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파랑 아람 마을
소한의 고향이자 한때 해안의 활기를 책임졌던 마을이자 중소도시.
그곳의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싸늘하게 식은 철가루 냄새와
소금기 섞인 찬바람이 두 사람을 맞이합니다.
깊은 계곡을 따라 내려온 강물이 바다와 만나는 하류,
한때는 거대한 증기기관차들이 쉼 없이 연기를 내뿜으며 달리던 철길이
이제는 하얀 눈 아래 파묻혀 있고,
해안가에는 날갯짓을 멈춘 채 그대로 얼어붙은 갈매기들이
기괴하게 쓰러져 있습니다.
곳곳에는 증기기관을 제조하던 거대한 공장들의 철골 구조물이
앙상한 갈비뼈처럼 솟아 있습니다.
무너진 지붕 사이로 고드름이 고드름이 톱니바퀴처럼 엉켜 있고
수리를 기다리다 방치된 거대한 증기 기관의 잔해들이
마치 살이 다 갉아먹힌 고래의 뼈처럼 이곳저곳 늘어서 있습니다.



(저 멀리 굳어버린 해안을 바라보며) ...파도는 아직도 얼어 있네.

(계속 눈을 크게 뜨고 여기저기 두리번거린다) 바다는 이렇게 생겼구나... 신기한 것도 엄청 많다...

원래는 파도가 일렁이면서 속이 시원해지는 소리가 났다고.
온 김에, 공장에도 들리자. 급하게 탈출하느라 하나만 챙겼지만, 홍심석이 몇 개 더 남아 있을 거야.

너네 집 공장을 또 털자는 얘기야?





(죽은 어머니 아버지도 아직 거기 그대로 계실지 모르고... 잠시 아랫입술을 물어다 떼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너를 슬며시 바라본다) ...방랑자들이 드나들었을 테니 몇 개나 남아있을진 모르겠지만, 하나라도 더 얻으면 여정이 쉬워질 거야.


건물이 무너졌을지 아닐지는 모르겠네. 내가 떠날 땐 워낙 아수라장이었거든.



그럼 가보자.

두 사람은 녹슬어버린 철골 구조물 사이를 지나 주택가로 향합니다.
지붕이 깨진 주택들은 이미 주인을 잃은 지 오래지만,
집집마다 달린 작은 증기 배관들은
과거 이 도시가 얼마나 풍요로운 열기를 누렸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람이 빈 파이프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며
마치 도시가 흐느끼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를 냅니다.
빙식체가 없어서 다행이지만, 꼭 누군가 보고 있는 기분입니다.
당신이 뒤따르는 내내 소한은 무표정인 듯도, 쓸쓸한 듯도 한 얼굴로
익숙하게 기억에 남아있던 길을 더듬는 듯 걷다가도
이따금 특별한 건물 여러 곳에 눈길이 쏠리는지 멈춰섭니다.
아무리 무던한 그라도 이런 처참한 고향 풍경 앞에서는
그저 평범한 한 사람에 지나지 않겠죠.
당신은 소한을 따라 도시 주택가의 외곽까지 건너갑니다.
곧, 숲과 인접한 작은 석조 건물의 모습이 보입니다.
넓은 대지 위에 세워진 2층 규모의, 아담하면서도 너른 석조 주택.
본채 옆으로는 두 개의 별관이 날개처럼 붙어 있고,
그중 하나인 창고 문 사이로 녹슨 덫과 가죽 부스러기들이 보입니다.
정원 한가운데의 작은 연못은 이제 바닥까지 투명하게 얼어붙어,
마치 거대한 수정 구슬처럼 정원의 정적을 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간의 풍랑을 맞아서인지 지붕 한 쪽은 무너져 쓰러져 있고,
그 파편들이 정원 구석구석에 틈틈히 널려 있네요.










(어색하게 턱을 긁적이며) 파트너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기도 하잖아.



