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폐공장
포근한 거위털 이불의 감촉에 취해 얼마나 깊게 잠들었을까요.
2층 침실의 창문으로 비쳐드는 은백색의 아침 햇살이
당신의 눈꺼풀을 간지럽힙니다.
분명 창밖은 영하의 혹독한 추위겠지만,
밤새 배관을 타고 흐른 홍심석의 온기 덕분에 방 안은 여전히 훈훈합니다.
잠결에 옆을 더듬어보면, 소한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대신 밖에서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소리가 당신의 의식을 꺠우네요.
챙—! 챙—!
끼이이익, 툭.
금속이 부딪히는 맑은 소리와 무언가 깎아내는 소리.
소리는 잡동사니가 바깥까지 비치던
별관 창고쪽에서 들려오는 듯합니다.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28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어제 마신 과일 보드카 덕분인지 몸이 가볍고 개운합니다.
흠흠, 역시 적당한 알코올은 활력에 도움이 되는군요.
겉옷을 대충 걸치고 계단을 내려간 뒤
밖으로 나가 별관 창고 문을 열자,
매캐한 금속 냄새와 기름 향이 확 끼쳐옵니다.
그곳에는 어제 소한이 말했던 '다른 총기'들과 온갖 화약에 더불어
온갖 금속체 부품들이 널려 있습니다.
소한은 핀셋과 드라이버로 무언가를 정교하게 다듬고 있네요.


그러고보니, 넌 총 안 챙겨도 되겠어? 석궁보다는 화력이 좋을 텐데.

그리고 그거, 소리가 너무 커.
한번씩 깜짝깜짝 놀란다고.



뭐, 편한대로 선택해. 그러려고 물어보는 거니까.

그리고 탄환은 제한적이잖아.
탄환 자체도 제법 무겁고.










되도록이면 쓸 일이 평생 없었으면 좋겠네.
네가 갑자기 폭탄을 주니까 잠도 다 달아나버렸잖아.

(덤덤하게 짐을 정리하며, 다시 집으로 들어갈 채비를 한다) 잠깐 씻고 식사한 뒤에, 공장쪽 둘러보고 마저 출발하자.



역시 좀 그렇지? 적도에 가려던 사람은 나고 너는 나한테 맞춰주는 중인데 일정을 연기하자는 건...

내일은 무조건 출발하는 거다, 알았지.



이렇게 넓-은 곳에 있으니까 괴물도 우릴 찾기 어려워할 거고.



(네 손을 자연스럽게 꼭 쥐며) 들어가자. 춥다.

.
.
.
그렇게 하루를 푹 더 쉬고 다음날.
당신은 소한과 함께 묵직한 가방을 챙겨들고 밖을 나섭니다.
품 안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캐시미어 스웨터의 감촉이
미칠 듯 구름 같네요.
방한복도 가볍게 세척을 해서인지
먼지 냄새가 덜하고,
갓 실내에서 빠져나온 몸은 따끈하기만 합니다.
이제는 또 다시 추운 허허벌판으로 들어가야겠지만요.
소한의 걸음은 당신을 마을 중심부로 이끕니다
한때는 증기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지나갔을 대로를 지나자,
곧장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운 공장이 앞에 드러납니다.
공장 지붕 한쪽의 슬레이트는 구겨졌다 할만큼 찌그러져 있고,
철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은 채 바람을 따라 은근히 끽끽거립니다.
소한은 그 철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무표정으로
힘을 주고 열어젖히기 시작합니다.

| 기준치: | 60/30/12 |
| 굴림: | 53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우드득, 끼이이이익—
기름이 말라붙어 비명을 지르는 육중한 철문을 밀어내자
거대하면서도 복잡한 온갖 철제 기계들이
귀신 들린 것처럼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천장의 깨진 슬레이트 사이로 먼지 섞인 창백한 햇살이 내려앉아,
공중에 떠다니는 미세한 철가루들이 보석처럼 반짝이고,
당신의 키보다 몇 배는 더 큰 증기 실린더와 거대한 톱니바퀴들이
마치 화석이 된 거대 괴수의 장기처럼 벽면에 박혀 있습니다.
천장에는 무거운 부품을 옮기던 녹슨 크레인 갈고리들이
유령처럼 매달려 낮게 흔들립니다.








내가 귀신이어도 없던 원한도 다 품겠다!




막...!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뭐가 떨어진다거나... 바람이 안 부는데 나뭇잎이 흔들린다거나...



그리고 공장 부지가 묘지였다는 건 거짓말이야.

...




먼저 가. 너랑 떨어져서 다닐 거야!




너랑 같이 안 다녀!



(자신이라면 저런 말은 진심이 아니고서야 장난으로도 하지 않을 것이라) ...알았어, 라비.
...
그동안 고마웠어. 같이 지내면서 좋았어.

그냥 이렇게 바로 받아들이는 거야?

심각한 말이니까 홧김에 한 건 아닐 거 아냐.

(양심이 꾹꾹 가슴을 찌른다. 나는 홧김에 한 건데...)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었어...


