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붉은 눈꽃 마을




끝이 보이지 않는 하얀 지평선을 가로지르는 발걸음이
무겁게 눈 속에 파묻힙니다.
어젯밤의 악몽 탓인지 당신의 다리는 천근만근이고,
앞서가는 소한의 등은 평소보다 멀게 느껴집니다.
살을 에던 눈보라가 잦아든 자리에는 기분 나쁜 정적이 내려앉아,
오직 두 사람의 규칙적인 발소리만이 고막을 두드립니다.
무언가 말을 붙여볼까도 싶지만 어젯밤 악몽을 꾼 탓에
무어라 입을 열기가 어렵습니다.
소한은 원래도 말이 많은 타입은 아닌지
고요함만 가득한 설원에서도 입을 여는 법이 잘 없습니다.
게다가 말동무로 삼기에 그닥 좋은 인간도 아니고 말이지요.
라비헨:... (배낭을 고쳐매고 멍하니 소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간다)
당신이 입을 열지 않으니 적막은 계속됩니다.
뽀득뽀득, 살얼음 낀 눈밟는 소리에
귀가 조금 지긋지긋할 지경이네요.
그렇게 얼마나 그를 따라 걸었을까요.
소한이 앞을 바라본 채로 툭 멈춥니다.
당신은 잠시 의아해하며 소한을 따라 앞을 바라봅니다.
라비헨:
Spot Hidden Roll
기준치:55/27/11
굴림:45
판정결과:보통 성공
평범하디 평범한 설원의 풍경일진데
어딘가 울퉁불퉁 지면이 고르지 못합니다.
게다가 전나무는 반쯤 눈 속에 파묻혀 있군요.
소한:마을이네. 오늘은 야영 안 해도 되겠다.
라비헨:싹 다 눈에 파묻혔는데...?
소한:(간단히 대답한다) 파면 되지.
라비헨:... 저걸 다?
소한:다는 아니고 지낼 곳만
다 파면 좋기야 하지. 이런 깡촌 마을은 자급자족을 해서 그대로 얼어죽은 가축이나 식량이 있어.
라비헨:그럼 여기서 한동안 지내겠네.
소한:그래도 길어야 이틀이야. 빙식체는 열원을 끈질기게 쫓아오니까.
(가방에서 삽을 꺼내 손에 고쳐 쥐며) 어디부터 팔까. 골라봐.
작은 집은 따뜻하게 잘 수 있고, 큰 집은 먹을 게 많아.
라비헨:(깜짝) 내가 골라야 해? 그러다 소득이 없으면 어쩌려고.
... 미리 말하는데 난 귀가 밝은 거지, 천리안 같은 건 없어.
소한:아무거나 상관 없으니까 고르라고 하지.
라비헨:그럼... (손가락으로 경사가 진 지면을 가리키며) 저기.
소한:(제법 큰 집이네) 그래. 쉬고 있어. (경사진 지면으로 다가가 삽을 번쩍 들어올리고 바닥을 파기 시작한다)
두꺼운 눈층을 가르는 삽날의 예리한 마찰음이
고요하기 짝이 없는 설원에 울려퍼집니다.
당신은 차가운 바람을 등지고 서서,
눈밭에 완전히 파묻힌 마을을 바라봅니다.
이곳에도 사람이 살았을 텐데.
다들 어디로 갔을까요.
죽은 건지, 아니면 도망친 건지.
알 길은 없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보이면 좋으련만
그런 일은 없겠죠.
이곳은 몸 하나 건사하기도 무척이나 힘든 곳이니까요.
라비헨:(멀뚱...) '혼자 삽도 없이 쟤가 파는 거 기다리려니까 되게 신경쓰이네... 어제 나 때문에 잠도 못 자서 피곤할 것 같은데.'
(멋쩍게 팔을 쓸어내리다가 입을 연다) 그, ... 소, 소한!
소한:(열심히 바닥을 파내려가다가 고개를 든다) 왜?
라비헨:(시선을 피하며) 교대할래...?
내가 어제 잠 못 자게 한 것도 맞고...
계속 땅 파는 건 네가 했잖아.
소한:못 잔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생각보다 힘 많이 들어. 너한테 근육통이라도 생기면 이후에 차질이 생긴다고.
라비헨:(미간을 찌푸리며 궁시렁거린다) 도와준대도 싫대...
소한:(이마에 난 땀방울을 손등으로 훔치며) 도와줄 거면 근처에 과일 나무 있는지 찾아봐. 아마 있을 거야. (다시금 바닥을 파는 일에 집중한다)
라비헨:알았어. '뭐... 지가 교대하기 싫다는데.'
'난 기회를 줬어. 저 녀석이 발로 찬 거라구.' (속으로 궁시렁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라비헨:
Spot Hidden Roll
기준치:55/27/11
굴림:61
판정결과:실패
햇빛 때문에 눈이 부셔서 앞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새침하게 잎을 뾰족하게 세우고 있는 전나무 말고는
별다른 것이 잘 보이지 않네요.
눈살을 찌푸리며 얼마나 주변을 살폈을까,
그때 모양이 뾰족하지 않은 나무 두 그루가 눈에 띕니다.
라비헨:(소한을 뒤로 하고 나무로 척척 다가간다)
당신은 무릎까지 차오른 눈을 헤치며 그 나무들을 향해 다가갑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전나무의 거친 껍질과는 대조적인
매끈하고 짙은 갈색의 수피가 선명해집니다.
한 그루눈 가지 끝에 마른 잎사귀 대신,
검게 말라 비틀어진 작은 열매 몇 알이 기적처럼 달려 있습니다.
라비헨:
Natural World Roll
기준치:60/30/12
굴림:33
판정결과:보통 성공
빙하기가 덮치던 가을에 미처 다 떨어지지 못한
양벚나무의 체리인 듯 싶습니다.
마르긴 했지만, 얼어 있어서
조리하면 먹을 수 있겠네요.
그 옆에 있는 또 다른 나무는 제법 굵직한 몸통을 가진 모양새가
영락없는 사과 나무입니다.
잎 하나 없이 앙상하지만,
마찬가지로 사과 몇 알이 떨어지지 못한 채 매달려 있습니다.
라비헨:(안색이 순식간에 밝아지며 입을 벌린다) 과일나무다!
소한:(바닥을 허리춤까지 파다가 고개를 들며) 찾았어?