당신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소한을 따라
어정쩡하게 열려 있는 현관을 지나 거실로 들어섭니다.
실내에 들어서자마자 2층으로 가는 계단이 놓여 있고,
그 옆으로 널찍하게 자리한 응접실 겸 거실이 있네요.
안으로 들어가 주변을 살펴보면
먼지로 인해 모든 것들은 채도를 뺏긴 채 부옇게 물들어 있습니다.
가장 먼저 벽면을 장식한 짐승들의 박제가 위압감을 주고,
소한의 아버지가 사용했을 법한 구식 수렵용 총기들이 훈장처럼 걸려 있습니다.
반면, 그 살벌한 장식 아래에는 우아한 곡선의 상아 피아노가 덮개가 열린 채
연주해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고,
선반 위에는 매끄러운 유약을 바른 백자들이 창백한 달빛을 머금고 있습니다.
고요하고도 야성적인 예술적 취향이 기묘하게 공존하는 공간이네요.
한쪽 벽면을 차지한 가죽 소파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구석에 찢긴 곳 없이 푹신하게 놓여 있고
소파가 놓인 그 위, 가장 잘 보이는 벽면 중앙에
묵직한 오크나무 틀에 담긴 유화가 반쯤 덜렁이고 있습니다
가족 모습이 담긴 초상화인가봅니다.
초상화 속에는 젊고 강인해 보이는 소한의 아버지와,
우아하고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어머니,
그리고 그들 사이에 선 어린 시절의 소한이 그려져 있네요.
어린 소한은 지금의 무뚝뚝한 표정과는 달리,
아버지의 어깨에 기대어 살포시 웃고 있습니다.
지붕 깨진 틈으로 들어온 눈보라가 초상화 틀 위에 하얗게 쌓여 있어서일까요,
빛바랜 캔버스 속 미소들이 더욱 애잔하게 다가옵니다.






수색중이었어.

음식이나 비품은 내가 어디 있는지 아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떠올려봐.



흥...








그리고 안 쬐끄매!






(슬쩍) 넌 그럼 뭘 먹고 이렇게 컸는데?! 어?!


지금도 질리도록 먹고 있는 거잖아.


(손가락질하며) 너... 진짜 그 키에서 딱 기다려.
난 아직 22살이니까 가망이 있거든?








아니, 그리고 안 작다고!




아, 네가 힘들면 다른 집에서 자도 상관없어.


소한은 홍심석을 건네받자마자 주방 구석에 위치한
육중한 주물 보일러 앞으로 향합니다.
거실과 2층 침실로 이어지는 구리 배관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시작점입니다.
소한은 어디선가 찾은 황동 렌치를 배관 밸브에 끼우고
온 힘을 다해 돌립니다.
'끼이익—!'
비명을 지르던 밸브가 열리자, 그는 미리 눈을 녹여 준비해둔 물을
보일러 탱크 안으로 콸콸 들이붓습니다.
그리고는 보일러 하단의 연소실을 열고,
그 정중앙에 붉게 빛나는 홍심석을 안착시킵니다.
정교한 급수 밸브가 소한의 손을 따라 몇 바퀴 돌아가더니
차가운 물방울이 뜨거운 돌 표면 위로 '치익—' 소리를 내며 한 방울씩 떨어집니다.
순간적으로 발생한 고압의 증기가 텅 빈 배관을 타고
실내 모든 파이프를 격렬하게 울립니다.
그리고는 처음에는 기침하듯 털털거리던 파이프들이 이내
'웅—' 하는 낮은 진동음을 내며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고동치기 시작하네요.
그와 동시에, 구리 배관에서 따뜻한 김이 오르기 시작합니다.
싸늘하던 실내인지라 그 김이 무척 뽀얗게 보입니다.


어떻게 한 거야?

뭐긴 뭐야. 증기 기관에 들어가는 거랑 똑같은 식이지.
물 한 방울씩 떨어뜨려서 가열시키고, 그 증기를 파이프 내부에 돌게 하는 방식이야.

무슨 판타지 세계관에 온 것 같네.
아, 괴물이 있는 마당에 그렇게까지 이상한 건 아닌가...




때묻지 않게 순수한 거라고 해줄래?

순진하다고는 해줄게.













그럼 나 집 나갈래.




하아... (손가락으로 숫자를 표현하며) 첫째, 난 쬐끄만 게 아니야.
둘째, 난 바보도 아니야!
취소해!

사실 진짜 바보라고도 진짜 작다고도 생각 안 했어.

구라 치지 마.






아, 나 필요한 거 생각났어.


네가 나한테 줬던 까만 음료 말야.



의외네, 술을 더 달라고 할 줄 알았더니.

나도 눈치는 있거든?




... ...



...나도?

예의도 아니고.


