
살은 사람 보기도 힘든데.
소한:흠, 그건 그래. (순순히 납득하며 네가 앉은 소파 옆에 털썩 앉는다)
(별 감흥 안 드는 것 같으면서도 뭔가... 속이 답답한데. 실내 온도가 높아서 그런가)
라비헨:네가 결혼 얘길 꺼낼 줄은 몰랐어. 그런 쪽엔 전혀 관심없을 것 같아서.
너는? 결혼하고 싶어?
소한:뭐, 생각은 없지만 좋은 사람 있으면 하겠지.
독거 노인이 되는 건 사양이거든.
라비헨:하하, 외로운 건 싫다고 했으니 그렇겠네.
만약 적도에 가서도 생존자도 못 찾으면 늙어 죽을 때까지 이웃 해줄게.
소한:그래. 약속이다.
라비헨:아, 참고로 그때는 죽지 말라고 해도 불가피한 거 알지?
소한:내가 멍청이도 아니고 자연사 갖고 그러겠냐. (어이 X)
하여튼 실없긴.
라비헨:장난치는 거지-
하여튼 재미없긴.
소한:그럼 넌 내가 어떻게 나올 때 재밌어하게.
라비헨:음- 장난에 어울려주거나, 평소랑 다른 반응을 보여주면 재밌겠지?
소한:흠...
그럼 너도 내 예상 밖의 무언가를 해야지. 다 뻔하니까 시큰둥하게 되잖아.
라비헨:뭐야, 내 탓이라는 거야?
소한:탓하려는 게 아니라, 예상 범위를 넘는 장난이라야 놀란다니까?
라비헨:까다롭기는. 평소에도 화상이니 뭐니 하고 혼내면서.
(술을 반쯤 들이키고는 입맛을 다시더니) 흠... '뭐 어떻게 치라는 거지?'
'슬슬 졸리네...덥고. 좀 취했나?' (잔을 잠시 내려놓고 느른하게 눈을 깜빡인다.) '평소랑 반대로 행동하면 장난에 넘어간다는 건가?'
(항상 소한에게 틱틱거렸으니 친근하게 대하면 놀라겠지. 소한의 무릎 위에 뻔뻔하게 머리를 올리고 눕는다) 이런 것도 예상 범위야?
소한:(순간 벌어진 상황에 아무것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깜빡거리며, 네 동그란 머리통만 내려다본다) ... 아, 아니. (화끈)
라비헨:이런 걸 장난이라 쳐도 되나? 그냥 누운 것 뿐이잖아.
(잠깐 생각하며 눈을 빙그르르 굴리더니 툭-) 쓰다듬을래?
하고 싶었던 거잖아.
소한:(살랑살랑 무릎 위로 쏟아지는 네 검은 머리칼에 동그란 뒤통수마저 귀여워 보여서, 작게 숨을 들이쉬고는 부드럽게 그 위를 쓰다듬는다. 손가락 사이로 머릿결이 닿을 때마다 어쩐지 그 촉감이 오래도록 손끝에 남는 것 같다) ...순해졌네.
라비헨:(쓰다듬는 손길이 기분 좋은지 나른하게 웃는다. 느릿느릿한 투로) 예상 범위를 넘어야 한다며. 그럼 평소랑 다르게 행동하는 게 정답이지. 안 그래?
소한:(얼굴이 슬며시 붉어진 채로 피식 바람빠진 웃음 소리를 내며) 그건 그렇다만, 덜 귀여워 보이기엔 실패한 것 같은데, 라비.
라비헨:(스르르 눈을 감고) 그건 이제 그만 따지기로 했어. 끝이 안 나잖아.
넌 계속 귀엽다 하고, 난 아니라고만 하는걸.
(잠시 머뭇거리더니 취기 때문에 솔직하게 입을 연다) ... 그리고 솔직히, 네가 쓰다듬는 건 싫지 않아.
소한:(귀엽다) ...그럼 귀여운 거 맞네. 귀여움 받는 거 좋아하잖아.
라비헨:만지면 다 귀여움 받는 거야? 거 참... 별 게 다 귀엽네.
(손을 뻗어 네 뺨을 쓸어내린다) 그럼 이렇게 쓰다듬는 것도 내가 널 귀여워하는 중인 거야?
소한:흠... 맞냐 아니냐를 따지자면 맞지 않나.
...근데 나 만지는 건 별로 거리낌 없네, 너.
(뺨에 올라온 네 손에, 제 손바닥을 가볍게 겹친다)
맨날 끌어안고 잔다고, 아무렇지도 않아졌어?
라비헨:(겹쳐진 손을 보며) 어... 거리낌 없는 줄 이제 알았어.
하도 붙어있어서 그런가봐.
온천에서는 벗은 것도 다 봤잖아.
소한:...그거야 그렇지. 그렇다고 이렇게 밀착한 적은 거의 없잖아.
이젠 좀 편해?
라비헨:(별뜻없이) 그야- 항상 밀착해서 자는데 이런 게 문제가 될까? 내 잠버릇 때문에 고생은 네가 다 하지만.
...
편해.