라비헨:(큰 소리로) 찾았어! 체리랑 사과나무야!
소한:잘했네. 아마 바닥에 낙과도 있을 거야. 여기부터 파고 그쪽도 파면 되겠다.
라비헨:흠... '쟤 엄청 바빠 보이는데 어쩌면 파이프로 바닥 정도는 파헤칠 수 있지 않을까?'
라비헨:
근력
기준치:55/27/11
굴림:20
판정결과:어려운 성공
당신은 가방에서 파이프를 꺼내 엉성하게
바닥을 내리찧기 시작합니다.
위는 쌓이지 얼마 되지 않은 눈이라서인지
손쉽게 푹푹 파지네요.
...사실 '헤쳐낸다'에 조금 더 가깝지만.
그렇게 계속 정신없이 파고,
옆으로 쏟아지는 눈은 손으로 대충 밀어가며 파다보면,
눈 속 중앙에 박혀 있는 사과알 한 개가 보입니다.
떨어지다가 막혔나 보네요.
라비헨:(숨이 차서 입김을 조금 내보내다가 파이프를 옆에 두고 손으로 조심스럽게 파헤친다)
눈 속에 파묻혀 있던 사과는 꽝꽝 얼어있지만
수확의 시기였음을 증명하듯 새빨갛게 익어 있습니다.
당신이 조심스럽게 둘레를 파서 밖으로 꺼내면
햇살을 받아 붉은 윤곽이 반짝입니다.
고생은 좀 했지만, 수확이 있으니 기분이 좋아지네요.
라비헨:(뿌듯하게 웃으며 조금이라도 빨리 녹길 바라는 마음에 주섬주섬 품에 넣는다) 또 있으려나?
당신은 신이 나서 계속 파이프로 아래를 파헤쳐 내려갑니다.
그러나 이 아래는 쌓인 지 오래된 눈인지
파이프로 긁어내도 흠집이 날 뿐,
잘 파이지는 않네요.
아무래도 정말로 삽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라비헨:헥... 힘들어...
당신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파이프를 아래로 내리고
숨을 고르고 있으면 옆에서는
꽝꽝 언 설면을 파는 소리가 들립니다.
소한은 아무래도 바닥을 계속 파고 있는 모양이네요.
당신이 바닥 파기를 포기라고 위로 다시 올라와
그나마 나무에 달려 있던 과일을 따고 주변을 바라보면
과일 나무는 더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긴, 작은 마을이니 큰 과일나무 두 그루면
주민들이 나눠먹을 정도였겠지요.
손으로 곱게 따낸 과일들을 품에 안고
하나씩 겉면을 장갑으로 문질러 닦고 있으면
어느새 소한은 구덩이 아래로 길게 사라진 후입니다.
라비헨:북극 여우인가...? 땅을 어디까지 파는 거야?
소한:(땀을 흘리며 파다가, 드디어 지면에 닿아 크게 너를 부른다) 라비! 내려와.
라비헨:또 라비라고 부르네... (중얼거리며 소한이 판 구덩이로 향한다)
당신이 터벅터벅 다가가 구덩이 아래를 내려다보면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 있는 구덩이가 보입니다.
...
어떻게 내려가죠?
내려가다가 다리 하나 부러지는 거 아니야?
라비헨:'점프했다가는 다리 접지르겠는데.' 야... 소한.
이건 너무 깊잖아!
소한:...
뛰어내려. 받아줄게.
아, 옆에 있는 배낭부터 먼저.
라비헨:(찌풀-) 받아준다고? '좀 그런데.' 나 꽤 무거워.
소한:그래, 빨리 던져.
라비헨:에휴... '쟤가 내 말 얌전히 들은 적이 없긴 했지...' (배낭을 하나씩 차례로 내려준다)
소한:(아래로 떨어지는 배낭을 하나씩 받아 구석에 차곡차곡 놓는다)
(그리고는 다시금 위를 바라보며) 이제 뛰어.
라비헨:(머뭇거리며 영 믿지 못하는 눈치다) 진짜 이 방법밖에 없는 거야?
소한:걱정은. 깔려도 내가 깔리지.
라비헨:으... 그것도 싫어.
어쩔 수 없지. 못 받기만 해봐.
소한:(말을 안 하고 팔을 앞쪽으로 뻗은 채, 빨리 뛰어내리라고 위 아래로 흔든다)
라비헨:'진짜 별 경험을 다 하네...' (망설이다가 눈을 질끈 감고 뛰어내린다)
소한:
근력
기준치:60/30/12
굴림:7
판정결과:극단적 성공
빠르게 구덩이의 눈벽이 스쳐지나갑니다.
당신은 눈을 질끈 감고 제발, 제발 속으로 기도하며
빠르게 추락합니다.
탁,
단단한 몸이 바닥으로 뛰어든 당신을 가볍게 안아 받칩니다.
당신은 소한의 품에 안긴 채로 조심스럽게 눈을 뜹니다.
바로 지척에서 소한의 규칙적이고 낮은 숨소리가 들려옵니다.
방금 전까지 눈더미를 파헤치느라 달궈진 그의 체온이
두터운 방한복을 건너고도 당신의 가슴팍으로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당신의 팔은 어느새 본능적으로 그의 어깨를 붙잡고 있고
엉덩이 아래로 들어온 손이 당신을 지탱합니다.
소한:(조심스럽게 너를 바닥에 내려주며) 자.
라비헨:(뻣뻣-) ㄱ, 고마워. '자세 한 번 민망해 죽겠네...'
당신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고개를 돌리지만,
손끝에 남은 그의 외투 감촉과 묘한 체온이 좀처럼 가시지 않습니다.
좁은 눈 구덩이 안, 소한은 이미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천히 건물 옆벽에 난 창문을 바라보다가,
힘을 주어 창틀이 부서져라 열어 젖힙니다.
사람이 족히 들어갈 수 있을 법한 크기입니다.
소한이 먼저 그 안에 들어가고 당신이 가방을 건넨 뒤 따라 들어가면
안은 실내임에도 외부와 다름없이 차갑게 얼어붙어 있고
축사로 사용되던 모양인지 건초가 든 여물통이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내부에 그대로 꽝꽝 얼어붙은 돼지 두 마리가 쓰러져 있네요.
축사 안쪽에 난 문을 바라보면 바로 생활 공간과 연결되는지
문 바로 옆에 축사 청소 도구들이 걸려 있습니다.