(딱히 아쉽진 않고 기회로 보며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한다) 그러면...! 흠흠... 어쩔 수 없네!
(팔짱을 낀 채 어깨를 으쓱으쓱거린다) 내가 불쌍한 소한 대신 많이 마셔줘야지!




먼저 제안했잖아.



그래, 마시다가 죽지만 마라.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세 가족이 각자의 공간을
누렸을 넓은 복도가 나타납니다.
지붕이 무너진 탓인지 문틈새로 비치는 커다란 침실은 반쯤 잔해로
주저앉아 있고, 그나마 구석의 방은 멀쩡한 모양새네요.
복도 끝, 소한의 방은 조금 물건이 많기는 해도
적당히 깔끔한 모양새입니다.
창문 너머로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은백색의 설원과,
저 멀리 멈춰버린 공장 굴뚝들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책장은 책 대신 반쯤 전시대처럼 각종 모형 기차와 태엽 장치들이 늘어서 있네요.
책상 위에는 십자 드라이버와 일자 드라이버가 널려 있고,
무슨 용도인지 모를 설계도면도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차갑게 꽝꽝 얼어붙은 머핀이 접시 위에 놓여 있네요.
한 입 먹다 만 것입니다.
정말 이걸 그대로 두고 가야 할 정도로
급박했던 상황이었나보군요.
옷장은 사이가 활짝 열려 있고, 서랍장도 드문드문 그런 모양새입니다.
파이프를 타고 도는 열기가 슬며시 실내를 채우자
창문은 조금씩 물기가 맺히며 축축해지고 있습니다.
생활감 가득하면서도 급박했던 흔적을 보자, 기분이 무척이나 묘합니다.


(침대가 얼마나 푹신한 건지 통통- 튀며) 침대 엄청 좋다. 이런 침대에서 잤던 거야?

창고에 이불이랑 예전 옷 있을 거야. 가져다줄 테니까 누워서 쉬든가 해.



소한이 방을 나서자, 삐걱거리는 문소리와 함께
혹한의 겨울을 잠시 잊게하는 열기만 방 안에 감돕니다.
증기열에 머핀 표면의 성에가 녹아내려 눈물처럼 뚝뚝 떨어지는 모습이
멀찍이 보이며 가슴 한구석이 어쩐지 묘해지네요.

... (멍 때리고 천장을 바라보며 팔을 양옆으로 뻗은 채 위아래로 휘적휘적한다.) 여긴 시트도 엄청 부드럽네... 부자들은 다 이런 곳에서 자는구나.
귀여워
당신은 침대의 푹신함에 몸을 맡깁니다.
그동안의 노숙 동안 딱딱한 얼음 바닥과 한기에 절여졌던 몸이
비로소 주인을 만난 가구처럼 편안하게 가라앉습니다.
방 안은 이제 제법 훈훈합니다.
당신의 코끝에는 오래된 종이 냄새와
소한의 몸에서 가끔씩 풍기던 옅은 바닷소금 냄새,
그리고 보일러가 돌아가며 내뿜는 쇠 냄새가 섞여 들어옵니다.
슬슬 더워지네요.

휴- 이제 살 것 같네. 딱 좋다. (마저 팔을 휘적휘적거린다)
방 안의 열기가 후끈하게 달아오르자, 당신은 무거운 겉옷들을 허물 벗듯 벗어 던집니다.
얇은 옷차림으로 푹신한 침대에 몸을 파묻고 있자니,
이곳이 지독한 빙하기의 한복판이라는 사실조차 아득한 꿈처럼 느껴지네요.
그렇게 얼마나 그 푹신함과 따뜻함에 취해 있었을까요,
방문이 열리며 소한이 양팔 가득 무언가를 안고 들어옵니다.
차가운 바깥 공기를 묻혀온 그가 방 안의 후끈한 열기와 당신의 가벼운 옷차림을 마주하자,
입구에서 잠시 굳어버립니다.
그의 품에는 창고 깊숙한 곳에서 방금 꺼내온 듯한 두툼한 거위털 이불과
보들보들한 양모 담요, 그리고 보기만 해도 포근해 보이는 캐시미어 스웨터가 들려 있네요.





(기분 한 번 엄청 묘하네...)

(휘적휘적)


왜?
손님이 이러고 있어서?


(흘긋) 그거 입으라고?



이렇게 입고도 안 춥겠어?

난 열이 많잖아. 원래도 추운 지방에서 살았고.
(별 생각없이 툭) 여기서 갈아입는다?