소한:(네 말을 듣고는 입술이 풀린 것처럼 부드럽게 웃으며) 다행이네.
라비헨:(느릿하게 꿈뻑거리며) ...?
내가 웃긴 얘기했어?
왜 웃어?
소한:(계속 미소 지은 채로) 그냥. 좀 뿌듯해졌달까.
라비헨:어떤 점이?
소한:이젠 내가 편하다며. 좋은 일이지.
라비헨:하하... 언제는 정 붙이면 안 된다고 했으면서.
소한:이미 늦었잖아. 붙을 대로 붙었다고.
라비헨:한 쪽이라도 붙이지 않는 편이 낫다며. 나중에 혼자가 됐을 때 곤란해진다고...
소한:안 죽으면 그만이지. (쓰담쓰담)
라비헨:(기분 좋아... 옅게 입꼬리를 끌어당겼다가) 맞는 말이긴 한데, 너 답지 않아.
소한:그러게. 취했나... (잠시 멍하니 앞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여 네 누운 모습을 구경한다)
라비헨:(키득키득) 술은 내가 다 마셨는데? 네가 어떻게 취해-
소한:낸들 아나... (부드럽게 계속 쓰다듬다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준다)
라비헨:(흠칫- 작게 떨며) 간지러워...
소한:...간지럼 잘 타네. (본인의 행동의 이유를 찾지 못한 채 네 귓불을 가볍게 문지른다. 심장이 작게 다시금 쿵쿵 뛴다)
라비헨:(반눈을 뜨며 삐죽인다) 간지럼 잘 타는 게 아니라 쓰다듬으라고 했는데 만지작거리잖아, 지금.
소한:싫어?
라비헨:...
(슬쩍) 싫, 진 않지만... 이상하잖아. 이런 거...
친한 친구끼리는 원래 이런 거야?
소한:(사실 본인도 잘 모른다. 이런 적이 없어서. 하지만 대놓고 거짓말한다) ...그런 거지.
라비헨:그래? 음... '소한은 이런 큰 도시에서 살았던 사람이니까 맞겠지. 나보고 깡촌 사람이라 모르는 게 많다고 했고...'
뽀뽀만 안 하고 친한 친구끼리는 별 걸 다 하는 거구나...
처음 알았어.
도시 사람들은 이렇게 노는 거구나.
소한:...듣기로는 엄청 친하면 뽀뽀도 하긴 할걸. 난 안 해봤지만.
라비헨:왜? 친구 있었잖아.
소한:뽀뽀를 할 만큼의 다정다감한 사이는 아니었거든.
라비헨:생각보다 엄청 개방적이네.
난 뽀뽀부터는 사귀거나 결혼한 사이부터 해야 하는 줄 알았어.
소한:가끔 사귀지도 않는데 섹스하는 인간들도 있는 걸 보면, 사람마다 구애받고 안 받고가 다르겠지.
라비헨:사랑하지 않는데 그럴 수 있어? 충격이야...
소한:세상엔 이런저런 사람이 있는 거지.
라비헨:(잠들지 않으려 졸린 눈에 힘을 준다) ... 소한.
그럼 우리는 얼마나 친한 거야?
소한:... 글쎄. 그걸 판단할 수 있을까.
라비헨:언젠가 너도 남들처럼 나한테 뽀뽀할 거야?
소한:(얘 왜 자꾸 이런 질문을 하는 거지? 네게 순간적으로 뽀뽀하는 상상을 했다가 얼굴이 조금 더 발갛게 익는다) ...넌?
라비헨:(피식) 뭐야, 내가 먼저 질문했잖아.
아직 잘 모르겠어. 어릴 때 가족한테 했을 때를 제외하면 한 번도 안 해봤는걸...
소한:...
... 지금 해본다고 하면?
라비헨:'당연히 뺨에 한다는 거겠지?' ... 하고 싶어?
소한:... (이걸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한참을 망설이다가 부끄러움이 더 커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린다) ...나중에.
라비헨:난 또 하고 싶은 줄 알았네.
그럼 이제 자러 가?
소한:...일단 씻고 자야지. 너 술 취했으니까 도와줄게.
라비헨:안 취했어...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그냥 좀 졸린 거야...
집이 따뜻하니까...
소한:눈도 제대로 못 뜨면서 무슨...
라비헨:취한 게 아니라 졸린 거라고...
소한:(건성으로 들으며) 그래, 그래. 쉬고 있어. 따뜻한 물 준비한다.
라비헨:우응... (완전히 눈을 감고 졸기 시작한다)
소한:... (이 녀석 좀 보게? 제 허벅지에 고개를 기댄 뒤 쿨쿨 잠드는 너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쉰다. 그냥 이대로 재워야겠네...)
(천천히 네 상체를 들고, 품에 툭 안은 뒤 엉덩이를 받친다)
라비헨:(안기자마자 몸을 살짝 특어 가슴 부근의 옷깃을 붙잡고 네게 더 파고들어 완전히 자리를 잡는다)
소한:(어휴, 이게 애새끼지 다른 게 애새끼냐... 속으로 한탄하면서도 품에 쏙 안긴 네가 귀엽게 느껴져서, 계단을 올라가 침대에 살포시 눕힌다) 잘 자라, 화상아.