소한:(배낭을 들어올리고, 꽝꽝 언 돼지 한 마리도 들어올리며) 해동하면 내일쯤엔 먹을 수 있겠네.
라비헨:그러게. 뭐라도 있어서 다행이네.
...근데 너, 안 무거워?
소한:무거워. (그렇게 말하고는 터벅터벅 걸어가 문이나 연다)
라비헨:(이새끼 진짜 뭐지?) 너 뭐, 혹시 초능력자라도 돼?
소한:들어오기나 해. 춥다. 쉬고 싶어.
라비헨:(민폐는 되기 싫어서 쪼르르 뒤따라간다) ...그래.
당신은 어정쩡하게 소한을 따라 실내로 들어갑니다.
먼지 냄새와 함께 오랫동안 고여 있던 서늘한 공기가 당신을 맞이합니다.
소한이 짊어진 꽝꽝 얼어붙은 돼지 사체와 묵직한 배낭 때문인지,
그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오래된 목재 바닥이
'삐걱'거리며 묵직한 소리를 냅니다.
축사를 지나 들어선 집 안은 밖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널찍하고
기품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창밖까지 눈이 두텁게 쌓여 어둠에 잠긴 실내지만
어느 정도는 앞을 볼 수 있습니다.
중앙에는 커다란 돌 벽난로가 자리하고 있고
거실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방으로 이어지는 문들이 보입니다.
소한은 잠시 침침한 내부를 둘러보다가
벽난로를 발견하고는, 자연스럽게 옆에 있던 장작을 끌어오고
당신에게 손을 내밉니다.
뭘 달라고 하는 건지 뻔하네요.
라비헨:(품에 있던 홍심석을 건네준다) 자.
소한:(무뚝뚝하게 건네 받아 벽난로 안에 불을 지핀다)
고개를 돌려 내부를 조금 더 살피고 있으면
벽난로에서는 곧 타닥 소리를 내며
불꽃이 살아납니다.
차갑게 식어 있던 거실에 주홍빛 온기가 천천히 퍼집니다.
이제야 내부를 조금 더 편하게 확인해볼 수 있겠네요.
소한:(실내를 둘러보다가 벽면에 꽂힌 양초 하나를 손에 들고 불을 붙인다) 살펴보자. 건질 게 있나 봐야지.
라비헨:(끄덕) '흩어져서 살피자는 거겠지?' 난 오른쪽을 살펴볼게.
소한:그래, 그럼 난 왼쪽. (불 붙인 양초를 촛대에 꽂고 네 손에 들려주고 다른 양초를 찾아와 다시 불을 붙인다)
라비헨:전부 다 살피고 나면 여기서 모이는 걸로 하자.
소한:그래. (저도 양초를 촛대에 꽂고는 몸을 일으킨다)
라비헨:(양초를 들고 오른쪽에 있는 방들을 살피러 간다)
소한에게서 넘겨받은 촛대의 불꽃이 일렁이며 당신의 발치를 비춥니다.
벽난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온기가 등 뒤를 따스하게 밀어주지만,
복도 깊숙한 곳에서 밀려오는 고요는 여전히 서늘하군요.
당신은 소한과 반대 방향인 오른쪽 구획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깁니다.
낡은 목재 바닥이 당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기분 나쁜 비명을 내지르지만,
당신은 예민한 귀를 쫑긋 세우며 조심스럽게
첫 번째 방의 문고리를 잡습니다.
첫 번째 방은 침실 겸 옷 방입니다.
큼지막한 침대와 고풍스러운 옷장이 놓여 있고,
주인이 황급히 떠난 듯 침대 시트는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네요.
화장대 위에는 주인을 잃은 빗과 빈 향수병들이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놓여 있습니다.
라비헨:'축사가 있을 때부터 대충 예상했지만 집주인이 꽤나 부유한 사람이었나 보네.' (옷장을 열어 쓸만한 물건이 있는지 살펴본다)
옷장을 열어 안을 살펴보면...
라비헨:
Scavenge Roll
기준치:60/30/12
굴림:46
판정결과:보통 성공
안에는 주인 내외가 챙기지 못한 듯한
여러 장갑과 모피 목도리가 남아 있습니다.
사계절이 있음직한 위치인지라
혹한의 추위인 이곳에서 쓸만한 것은
두꺼운 가죽 장갑 한 켤레와 목도리뿐이네요.
양털로 짠 듯한 담요도 하나 놓여 있지만
모포보다는 덜 따뜻할 것 같습니다.
라비헨:(당장 들고 다닐 가방도 없으니 쓸만한 것을 대충 몸에 두른다. 폭닥폭닥한 느낌이 좋아서 목도리를 만지작거린다) 와- 되게 부드럽다...
여긴 다 살펴본 것 같고 나가볼ㄲ... ... (양털로 짠 담요와 침대를 번갈아 본다)
(슬쩍) ...챙기진 못하겠지만 덮고 눕는 것쯤은 괜찮지 않을까? 양털 담요 느낌 엄청 좋던데.
진짜 잠깐만... 1분만 덮고 누워보자. (양털 담요를 꺼내, 고향에서는 꿈도 못 꿨을 푹신하고 고급진 침대 위에 풀썩 드러누워 덮어본다)
당신이 몸을 눕히자 침대는 당신의 체중에 맞추어
아주 부드럽게 아래로 푹 꺼집니다.
양털 담요는 흐느적하고도 푹신하게 당신의 몸을 덮어
공기가 빈틈으로 들어서지 않도록 막네요.
오늘 밤 여기서 잘 수 있다니...
이만한 호사가 따로 없을 것 같습니다.
라비헨:(고롱고롱-) 흐아아- 역시 예상대로 엄청나게 푹신하고 부드럽고... 좋다...
자칫 잘못하면 금방이라도 잠들어버릴 것만 같습니다.
역시 큰 집을 고르길 잘했다 싶죠.
이런 곳에서 잠을 청할 수 있다니요.
벌써부터 밤이 기다려집니다.
라비헨:(무의식 중에 중얼거리며) 로만도 여기 누웠으면 엄청 좋아했을텐데.
...
(다시 기분이 가라앉더니 침대에서 일어난다) 마저 수색해야지.
당신은 조금 저조해진 기분으로 침대에서 일어서
문을 열고 다시금 복도로 나와
다음 방의 문고리를 잡아 돌립니다.