너도 갈아입지 그래?

(다 입으니까 조금 쌀쌀한데... 얘는 괜찮은 건가. 슬쩍 바라보다가 옆에 나란히 눕는다) 너 진짜 추위 안 탄다.

넌 추워?


(사심을 담아 양모 담요를 먼저 올리고 그 위에 거위털 이불을 덮어준다) 따뜻한 걸 겹쳐서 덮으면 두 배로 따뜻해진다는 말씀이야.


그...렇지?


(갸웃) 상처 때문에 그런가?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다가 상처 때문이냐는 네 말에, 그대로 납득한다) ...그런가본데.

(한숨) 그러니까 내가 나을 때까진 최대한 조심하고 무리하지 말라고 했잖아...
(네 목을 빤히 살피고는) 상처가 벌어진 건 아닌 것 같은데...


여기서 계속 요양할 수도 없는데... 어떻게 해야 면역을 회복할 수 있으려나?
넌 알아?


...?
(미간을 찌푸리며) 너 괜찮아?


다시 열 오른 거 아냐?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조금 올라가서 너와 눈높이를 맞추고 이마를 맞대며) 어디 한 번 봐봐.
흠... 열은 딱히 없는 것 같은데.



(눈동자가 제 의지와 없이 굴러가 속눈썹 음영진 눈과 코끝, 입술까지 닿더니 귀끝까지 훅 붉어진다)
(내가 왜 이러지? 왜 이러는 거야? 고작 이 녀석 귀엽다고 이러는 건가? 아니 아무리 귀여운 걸 봐도 이 정도였던 적은 없는데. 진짜로 머리가 잘못됐나. 라비 말이 맞았나? 혼란스럽다)

물수건이라도 갖다줘?


열이 없는 건 확실한데 왜 그러지? 이불을 너무 덮었나?










벗으면 안 돼?






그럼 옷 벗을게. (꾸물꾸물)






(눈을 감으며) 먼저 일어나면 깨워줘.

당신은 따끈하고 포근한 침대에 파묻혀
작게 가르랑소리를 내다가 숨소리를 낮춥니다.
이런 좋은 침대에서 잠을 잤다니,
본인은 부정하지만 도련님은 도련님입니다.
하암- 작은 하품이 입가를 비집고 나오고
노곤노곤한 졸음이 코끝을 자욱하게 메웁니다.
한숨 자고 일어나서 저녁 먹자고 하면
딱 맞겠네요.
당신은 아무런 경계심 없이
달콤한 꿈나라 열차에 몸을 맡깁니다.
.
.
.
한편... 라비헨이 그렇게 잠에 든 이후
소한은 감고 있던 눈꺼풀을 다시 들어올려
한참이나 천장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다가
몸을 뒤척거립니다.
몸이 이상하긴 제대로 이상한 모양이죠.
아니면 라비헨의 말도 안 되는 말마따나
머리에 이상이라도 생긴 거든가...
그럴 가능성이 적다고는 하나 배제할 수 없긴 하지요.
이 가혹한 빙하기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으니까요.
소한은 일단 잡생각은 뒤로 밀어두기로 마음 먹고
곱게 잠든 라비헨을 슬쩍 보다가 손을 뻗어
창가 근처의 커텐을 치고는, 다시 눈을 감습니다.
몸이 이상할 땐 휴식을 취하는 게 답이니까요.
.
.
.
그렇게 얼마나 선잠을 잤을까요.
소한은 따뜻하게 엉겨드는 말랑한 체온에 감싸여
손끝을 잘게 떨다가 눈꺼풀을 들어올립니다.
그리고 한 박자 뒤늦게 눈치챕니다.
...라비헨의 잠버릇은 고약했다는걸.
속옷까지 벗은 채로 엉겨든 라비헨을 보고 있자니
뭐, 다른 생각보다 '애새끼는 애새끼다'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찾아옵니다.
귀엽든 말든, 자세가 불편한 건 불편한 거죠.
소한은 잠시 라비헨을 정자세로 편하게 돌리려
몸을 일으키려다가 멈칫합니다.
가만히 몸 옆에 내려둔 손등에서 느껴지는
이 따뜻하고 물컹하고 무른 것은 대체...
이게... 이게 뭐야?!
부정하고 싶지만 이런 건 어떻게
눈치가 이리도 빨라지는지 모를 일입니다.
진정했던 심장이 덜그럭거리며 이상 신호를 보이고
민망하기 짝이 없어 얼굴이 화끈 달아오릅니다.
미친 새끼...! 지금 뭘 몸에 비비고 있는 거야!
와중에 묘한 분위기 속에서 막 깨어난 몸은
건강함을 자랑하듯 반쯤 일어서 있군요.
하아...
X발, 쌓였었나.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잡생각은 그만 하고 저녁이나 차려야겠군요.
일어나면 라비헨에게 한소리 하긴 해야겠습니다.
.
.
.
그리고... 한참이나 쿨쿨 잠에 취해 있던 라비헨.
당신은 곰돌이가 되어 숲에서 꿀단지를 푹 찍어먹는
아주 평화로운 꿈을 꾸다가 잠에서 깹니다.