... 미안해, 소한.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시는 함부로 같이 안 다니겠다고 안 할게...

(너무 풀이 죽은 네가 낯설어, 조심스럽게 네 머리를 툭툭 쓰다듬는다. ...와중에 또 귀엽네) 괜찮아. 가자.

...
'나는 뭘 말하고 싶은 거지? 말을 함부로 한 주제에 소한이 같이 다녀달라고 하길 바랐던 건가?' ... 가자.



...내, 부모님이 여기 계셔.


... 가자, 곧바로 출고 예정이었던 증기기관들은 더 안쪽에 있어. 거긴 완제품이라, 뜯으면 홍심석이 남아 있을 거야.

당신은 그저 그의 투박한 손길이 머리칼에 머물다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아무런 위로도 건네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입니다.
...어떤 기분일까요,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하는 게
죽어버린 부모님의 사체도 아닌 것에, 조의를 표하는 일이라니.
당신은 소한을 따라 가장 먼저 은밀하고 깊은 곳에 위치한
최종 출고 대기실로 향합니다.
일반 구역과는 달리 이곳은 이중 철문으로 봉쇄되어 있는 듯하지만
억지로 열린 듯한 모양새가 남아 있습니다.
누군가가 안에서 물건을 챙겨간 흔적인 듯싶네요.



| 기준치: | 60/30/12 |
| 굴림: | 35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 기준치: | 60/30/12 |
| 굴림: | 85 |
| 판정결과: | 실패 |
당신은 복잡하게 얽힌 기계 장치들 사이를 조심스럽게 파고듭니다.
공장의 가장 깊숙한 이 구역은 외부의 냉기가 차단된 탓인지,
아니면 소한의 '남겨진 심장'들이 내뱉는 미열 때문인지
공기가 묘하게 눅눅하고 미지근합니다.
소한은 부모님의 흔적이 남은 이곳에 발을 들인 탓에
평소보다 집중력이 흐트러졌는지 사이를 간간히 헤맵니다.
당신은 무너진 선반 잔해를 치우고 안쪽을 살핍니다.
그곳에는 출고 직전의 상태로 완벽하게 포장된
소형 휴대용 증기 발생기 두 대가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가까이 가는 순간 안에 갖혀 있던 따뜻한 열기가
기분좋게 훅 끼쳐옵니다.

당신이 손을 뻗어 그 부품들을 들어올리면
한참이나 열이 고여 있었다는 듯
부품들은 따끈한 손난로처럼 데워져 있습니다.

찾았어!

작아서 방랑자들이 못 챙겨갔나봐.

순도가 높으면 뭐가 좋아?

원래 것도 순도가 나쁘진 않았지만, 이왕 좋은 거 쓰면 좋지. (품에서 드라이버를 꺼내 곧장 분해를 시작한다)
공장의 어둑한 구석, 소한이 꺼내 든 드라이버 끝에서
작고 정교한 금속 마찰음이 울려 퍼집니다.
그는 마치 잠든 아이를 깨우지 않으려는 것처럼
아주 조심스럽고도 숙련된 손놀림으로 장치의 외피를 벗겨냅니다.
두꺼운 납 합금 케이스가 열리자, 그 안에서 지금까지 보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진홍빛 결정체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마치 살아있는 심장이 뛰듯 은은하게 명멸하는 그 빛은,
주변의 차가운 금속 잔해들을 따스한 오렌지빛으로 물들입니다.
장치가 개방되자 마자, 뺨에 닿는 공기가 뭉근하게 데워집니다.
소한이 이야기한 비유가 단번에 이해될 정도로,
밀도 높고 묵직한 열기입니다.

방한용으로 각자 한 개씩 갖고, 기존에 있던 건 물품 보온에 쓰자. 앞으로는 물 안 데워도 따뜻한 물 마실 수 있겠네.
(새로이 발견한 홍심석을 챙겨온 가죽 주머니에 담아, 네 품에 넣어준다)


...
주변을 다 살폈는데 이것말고 더 남은 건 없을 것 같고...
부탁했던 일, 이제 도와줄래?



당신은 품 안에 든 홍심석의 묵직한 온도를 느끼며
소한을 조용히 따라갑니다.
공장 심부에서 바깥 출입문으로 이어지는 중간쯤.
바깥과 연결된 틈새가 가까워질수록 공기는 더욱 서늘하게 얼어붙습니다.
소한은 말없이 앞장서며, 거대한 기계 장치들이 톱니바퀴를 드러낸
중앙 통로로 당신을 이끕니다.
공장의 가장 거대한 증기 발생기가 위치한 중앙 홀.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당신은 숨을 들이켜며 멈춰 섭니다.
한때 이 공장의 자부심이었을 거대한 엔진실 입구.
두 마리의 얼어붙은 빙식체가 서로를 의식한 채 비스듬히 엎어져
차갑게 굳어 있습니다.
다른 빙식체들과 달리, 이마 중앙에 정확한 총상이 뚫려 있습니다.
혹여나 있을 고통을 최대한 없애기 위해 한번에 숨을 끊으려 했던
누군가의 처절한 배려가 담긴 흔적.
이 두 구의 빙식체 잔해가 누구인지
굳이 듣지 않았더라도, 알 수 있었을 겁니다.
소한은 그들 앞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섭니다.
평소의 무뚝뚝함으로 표정을 가장하지만,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떨리는 것만큼은 막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는 차마 괴물들의 얼굴—
아니, 부모님의 얼굴이었던 곳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 (이제는 소한의 기분을 어느 정도는 파악해서, 슬쩍 손을 잡아준다) 시작할까.