.
.
.
포근한 거위털 이불의 감촉에 취해 얼마나 깊게 잠들었을까요.
2층 침실의 창문으로 비쳐드는 은백색의 아침 햇살이
당신의 눈꺼풀을 간지럽힙니다.
분명 창밖은 영하의 혹독한 추위겠지만,
밤새 배관을 타고 흐른 홍심석의 온기 덕분에 방 안은 여전히 훈훈합니다.
잠결에 옆을 더듬어보면, 소한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대신 밖에서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소리가 당신의 의식을 꺠우네요.
챙—! 챙—!
끼이이익, 툭.
금속이 부딪히는 맑은 소리와 무언가 깎아내는 소리.
소리는 잡동사니가 바깥까지 비치던
별관 창고쪽에서 들려오는 듯합니다.
라비헨:'뭘 만들길래 이리 시끄러운 거야?' (크게 하품을 하고는 눈을 비비며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향한다)
라비헨:
건강
기준치:70/35/14
굴림:28
판정결과:어려운 성공
어제 마신 과일 보드카 덕분인지 몸이 가볍고 개운합니다.
흠흠, 역시 적당한 알코올은 활력에 도움이 되는군요.
겉옷을 대충 걸치고 계단을 내려간 뒤
밖으로 나가 별관 창고 문을 열자,
매캐한 금속 냄새와 기름 향이 확 끼쳐옵니다.
그곳에는 어제 소한이 말했던 '다른 총기'들과 온갖 화약에 더불어
온갖 금속체 부품들이 널려 있습니다.
소한은 핀셋과 드라이버로 무언가를 정교하게 다듬고 있네요.
라비헨:(하암-) 뭐 해?
소한:(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며) 뭐하겠어. 장비 손보는 중이지. 네 석궁이랑, 이것저것.
그러고보니, 넌 총 안 챙겨도 되겠어? 석궁보다는 화력이 좋을 텐데.
라비헨:(단순) 쓸 줄 몰라.
그리고 그거, 소리가 너무 커.
한번씩 깜짝깜짝 놀란다고.
소한:흠... 소리가 크긴 하지. 그래도 덕분에 포식자들 접근했을 때는 큰 소리로 내쫓는 장점도 있어.
라비헨:(힐끔) 그치만 석궁보다 더 무겁지 않아?
소한:(끄덕) 무게가 나가긴 하지.
뭐, 편한대로 선택해. 그러려고 물어보는 거니까.
라비헨:난 석궁이 더 좋아.
그리고 탄환은 제한적이잖아.
탄환 자체도 제법 무겁고.
소한:그래, 그럼- (옆에 미리 만들어뒀던 파이프 폭탄을 건넨다) 이거나 챙겨.
라비헨:...? 이건 뭐야?
소한:(툭) 폭탄.
라비헨:(깜짝 놀라서 순간 놓칠 뻔한 것을 겨우 다시 잡는다) ㅍ, 폭탄?? 갑자기 이걸 왜?
소한:? 급할 때 쓰라고.
라비헨:네가 있는데 이런 걸 쓸 일이 어디 있어?
소한:둘 다 죽기 직전일 것 같을 때는 써야지. (단순)
라비헨:무서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
소한:세게 집어던지는 충격 정도가 아니면 폭발하진 않을 거야. 챙겨둬.
라비헨:일단... 알았어.
되도록이면 쓸 일이 평생 없었으면 좋겠네.
네가 갑자기 폭탄을 주니까 잠도 다 달아나버렸잖아.
소한:뭘 달아나기까지.
(덤덤하게 짐을 정리하며, 다시 집으로 들어갈 채비를 한다) 잠깐 씻고 식사한 뒤에, 공장쪽 둘러보고 마저 출발하자.
라비헨:벌써? 하루 정도는 더 있다 갈 줄 알았는데.
소한:...? 더 있고 싶어?
라비헨:(끄덕) 이 정도로 따뜻하게 지낼 수 있을 기회가 적도에 도착하기 전까진 없을 것 같아서.
역시 좀 그렇지? 적도에 가려던 사람은 나고 너는 나한테 맞춰주는 중인데 일정을 연기하자는 건...
소한:... (괜히 마음이 약해져서는) ...알았어. 하루만 더.
내일은 무조건 출발하는 거다, 알았지.
라비헨:'얘가 웬일이지?' (어쨌든 바라던 대로 돼서 활짝 웃는다) 물론이지.
소한:(근데 오늘 뭐하지) ...그럼 오늘은 뭐하려고? 또 술 취해서 늘어져 있게?
라비헨:흠... 그것까진 생각 안 해봤어. 지금부터 생각해야지.
이렇게 넓-은 곳에 있으니까 괴물도 우릴 찾기 어려워할 거고.
소한:거 참 태평하네...
라비헨:그게 내 매력이거든.
소한:그-래, 매력으로 쳐주마.
(네 손을 자연스럽게 꼭 쥐며) 들어가자. 춥다.
라비헨:...? (맞잡은 손을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