소한은 아직 자는 건가? (힐끔)
옆자리를 돌아보면 침대는 텅 비어 있습니다.
굳이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아래층에서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납니다.
아무래도 식사 준비중이 아닐까 싶네요.

옷을 차곡차곡 입고 계단을 내려가
거실을 넘어 빙 둘러 주방으로 향하면
소한이 가볍게 달큰한 팬케이크를 굽고 있습니다.
앞치마까지 두른 모습이 묘하게...
본격적이고 웃깁니다.
확실히 본인 집이 편하긴 제일 편한가보군요.







(뒷통수를 긁적이며) 네가 옷 벗어야 면역 회복에 좋다며.
일부러 비비려던 건 아냐.

하아... 그건 그렇겠지.
(자꾸 그 촉감이 생각나서 미치겠다)


(잠깐, 근데 나는 왜 불쾌하지 않았지?)
(빤히 너를 내려다보다가 여전히 애새끼 같은 얼굴에 납득한다. 흠. 강아지가 발정기 온 기분이어서 그랬던 건가. 그럼 말이 되지)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뭐라고 하려던 건 아니고, 쌓였으면 알아서 처리하고 오라고 하려고 했지. 아님 말고.





... ... '쟤도 근데 쌓일 수 있나? 24시간 내내 표정이 안 바뀌니깐 고자일지도 몰라.'


너 제대로 기능은 하는 거야?
거시기 말이야.





내 말이 틀려?

나도 딱히 생각난 적도 없고.
(심플-) 제대로 기능하면 다행이고.

네 거시기나 챙겨.





빨리 코코아나 줘.


(코코아를 두 손으로 받으며) 여기 주인님은 너고.




흠... 신기하게 생겼네.




음?
(한 번, 두 번 입 안에서 굴리다가 엄청난 자극을 받은 것처럼 상체를 꼿꼿하게 세운다. 잠깐 멈추는가 싶더니 안에서 잘게 잘라먹는 듯 씹는 속도가 빨라진다) ... 신기하다, 이거!












먹을 거야.





너 마셔.

원래 네 건데.

...달아.






















당근전이 별로면, 생선포 구워줄게.




신기한 거 말고.


바다 처음 본다는데, 다 얼어붙은 걸 보여주게 돼서 기분이 묘하네.
(상념이 사라졌기 때문인지, 자조 때문인지 말이 괜히 길어진다) 내가 기억하는 모습은 이제 어디서도 볼 수 없겠지.

그래도 너는 제대로 기억하고 있잖아. 못 보더라도 말야.



적도로 간다는 건 고향에 죽어도 못 돌아간다는 뜻도 되는데, 그쪽으로는 생각 해봤어?

동생이 적도로 가자고 말한 순간부터 지금까지도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기 두렵다는 생각뿐이라서.


(씁쓸하게 웃으며) 네 말대로 적도로 가면 다시는 고향에 갈 엄두도 못 내겠지. 그래도 괜찮아. 고향으로 돌아간다 해도 내가 뭘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거긴 많이 추우니까... 썩을 일은 없겠지. 그건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래도 만약 만든다고 하면, 네가 첫 탑승객 해.

고민해본다는 건 뭐야? 좋아하고 만들고 싶다며.
아니면 적도에서 뭐 하려고?

만들고 싶어도 인력이나 자원 문제 때문에 현실적으로 힘들지.
내가 기차 못 만들겠다 싶으면 네가 나 끼워서 양조장 차려.