벽면 가득 책들이 꽂혀 있는 작은 방입니다.
서재로 사용되던 모양인지 잉크 냄새와 종이 냄새가 묵어 있고
책상 위에는 마을 전체의 출납부로 보이는
<붉은 눈꽃 마을>이라 적힌 공책 한 권이 펼쳐져 있습니다.
예상은 했지만, 마을 장로 내지는 촌장의 집이었나 보네요.
라비헨:(도움이 될만한 서적이 있는지 제목들을 살펴본다)
책들을 살펴보면 다양한 종류의 서적들이 꽂혀 있습니다.
경제, 지리, 요리책, 식물학 등이 주로네요.
라비헨:(지리와 요리책을 가볍게 훑어본다)
지리책을 가볍게 꺼내 펼쳐 보면
안에서 종이 낱장이 툭 떨어집니다.
허리를 숙여 주워보면 이 인근 마을을 표시한 지도네요.
물건을 거래하던 마을을 파악하기 위한 용도였는지
촌장의 직인이 군데군데 찍혀 있습니다.
다음에 이동할 때 이걸 참고하면 좋을 것 같네요.
야영보다는 지붕 있는 집이 훨씬 좋은 건
당연한 거니까요.
지리책을 다시금 서재에 꽂아넣고 요리책을 펼치면
요리책에는 단순한 홈메이드 요리법이
가득 실려 있습니다.
다만 재료가 다양하게 들어가서
만들 수는 없어 보이네요.
건질 만한 것이라고는 이 종이가 다인 듯 싶습니다.
라비헨:맛있어 보인다...
아차, 이럴 때가 아니지. (종이 낱장만 챙겨서 또 옆방으로 이동한다)
복도로 다시 나와 옆방으로 들어가면
이번 방은 아이 방인 듯 싶습니다.
문을 열자 벽면에 그려진 유치한 그림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바닥에는 낡은 인형과 조각난 블록들이 흩어져 있고
방 한가운데, 흔들 목마가 하나 놓여 있네요.
작은 책장에는 각양각색의 귀여운 동화책이 꽂혀 있습니다.
라비헨:'이 아이는 어떻게 됐으려나... 집주인이랑 같이 잘 대피했기를.' (좋은 쪽으로 최대한 생각하며, 동화책을 펼쳐본다)
동화책의 표지는 두꺼운 천으로 감싸여 있어 먼지를 털어내니
제법 선명한 색감이 드러납니다.
제목은 《태양을 삼킨 하얀 곰 이야기》.
당신도 어릴 때 부모님이 잠들기 전 머리맡에서 읽어준 적이 있었던
익숙한 전래동화입니다.
라비헨:와... 되게 오랜만이네.
당신은 추억에 젖으며 천천히 페이지를 넘깁니다.
첫번째 페이지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태양이 하늘 한가운데 떠 있고,
그 아래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평화로운 마을이 그려져 있습니다.
"옛날 아주 먼 옛날, 세상에는 밤이 없었답니다."
"태양 할아버지가 늘 우리를 지켜주었거든요."
당신은 글자를 눈으로 훑고는 천천히 페이지를 다음으로 넘깁니다.
갑자기 거대한 하얀 곰이 나타나
태양을 한 입에 꿀꺽 삼켜버립니다.
마을은 순식간에 파란색과 검은색으로 물들고, 눈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배가 고픈 하얀 곰이 태양을 삼켜버리자, 세상은 꽁꽁 얼어붙었어요."
"사람들은 서로의 온기를 찾아 동굴 속으로 숨었답니다."
당신은 계속해서 페이지를 넘깁니다.
마을 사람들이 각자 가슴 속에 작은 '불꽃 씨앗'을 하나씩 품고 기도를 하자
그 온기가 모여 하얀 곰의 배를 따뜻하게 녹이는 내용이 나옵니다.
곰은 갈수록 뜨거워지는 열기에 그만 태양을 밖으로 다시 뱉어내고
세상에는 봄이 찾아오며 동화는 끝이 납니다.
"기억하렴."
"밖이 아무리 추워도 네 마음속 불꽃이 꺼지지 않는다면,"
"태양은 반드시 다시 돌아온단다."
...
부모님이 동화를 읽어주었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겹쳐 들립니다.
그때는 순진한 마음에 동화 속 내용이
사실일 거라고 믿었었죠.
지금 당신은 어떤가요?
아직도 그런 희망을 가지고 있나요.
라비헨:...
(책을 탁 덮으며) '지금은 이런 확실치도 않은 것에 희망을 걸기에 현실은 너무 절망적이야.'
(책을 제자리에 꽂으려다 다시 표지를 빤히 본다) ... '한 권 쯤은 챙겨가도 괜찮지 않을까?'
'소한 그 녀석이 쓸모없는 거 챙긴다고 또 꼽주는 거 아니야? 흥... 마음대로 떠들라지, 뭐.'
당신은 품에 지도가 그려진 종이와 동화책 한 권을 안고
문을 열고 복도로 나옵니다.
귀를 기울이면, 왼쪽 공간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소한이 열심히 실내를 뒤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라비헨:(소한이 있는 곳으로 가서) 아직도 뒤지고 있어?
소한:(열심히 내부를 뒤지다가,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며) 어. 제법 건질 게 많아서.
밀가루도 있고, 사워도우 스타터, 토마토, 감자, 당근 같은 게 남아 있네.
넌 뭣 좀 찾았어?
(까지 말하다가 네 품에 안겨져 있는 종이와 동화책을 바라보며) 동화책에 흥미가 있는 줄은 몰랐네.
라비헨:(잔소리가 나올까봐 다급하게 뒤로 숨긴다. 놀리는 의미인가 싶어 얼굴이 조금 빨개진 채로) ... 어릴 때 부모님이 읽어주셨던 거라 하나 챙긴 거거든?
소한:(별 감흥 없이 다시 정면을 보며 찾아낸 식재료를 살핀다) 그래. 챙겨둬.
저녁쯤엔 토마토 스튜나 납작빵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둘 다 잘 먹어?
라비헨:잘 먹어.
...? 빵도 만들 줄 알아?
소한:그거 뭐 어렵다고.
라비헨:꽤 잘 사는 집에서 태어난 사람 치고는... 할 줄 아는 게 많다 싶어서.
소한:(툭) 이전 파트너가 요리해줄 때 어깨 너머로 배웠어. 그때까진 식재료가 많았으니까.