내 부모님을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

지금 당장은 해야 할 일이 있잖아.



| 기준치: | 60/30/12 |
| 굴림: | 37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 기준치: | 55/27/11 |
| 굴림: | 32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그동안 하도 짐을 무겁게 짊어지고 다닌 덕인지
내부가 빈 빙식체의 잔해를 업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네요.
당신은 소한과 함께 그의 부모를 등에 이고서,
그의 걸음을 따라 공장을 가로지릅니다.
공장 내부의 눅눅한 기름 냄새와 정적을 잠시 뒤로하고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영하 30도의 칼바람이 뺨을 사정없이 후려칩니다.
불과 한 시간 전보다 눈발은 훨씬 굵어져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사라진 백색의 지옥 속에서,
오직 두 사람의 어깨에 실린 묵직한 잔해만이 지독한 현실감을 유지해 줍니다.
평소 같으면 이 정도 무게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겠지만,
그동안 험난한 설원을 돌파하며 단련된 근육 덕분인지
발걸음은 의외로 단단합니다.
당신은 소한의 뒤를 따르며,
등에 닿는 차갑고 딱딱한 금속 외피의 감촉을 고스란히 느낍니다.
두 사람은 공장 뒷마당,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작은 언덕 터를 향해
비탈길을 오릅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등에 업힌 빙식체의 빈 껍데기가 기괴한 마찰음을 내며 울리지만
그조차 소한의 부모님이 소한에게 건네는 마지막 인사처럼 느껴집니다.
마침내 도착한 언덕 터에, 차갑게 꽁꽁 얼어붙어가는 잔해를 내려놓으면,
소한은 이럴 줄 알았는지 옆구리에 차고 왔던 접이식 삽을 꺼내
얼어붙은 눈과 흙을 파헤치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소한의 곁에 서서, 그가 부모님의 유해를 정갈하게 내려놓는 것을 돕습니다.
굵은 눈발이 순식간에 사체를 덮어버리려 하지만
두 사람의 유해를 구덩이에 안치할 때만큼은
세상이 잠시 멈춘 듯 고요해집니다.
소한은 언제나 그랬듯, 구덩이 위에 흙을 덮고 난 뒤
근처에서 마른 가지를 주워와 이제는 익숙해진, 투박한 십자가 말뚝을
부모님의 유해를 안치한 그곳에 차례로 꽂습니다.

| 기준치: | 55/27/11 |
| 굴림: | 20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잠시 정적에 싸였다가 다시금 몰아치기 시작한 눈보라 사이로
소한의 눈가가 슬며시 반짝이는 것 같습니다.
과연 그것이 눈물인지, 녹아내린 눈송이인지 만은
분간할 수 없지만,
눈물을 흘리지 않았더라도 무슨 심정일지 추측하는 건
너무도 쉬운 일인지라
당신의 입은 조용히 다물리고 맙니다.


(숨을 들이키고는 네 옆에 같이 꿇고 앉는다. 조용히 눈을 감고 손을 모아 기도한다) '소한의 부모님이 부디 좋은 곳에 가셨기를. 그리고 언젠가 이 지독한 빙하기가 끝나기를. 소한이 감정을 잘 소화해내서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


여기까지 오지 않아도 대충은 예상하고 있었어. 네가 나에게 하는 말들을 종합하면, 이미 소중한 사람을 보낸 게 처음이 아닌 것 같았거든.




네 행동이 잘못된 건 아니라는 걸.




... 그냥, 머리로는 네 행동이 최선의 선택인 걸 알고 있었는데 감정이 해소되질 않았어. 내가 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도 믿고 싶지 않았고... 죽었다는 것조차도. 전부 다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면 그게 전부 내 탓이 될 것 같아서, 원인이 다른 데 있다고 우겼어. 그게 너였고.
그러지 않으면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어, 그때는...

...
내가 가족을 죽인 장본인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자괴감이 끝이 없거든.
그러니까, 내 말은... (하아... 말재주 없는 게 이럴 땐 한탄스럽네) 네 잘못 아니니까, 자책할 필요 없어.
대놓고 죽인 사람 여기 있잖아.

마지막 말은... 이제 안 해도 돼.
파트너끼리 굳이 미워할 이유를 떠올릴 필요는 없잖아.
...소한.
네 잘못이 아니야.
그 누구도 너를 원망할 이유 같은 건... 없다는 말이야.


...
고마워. 라비. 그렇게 말해줘서.


...이제 갈까. 짐 챙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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