차라리 나한테 기차 만드는 인력이 되어달라고 하는 게 낫지.
너, 괜히 나랑 동업했다가 양조장에서 술 숙성되기도 전에 다 마셔버리면 어떡하게?

네가 다 마시면 뭐... 어쩔 수 있나. 다시 숙성시키든가 다음부터는 배럴을 늘리든가 해야지.




너 때문에 내가 이상해지잖아. 바보야.

거 참 특이하네...


지금도 세.
걱정하지 마.




네가 이상해지는 거.

네 뜻대로 맞춰져서?









네가 자꾸 열받게 말해서 그랬던 거지.

네가 찔린 게 내 탓은 아니라고.

또 작다거나 바보라고 하면 진짜로 엉덩이를 차버릴 거야.








그 사람도 너랑 같은 의견을 내면 그땐 나도 인정할게.






너 진짜 제정신인 거 확실해?

난 지금 누구보다도 이성적이야.








그냥 포기해. 받아들여.

나중에는 귀엽다고 무슨 소동물처럼 뽀뽀까지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슬쩍 머리를 가리며) 쓰다듬으면 소리지를 거야.




너 좀 변태 같아.

재밌을 것 같았는데.
툭하면 변태 타령이네.

(조금 소름끼친 듯 바르르 떨며) 툭하면 귀엽다느니, 소리지르라니 하잖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쓰다듬기까지 하고.

그리고 반응이 재밌는데. 이 개같은 환경에서는 재밌는 게 드물다고.









(머리를 휙 옆으로 피한다) 쓰다듬는 시간 끝났어.


당신은 툴툴거리면서도 소한과 함께 천천히 식사를 끝냅니다.
적당히 채워진 배에서부터 노곤함이 파도처럼 밀려오네요.
증기 보일러가 내뿜는 규칙적인 진동음과 든든하게 채워진 뱃속,
그리고 방금까지 머리칼을 스쳤던 큰 손의 잔열이 합쳐져
당신의 의식을 몽글몽글하게 흐트러뜨립니다.
방금 막 자고 일어났는데 몸이 피곤했던 걸지도.
당신이 거실 소파에 털썩 앉아 쉬려고 하면
소한은 당신의 안줏거리를 준비하는지
달큰짭짤한 생선포 구워지는 냄새가
슬며시 퍼져 나옵니다.

이곳이 멈춰버린 유령 도시의 폐허라는 사실도,
밖에는 영하 30도의 눈보라가 치고 있다는 사실도 아득한 옛날이야기 같습니다.
따뜻한 증기열에 몸이 노곤하게 녹아내릴 때쯤,
주방 쪽에서 들려오던 지글거리는 소리가 천천히 멈춥니다.
이내 거실의 고요를 깨고 다가오는 소한의 발소리와 함께,
후각을 강렬하게 자극하는 냄새가 훅 끼쳐 옵니다.
소한이 직접 말려두었던 산천어 포가 불길에 한 번 더 구워져 바삭한 질감을 뽐내고,
기름기가 배어 나와 반짝이는 표면 위로 소금이 결정처럼 맺혀 있어,
보기만 해도 입안에 침이 고입니다.
큼직한 머그잔 속에는 투명한 보드카가 따뜻한 물에 희석되어
모락모락 김을 내뿜고 있습니다.
그 위로는 말린 사과 조각이 동동 떠 있고,
과일 잼 일부가 안에서 뭉근하게 가라앉아 있네요.
알코올의 톡 쏘는 향 끝에 달콤하고 상큼한 과일 향이 기분 좋게 감돕니다.






어쨌든! 잘 마실게. (머그잔을 두 손으로 들어올려 짧게 들이킨다)
따뜻한 머그잔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집니다.
조심스럽게 한 모금 들이키자, 보드카의 알싸한 열기가 먼저 혀를 스치고
곧이어 뭉근하게 가라앉아 있던 과일 잼의 진득한 달콤함이
입안 전체를 부드럽게 감싸 안습니다.
설탕에 절여진 사과의 산미와 보드카의 묵직한 베이스가 어우러져,
마치 겨울철 축제에서 마시는 펀치 같은 느낌이 나네요.
희석된 술기운은 혈관을 따라 천천히 퍼지며, 어깨 근육을 노른자처럼 말랑하게 풀어줍니다.



몸이 좀 뜨끈뜨끈하긴 해.


더 줘.