라비헨:아...
(씁쓸하게 입을 다물었다가) 그래.
... 요리는 나도 어느 정도 할 줄 아니까 너무 혼자서 하려고 하지 마.
소한:그래, 그럼 스튜는 네가 만들어. 난 식수 만들거나 잼을 끓일 테니까.
라비헨:알았어. ...지금부터 준비해?
소한:원한다면?
비품실에도 쓸만한 게 많더라고. 너 쓸 석궁은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라비헨:열심히도 살펴봤네.
... (이전 파트너에 대한 주제로 잠시 생각이 많아져서, 아까 챙긴 목도리를 네게 둘러준다) 자.
아까 주운 건데, 특별히 너 줄게.
소한:? (얼떨떨하게 네가 둘러주는 손길에 상체를 낮추며) 고마워.
라비헨:ㄴ, 난 북부 사람이니깐 그렇게 춥진 않아서 그런 거야!
넌 까다로운 도련님 같으니깐 내가 양보해준 거라고!
소한:까다로운 도련님이라니. 나도 그런 거 아닌데.
라비헨:몰라. 잔말 말고 가지기나 해.
그거 엄청나게 부드러운 거라고!
소한:(뭐야, 얘 왜 갑자기 친한 척이지?) 그래. (네가 매어준 모피 목도리를 단단히 착용하고는, 비품실쪽으로 몸을 돌린다) 편한대로 하고 있어. 쉬어도 좋고.
라비헨:(혼자서 괜히 민망해져서 몸을 돌리고 척척 주방으로 간다) 스튜 만들 거야. 밥은 먹고 쉬어야지.
소한:그래. 부탁할게. (비품실 문을 열고 사라진다)
라비헨:'진짜 이상한 놈이야.' (작게 숨을 내쉬고는 토마토 스튜를 조리할 준비를 한다)
주방에 들어서면 공간이 널찍하고 효율적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소한이 두고 간, 꽝꽝 언 감자와 당근, 토마토를 먼저 들고
가방에서 반쯤 얼어붙기 시작한 물을 붓고는
천천히 주방 전용 화로에 불을 지핍니다.
먹으려면 일단 녹여야 하니까요.
당신이 냄비 안에서 보글보글 끓으며 녹아가는 야채들을 바라보면
비품실 안쪽에서는 끼익, 캉! 하고
무언가 쇠를 깎거나 맞물리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소한이 도구들을 손질하기 시작하는 모양이네요.
당신은 그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냄비에 담아뒀던 물을 따라 버리고
도마와 식칼을 꺼내 깍뚝깍뚝 썰어냅니다.
안쪽이 조금 덜 녹아 서걱서걱 소리가 들려오지만
화로에서 올라오는 열기 덕에 춥지는 않네요.
당신은 부지런히 토마토 스튜를 끓입니다.
오랜만에 먹게 생긴 제대로 된 음식인지라,
냄새만 맡고 있을 뿐인데도 침이 꼴깍꼴깍 넘어갑니다.
토마토가 으깨지며 내는 선명한 주홍빛이
아름답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입니다.
곧 배낭 구석을 뒤적여 소금과 후추도 털어넣자
스튜는 간이 딱 맞는 상태로 보글보글 익어갑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요.
잠시 이 고요한 평화에 취해 국자로 안을 슬슬 젓고 있으면
소한이 비품실 문을 열고 다시금 주방으로 건너옵니다.
그의 손에는 목각으로 된 석궁이 들려 있고,
당신이 여분으로 쓸만한 삽 하나도 쥐여져 있습니다.
소한:스튜 벌써 거의 다 됐어? 빠르네.
라비헨:(으쓱-) 이 정도야 껌이지. 내가 말했잖아. 요리 할 줄 안다고.
소한:그러게. 믿어줘야겠어.
라비헨:...?
그럼 안 믿었단 말야?
소한:어느 집 도련님처럼 생긴 건 너도 마찬가지라.
라비헨:(툴툴) 뭐라는 거야... 깡촌 사람인데...
소한:(네 툴툴거림을 무시하고 식탁에 석궁을 올려두고, 구석에 삽도 세워놓고는 조리대로 다가온다) 이제 나도 써야 하니까 가서 쉬어.
석궁 손에 맞는지 확인도 해보고.
라비헨:되게 빨리 만들었네. 엄청 시끄럽게 굴더니만...
소한:손재주가 좋아서.
비품실에 화살도 있던데, 석궁용은 아니라 내일 만들어줄게.
라비헨:(끄덕이고는 자리를 비켜 식탁에 있는 석궁을 들어본다)
식탁 위에 놓인 석궁은 생각보다 가볍고 단단한 질감을 자랑합니다.
오래된 나무의 결이 살아있으면서도, 소한이 비품실에서 찾아낸 금속 부품들이 덧대어져
내구도도 좋아보이고, 수리하기도 편하게 생겼네요.
조심스럽게 석궁을 들어 올려 손 위에 얹어보면
소한이 당신의 체격을 고려해 만든 것인지,
손잡이가 당신의 손바닥에 착 감기는 느낌이 나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석궁보다 짧아 좁은 공간에서도 사용하기 좋아 보이고
낡은 망원경 렌즈를 떼어다 붙였는지,
한쪽 눈을 대자 먼 곳의 먼지까지 선명하게 보입니다.
제법 세심하게 신경 쓴 티가 납니다.
라비헨:'이걸 진짜 짧은 시간 내에 다 만들었다고...? 나랑 딱히 친하지도 않으면서?'
소한:(네가 뭘 하든 신경쓰지 않고 주방 옆의 창문을 힘주어 열고는, 식칼로 눈을 퍽퍽 꺼내 냄비에 담고 녹이기 시작한다)
라비헨:... '진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네.' (다시 석궁을 내려놓고는) 손에 잘 맞네. 잘 만들었더라.
소한:잘 맞으면 다행이고. (냄비를 슬쩍 확인하고는, 잠시 가방에서 사과와 체리를 꺼내와 식칼로 얇게 저미기 시작한다)
라비헨:... 왜 만들어준 거야? 내가 짐이 될까봐?
소한:? 그런 생각 안 했는데.
필요하니까. 그것뿐이야.
(눈이 다 녹고 물이 되어 살짝 끓는 상태가 되자, 옆에 식히기 위해 내려두고는 다른 냄비를 꺼내 과일을 부드럽게 익히기 시작한다)
라비헨:넌 혼자서도 잘 싸우는 것 같던데.