소한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빈 머그잔을 들고 주방으로 향합니다.
소한은 대꾸 대신 냄비에 물을 붓는 소리로 답합니다.
주방에서 보드카 병의 뚜껑이 열리는 '톡' 소리와 함께,
잼을 뜨는 숟가락이 머그잔 안쪽을 긁는 맑은 금속음이 들려옵니다.
당신은 소한의 조언대로 바삭하게 구워진 생선포 한 점을 집어 듭니다.
짭조름한 소금기가 혀끝을 자극하자,
조금 전 마셨던 과일 술의 달콤함이 더욱 강렬한 잔상으로 남네요.
도수가 높다는 말은 정말이었는지, 확실히 몸이 평소보다 조금 따뜻하고
소파의 천이 피부에 닿는 느낌이 간질간질해진 느낌이 듭니다.


(머그잔을 받으며) 입에 물고 있지 뭐.
근데 넌 안 마셔?


아쉽다. 같이 마시면 좋았을텐데.
역시 불쌍한 소한의 몫까지 내가 마셔주는 수밖에. (꿀꺽)


마침 난 마시고 싶고, 넌 술을 좋아하지만 환자니까 못 마시는 아쉬움을 내가 대신 채워주는 거라고.




제한이 있었어?!

이 술꾼아.

그냥...! 기분 좋을 정도로만 마시는 거라고.


천천히... 조금씩!




자꾸 화상이라 하잖아.


진짜 조금만.






첫 파트너는 이 마을에서 같이 살던 친구였고... 그럼 다른 파트너 만나기까지, 그리고 나를 만나기까지 혼자 다녔을 땐 어떻게 살아남은 거야?
추울 때는 어떻게 하고.
너 생각보다 추위 잘 타는 것 같던데.




그런 패널티가 아니라면 쭉 혼자 다녔을 것 같아서.
딱히 내 도움은 필요해보이지도 않고.


외롭다고?


화상을 데리고 다닐 정도로?








다 너보다 작았을 거 아냐.



겉보기에도 외모가 동그랗고?

칭찬이야, 욕이야? 슬슬 열받는데.






아, 너랑 얘기하다 또 다 마셔버렸네...


(끄덕) 시원하고 깔끔한 걸로.

그래. (다시금 머그잔을 들고 주방으로 사라진다)

소한 특유의 삐딱하고 무뚝뚝한 화법이지만
뭐, 그 나름대로 무게감을 가지기는 한 모양입니다.
잠시 생선포를 우물거리고 있으면 소한은 다시 나타나
당신에게 차게 식은 잔을 내밉니다.
유리창 밖의 깨끗한 눈을 퍼담아 급속으로 얼렸는지
잔 표면에 차가운 물방울이 실시간으로 도르르 맺힙니다.
잔을 받아들어 들여다보면 투명한 얼음 알갱이들이 잘게 부셔져 있고,
그 사이로 투명한 보드카와 레몬즙 향기가 납니다.
깔끔하게 달라고 했더니 아주 얼어붙도록 줬네요.





한 달 내내 계속 꼭 붙어 다녔잖아.

그냥... 오늘 같이 배부르고 등 따시게 보내는 날은 드물잖아.

아니면 미래 계획이나.
너 나중에 적도 가면 결혼은 할 거야?

적도 가서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있긴 할까.
살은 사람 보기도 힘든데.

(별 감흥 안 드는 것 같으면서도 뭔가... 속이 답답한데. 실내 온도가 높아서 그런가)

너는? 결혼하고 싶어?

독거 노인이 되는 건 사양이거든.

만약 적도에 가서도 생존자도 못 찾으면 늙어 죽을 때까지 이웃 해줄게.



하여튼 실없긴.

하여튼 재미없긴.



그럼 너도 내 예상 밖의 무언가를 해야지. 다 뻔하니까 시큰둥하게 되잖아.



(술을 반쯤 들이키고는 입맛을 다시더니) 흠... '뭐 어떻게 치라는 거지?'
'슬슬 졸리네...덥고. 좀 취했나?' (잔을 잠시 내려놓고 느른하게 눈을 깜빡인다.) '평소랑 반대로 행동하면 장난에 넘어간다는 건가?'
(항상 소한에게 틱틱거렸으니 친근하게 대하면 놀라겠지. 소한의 무릎 위에 뻔뻔하게 머리를 올리고 눕는다) 이런 것도 예상 범위야?