내 도움 같은 건 필요 없을 정도로.
소한:(순순히 인정하며) 그건 그렇지.
그래도 내가 죽으면 너도 살아야 할 거 아냐.
라비헨:(찌풀-) 야, 말이라도 아니라고 해야지. 파트너인데.
그리고 너보단 내가 더 빨리 죽겠지.
소한:그러니까. 너 빨리 죽을까봐 내가 앞에 나서잖아.
(과일이 어느 정도 익자, 꿀이 담긴 유리병을 꺼내 붓고는 다시 달그락거린다)
라비헨:... 네가 그럴 이유는 없잖아.
소한:파트너가 죽는 건 이제 지긋지긋해.
그러니까 넌 죽지 마.
라비헨:... 꽤 많은 파트너가 있었나 보네.
소한:두 명.
라비헨:너 같은 사람이랑 붙어 있어도 죽는구나...
소한:어쩔 수 없지. 죽을 수 있는 가짓수가 많으니까. (냄비 안을 부드럽게 스푼으로 휘젓다가, 과육이 녹진하게 풀리자 냄비를 떨어뜨리고 찬장에서 비어있는 유리병을 아무거나 꺼내 담는다)
라비헨:... 전에 같이 다니던 파트너들에 대해서 말해줄 수 있어?
말하기 싫으면 평소처럼 무시해도 돼.
소한:... (당연하게 무시하려고 했는데, 평소처럼 무시해도 된다는 말에 마음이 조금 무거워진다. 이 녀석 일부러 그러는 건가 싶은데, 그건 또 아닌 것 같고...)
(한참이나 입술을 달싹이다가, 미지근하게 식은 물 조금에 밀가루를 풀고는 사워도우 스타터를 풀어낸다) 첫번째 파트너는 내가 공장 운영 배울 때부터 같이 지내던 친구였고, 두 번째는 길 가다 만난 방랑자였어.
둘 다 잠식돼서 죽었지.
라비헨:그래서 지긋지긋하다 한 거구나.
... (근처 의자에 털썩 앉으며) 너도 그럼 꽤나 마음고생했겠네.
소한:이 지경에 마음 고생 안 하는 사람이 어딨어? (어이 없다는 듯 실소하고는, 보울을 꺼내 밀가루를 반죽하기 시작한다)
라비헨:하하... 그건 그래.
... 처음 봤을 땐,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싸이코패스인 줄 알았는데.
소한:뭐, 그럴 수 있지. (태연하게 반죽을 주무르며 치댄다)
라비헨:...
야.
소한.
소한:? 왜 불러.
라비헨:...너도 죽지 마.
소한:...봐서.
(반죽이 어느 정도 끝나자, 화로에 팬을 올리고 가볍게 굽기 시작한다)
라비헨:(피식) "봐서"는 무슨. 내가 먼저 죽으려고 했거든? 순서 지켜라?
소한:별 게 다 순서가 있네. (시큰둥)
라비헨:당연하지. 내가 죽으려던 걸 방해하던 놈이 먼저 죽으면 내가 얼마나 억울하겠어?
소한:네가 억울해하는 꼴은 좀 재밌을 것 같은데.
라비헨:(삐죽) 열받게 하지마.
소한:알았어, 안 죽으면 되잖아. (뒤집개로 빵이 익었나 살피다가, 한 번 뒤집는다)
라비헨:약속한 거야.
죽으면 진짜 죽여버릴 거니까.
소한:알았다니까.
라비헨:에휴... (확실하게 약속을 듣고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의자에 등을 기댄다)
내가 살폈던 방에 침실이 있었는데 거기 엄청 푹신하고 좋더라.
양털 담요도 있었어.
소한:? 그렇구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라비헨:살면서 그렇게 푹신한 침대는 처음 누워봤는데...
소한, 너는 얼마나 부자였어?
소한:(다시 한 번 빵을 뒤집으며) 글쎄. 돈 걱정을 딱히 해본 적 없는 정도.
라비헨:뭐야, 도련님 맞잖아.
소한:도련님은 귀족들 얘기잖아. 난 그쪽은 아니라고.
라비헨:돈이 많은데 무슨 차이야?
소한:시중인 같은 건 없었다는 소리야.
라비헨:돈이 많아도 시중인은 고용 못 해?
소한:고용할 순 있지. 안 쓴 거에 가깝나.
...어머님은 우리 집 물건에 남이 손대는 걸 싫어하셨거든.
라비헨:그럼 돈은 전부 어디다 쓰는데?
그런 데다 안 쓰면 어디다 써?
소한:글쎄다. 나도 그것까진 몰라.
투자에 썼을 수도 있고, 공장에서 개발비로 썼겠지 뭐.
라비헨:흠... (식탁에 턱을 괴며) 신기하네.
돈이 많으면 놀고 먹고 잠만 잘 줄 알았어.
귀찮은 건 전부 다른 사람 시키고.
소한:그건 귀족들 얘기고. 난 평민이거든?
(빵이 앞뒤로 노릇하게 구워진 것을 확인하고는, 반으로 갈라 접시에 나눠 담는다)
라비헨:난 시골 사람인데 돈 많은 평민을 내가 어떻게 알아?
돈 많으면 죄다 귀족일 거라 생각했지.
소한: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네. (조금 식어버린 스튜도 그릇에 나눠담고, 잼이 든 유리병까지 든 뒤 식탁으로 건너온다) 다 됐어. 저녁 먹자.
라비헨:전부 눈으로 덮이기 전까진 고향 밖을 나간 적이 없대도...
네가 비싼 거라고 말하기 전까진 뭐가 비싼 건지도 몰랐다고.
소한:그럼 차차 알면 되겠네. (스푼도 식탁 위에 얹고는, 네가 앉은 식탁 의자 맞은편에 앉는다)
노릇하게 구워진 빵의 고소한 향기와 따끈한 토마토 향기가 식탁을 가득 채웁니다.
토마토 스튜와 갓 구운 빵, 달콤한 잼까지.
폐허가 된 마을에서 즐기기에는 근사한 식탁이네요.
소한은 별다른 대꾸 없이 스푼을 들고는
당신에게 먹으라 턱짓한 뒤 수저질을 시작합니다.
라비헨:재난 중에 먹는 식사치고 엄청 호화롭네. (작게 웃으며 식기를 들어 식사한다)
소한:... (먹다가 네 웃는 얼굴을 바라보고는 조금 기묘해진다) 오늘따라 많이 웃는다?
라비헨:...뭐. 문제 있어?
소한:아니. 인상 쓰는 것보다는 보기 좋은데.
라비헨:난 원래 웃음에 박한 사람이 아니라고.
넌 365일 그 표정인 것 같아.
소한:그렇지, 뭐.
라비헨:(눈을 가늘게 뜨며) 무슨 표정이라도 지어봐.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전혀 모르겠다고.
소한:어떻게 웃는지 기억이 안 나.
다른 표정? 인상은 쓸 수 있는데.
라비헨:...인상쓰는 건 이미 봤으니까 다른 거 해봐.
입꼬리라도 올려보라고.
맨날 무표정만 보고 있으려니깐 삭막해 죽겠어.
소한:...
(시선을 피한다) 적응해, 그냥.
라비헨:허... 얼굴 근육 다 굳겠네.
소한:다 굳겠네가 아니라 이미 다 굳었어.
라비헨: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이 어떻게 웃는 법도 까먹냐?
좋아하는 거 없어?
소한:...만드는 건 좋아해.
라비헨:정확히 뭘 만드는 거?
흠... 손재주가 좋다고 했었지. 석궁도 제법 전문가처럼 만들었고.
소한:기계 장치나 목공.
근데 하도 많이 해서 이젠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라비헨:그거...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 만들어야만 하는 것만 만들어서 그런 거 아냐?
소한:틀리진 않을지도. (빵을 들어올려 스푼으로 잼을 바르고는 꼭꼭 씹어먹는다)
라비헨:(토마토 스프를 한입 먹고 여전히 수저를 입에 물다가) ... 그럼 넌 뭘 만들고 싶은데?
소한:...글쎄. 이젠 뭘 만들고 싶은지도 잊었어.
라비헨:지금부터라도 다시 생각해봐.
(빵에 잼을 발라 한입 우물거리고는) 좋아하는 것도 없이 사는 건 괴로운 일이잖아.
소한:...하지만 그런 건 사치스러워. 내일 당장 죽을지도 모를 판국에.
라비헨:흠... 네 말은 조금 이상해.
언제라도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처럼 하지만, 누구보다 살고 싶은 것 같아서.
내가 죽는 것도 못하게 했잖아.
그럴 바에는 좋아하는 건 기억하고 사는 게 낫지.
소한:살고 싶지. 죽고 싶다고 한 적은 없어, 나.
라비헨:알아. 그러니까 살고 싶은 만큼 좋아하는 것도 다시 만들라고.
소한:...그래.
라비헨:(피식) 드디어 마음에 드는 대답을 하네.
소한:(이런 대답 어디가 마음에 든다는 건지 알 수가 없지만, 네가 만족스러워 보이는 모습이 썩 싫지 않아서 가만히 식사를 계속한다)
스푼과 식기가 마찰하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달그락거리고
그릇과 접시는 차분하게 비어갑니다.
당신은 소한과 배를 뿌듯하게 채우고는,
작게 하품을 합니다.
배불리 먹은 데다가 실내 온도가 높아지고 있어서인지
노곤노곤하게 잠기운이 쏟아집니다.
소한:(가볍게 식기 세척을 마치고는 냄비에 물을 바글바글 끓이더니, 창고 구석에 있던 작은 욕조를 가져와 거실에 놓는다. 그리고는 적당히 녹인 물과 끓인 물을 한데 온수를 만들고는 네게 돌아오며) 라비. 식탁에서 졸지 말고 목욕하고 침대로 가.
라비헨:(혓바닥에 남은 음식맛을 마지막까지 음미하며 등받이에 늘어져있다가) 흡... ... 안 졸았거든? 눈만 감고 있던 거야.
목욕...?
그게 가능해?
소한:거실 가서 씻어. 물 받아뒀으니까. 욕실 뒤져서 비누 가져다줄게.
라비헨:'또 혼자서 뭘 다 했네...' 알았어.
소한:(무언가를 같이 하는 편보다는 혼자 하고 처리하는 게 편한 편) 어, 박박 씻어. 언제 이렇게 또 씻을 수 있을지 기약 없으니까.
라비헨:말 안 해도 그럴 작정이야. 휴...제대로 씻는 게 대체 얼마만이람?
(거실로 가서 덩그러니 놓여진 욕조를 보고 눈을 깜빡거린다) 진짜 세팅 다 해놨네.
소한:말했잖아. 했다고. (싱거운 새끼)
라비헨:다 들었거든? 기분이 묘해서 그렇지.
소한:(욕실을 찾아 비누를 꺼내오고는 툭 내밀며) 그래. 씻어. 난 덜 살펴본 내부 살펴볼게.
라비헨:'정 없는 새끼' (비누를 받고는) 너는 언제 씻게?
소한:너 씻고 나서. (휙 사라진다)
라비헨:흠... (검지로 욕조에 담긴 물을 푹 담가본다.) 되게 따뜻하네.
(겹겹이 입었던 옷을 하나씩 바닥에 벗어놓고 발부터 내밀어 욕조에 천천히 몸을 담근다) 후우...
인정하기 싫지만 소한의 생존력은
가히 기가 막힐 수준입니다.
누가 빙하기에 온수 목욕을 할 거라고 생각하겠어요.
그것도 밖에는 괴물이 판치는 판국에.
턱끝까지 몸을 담그고 나무 욕조 벽면에 고개를 기대자
부옇게 모락모락 오르는 뜨거운 김이 보입니다.
...왜 나한테 잘해주는 것 같지?
내가 죽으면 파트너를 또 찾아야 해서?
하지만 그것뿐만이라고 하기에는
행동의 동기가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도 듭니다.
라비헨:(생각x) '다른 파트너한테도 똑같이 해줬겠지. 전 파트너는 대체 저 목석이랑 어떻게 같이 다닌 건지 모르겠네.'
(노곤노곤-) 진짜 좋다-
라비헨:(흥얼거리며 탕의 열기를 느긋하게 즐기고 비누칠도 꼼꼼하게 한다)
(거의 물 만난 물고기처럼 아담하기 짝이 없는 욕조에서 물장구까지 친다)
귀여워
욕조 가득 들어찬 온수가 얼어붙었던 몸과 마음을 말랑하게 녹여줍니다.