(잠깐 생각하며 눈을 빙그르르 굴리더니 툭-) 쓰다듬을래?
하고 싶었던 거잖아.




넌 계속 귀엽다 하고, 난 아니라고만 하는걸.
(잠시 머뭇거리더니 취기 때문에 솔직하게 입을 연다) ... 그리고 솔직히, 네가 쓰다듬는 건 싫지 않아.


(손을 뻗어 네 뺨을 쓸어내린다) 그럼 이렇게 쓰다듬는 것도 내가 널 귀여워하는 중인 거야?

...근데 나 만지는 건 별로 거리낌 없네, 너.
(뺨에 올라온 네 손에, 제 손바닥을 가볍게 겹친다)
맨날 끌어안고 잔다고, 아무렇지도 않아졌어?

하도 붙어있어서 그런가봐.
온천에서는 벗은 것도 다 봤잖아.

이젠 좀 편해?

...
편해.


내가 웃긴 얘기했어?
왜 웃어?
















(슬쩍) 싫, 진 않지만... 이상하잖아. 이런 거...
친한 친구끼리는 원래 이런 거야?


뽀뽀만 안 하고 친한 친구끼리는 별 걸 다 하는 거구나...
처음 알았어.
도시 사람들은 이렇게 노는 거구나.




난 뽀뽀부터는 사귀거나 결혼한 사이부터 해야 하는 줄 알았어.




그럼 우리는 얼마나 친한 거야?




아직 잘 모르겠어. 어릴 때 가족한테 했을 때를 제외하면 한 번도 안 해봤는걸...

... 지금 해본다고 하면?



그럼 이제 자러 가?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그냥 좀 졸린 거야...
집이 따뜻하니까...





(천천히 네 상체를 들고, 품에 툭 안은 뒤 엉덩이를 받친다)


.
.
.
포근한 거위털 이불의 감촉에 취해 얼마나 깊게 잠들었을까요.
2층 침실의 창문으로 비쳐드는 은백색의 아침 햇살이
당신의 눈꺼풀을 간지럽힙니다.
분명 창밖은 영하의 혹독한 추위겠지만,
밤새 배관을 타고 흐른 홍심석의 온기 덕분에 방 안은 여전히 훈훈합니다.
잠결에 옆을 더듬어보면, 소한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대신 밖에서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소리가 당신의 의식을 꺠우네요.
챙—! 챙—!
끼이이익, 툭.
금속이 부딪히는 맑은 소리와 무언가 깎아내는 소리.
소리는 잡동사니가 바깥까지 비치던
별관 창고쪽에서 들려오는 듯합니다.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28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어제 마신 과일 보드카 덕분인지 몸이 가볍고 개운합니다.
흠흠, 역시 적당한 알코올은 활력에 도움이 되는군요.
겉옷을 대충 걸치고 계단을 내려간 뒤
밖으로 나가 별관 창고 문을 열자,
매캐한 금속 냄새와 기름 향이 확 끼쳐옵니다.
그곳에는 어제 소한이 말했던 '다른 총기'들과 온갖 화약에 더불어
온갖 금속체 부품들이 널려 있습니다.
소한은 핀셋과 드라이버로 무언가를 정교하게 다듬고 있네요.


그러고보니, 넌 총 안 챙겨도 되겠어? 석궁보다는 화력이 좋을 텐데.

그리고 그거, 소리가 너무 커.
한번씩 깜짝깜짝 놀란다고.



뭐, 편한대로 선택해. 그러려고 물어보는 거니까.

그리고 탄환은 제한적이잖아.
탄환 자체도 제법 무겁고.










되도록이면 쓸 일이 평생 없었으면 좋겠네.
네가 갑자기 폭탄을 주니까 잠도 다 달아나버렸잖아.

(덤덤하게 짐을 정리하며, 다시 집으로 들어갈 채비를 한다) 잠깐 씻고 식사한 뒤에, 공장쪽 둘러보고 마저 출발하자.



역시 좀 그렇지? 적도에 가려던 사람은 나고 너는 나한테 맞춰주는 중인데 일정을 연기하자는 건...

내일은 무조건 출발하는 거다, 알았지.



이렇게 넓-은 곳에 있으니까 괴물도 우릴 찾기 어려워할 거고.



(네 손을 자연스럽게 꼭 쥐며) 들어가자.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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