거친 눈밭을 헤매느라 튼 살 사이로 스며드는 따끔한 열기가
오히려 살아있다는 감각을 일깨워 그 감각조차 나쁘지 않게 느껴지는군요.
당신은 소한이 던져주고 간 비누를 문질러 몽글몽글한 거품을 만들고는
나긋하게 숨을 내쉬며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독한 바람 냄새와 빙식체의 비릿한 냉기가 씻겨 내려간 자리에
옅은 비누 향이 대신 자리 잡습니다.
내일이면 다시 죽음이 도사리는 설원으로 나가야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지금 이 순간의 평화는 비현실적일 정도로 달콤합니다.
당신은 괜히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리를 쭉 뻗습니다.
욕조 안에서 물장구를 치자 찰랑거리는 물소리가
벽난로 소리 들리는 고요한 거실에 울려퍼지네요.
한참이나 그렇게 물장구를 치며 몸을 씻다보면
소한은 어느새 서재에서 책 한 권을 가져오더니
당신이 씻고 있는 욕조의 왼편 소파에 털썩 앉아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합니다.
라비헨:(욕조 끝에 팔을 올리고 그 위에 턱을 받쳐 널 바라본다) 그건 뭐야?
소한:(덤덤하게) 식물학 책. 먹을 수 있는 식재료 찾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라비헨:다 얼어죽었을 것 같은데.
소한:혹시 모르잖아. 뭔가 있을지도.
적도로 가서 잘 먹고 잘 산다 하더라도, 환경이 달라질 테니 뭐라도 알아두는 편이 낫고.
라비헨:그건... 그렇지.
어째 나보다 더 적도로 가는 데 진심인 것 같다?
소한:난 살아남을 수 있으면 뭐든 할 거니까. (덤덤)
라비헨:살아서 뭐 하고 싶은데?
소한:모르지. 그건 차차 생각해야 해.
라비헨:'재미없는 새끼' ... 아까 다른 방에서 요리책을 발견하긴 했는데, 그것도 필요해?
소한:살펴보긴 했어. 근데 우린 요리할 수 있는 재료가 한정적이라 딱히 쓸모는 없어 보이더라고.
그리고 음식은 간만 맞으면 대체로 다 맛있어서, 그런 거 없어도 돼.
(툭) ...내일은 사과 파이나 만들까.
라비헨:웬 사과 파이?
소한:맛있잖아. 들고 먹기도 좋고.
라비헨:좋아해?
소한:...좋아했지.
라비헨:좋아했지는 뭐야. 맛있다면서.
그럼 좋아하는 거지.
소한:...
(좋아한다고 생각하면 먹고 싶어지니까 '옛날에' 좋아했었다고 늘 의식적으로 살아왔는데...) 그런가.
라비헨:그래.
전부터 말하는 것마다 전부 과거형으로 말하더라.
하고 싶으면 하고 싶은 거고, 좋아하는 거면 좋아하는 거지 무슨 전부 다 아닌 것처럼 말을 해?
소한:... '하고 싶다', '좋아한다', 이런 식으로 생각나면 현실이 더 비참해지니까.
라비헨:... 그런 게 하나도 남아있지 않는 상태로 꾸역꾸역 사는 게 더 비참해.
(잠깐 동화책을 떠올리며) ...밖이 아무리 추워도 마음속 불꽃이 꺼지지 않는다면, 태양은 반드시 돌아온다 그랬어.
'쟤가 무슨 뜻인지 알아듣긴 하려나 모르겠네.' 그런 희망은 사치도 아니고 오히려 품는 편이 사는 데에 더 낫단 말이야.
소한:(낙관적인 네 이야기에 도리어 낯빛이 어두워진다) ...자살하려고 한 사람이 하는 말이라 딱히 신뢰가 안 가.
라비헨:(툴툴) 지 생각해줘서 하는 말인 것도 몰라. 너 바보야?
소한:몰라.
라비헨:바보 맞네. 딱 보니까.
... 그리고 내가 떠올린 말 아냐.
어릴 때 부모님이 말씀해주셨어.
소한:(잠시 페이지를 넘기다가 멈칫하며, 아주 뜸을 들이더니) ...좋은 분들이셨나 보네.
라비헨:(잠시 평화로웠던 때를 회상하며 눈을 반쯤 내리깐다) 유복하진 않았어도 그게 불만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좋은 분들이셨지...
(더 울적해지긴 싫어서 말을 돌린다) 어쨌든! 너 자꾸 별 것도 아닌 걸로 사치니 뭐니 하는데 너무 과해.
그저 생각 없이 사는 앤가 했는데, 생각을 안 하려고 애쓰는 사람 같다고.
그러니까 "내일도 죽지 않게 뭐라도 먹어야지." 말고 "내일은 사과파이를 먹기 위해 살아야지." 라고 생각해.
소한:...하지만 보통 없잖아.
라비헨:그래도 언젠가 또 먹을 수 있는 날이 올 거 아냐.
너 여기로 오면서 사과 파이 먹을 수 있을 거 예상하고 왔어?
소한:아무래도 아니지.
라비헨:그러니까.
소한:...
넌 진짜 이상한 놈이야.
라비헨:참나- 너만 할까.
소한:나 정도면 평균이지.
적어도 이 빙하기에서는.
라비헨:평균 다 죽었네.
아. '진짜로 죽었지, 참.'
소한:...
다정하게 굴지 마. 정 붙어.
라비헨:무슨 소리야? 같이 다니는데 이 정도 말도 못 해?
소한:... 그건 그렇지. 하지만 정을 붙이고 둘 중 하나가 죽게 되면 그때는 슬퍼서 몇 걸음도 못 갈 거야.
라비헨:(심드렁-) 그럼 그때 가서 죽지 뭐.
소한:...라비.
죽지 마.
라비헨:안 죽을 거야.
소한:죽지 말라고.
라비헨:안 죽을 거라니까?
소한:...
어제까지만 해도 죽을 거라며.
지금도 그렇고.
라비헨:그냥... 못 견디겠어서 그랬던 거지.
어차피 나 죽을 용기도 없어.
진짜 죽을 거였으면 갖고 있던 나이프로 손목이라도 그었겠지.
소한:...그것 참 논리적이네.
라비헨:그렇지?
너야말로 정 붙는다고 뭐라 해놓고 죽지 말라는 건 뭐야?
이상하게 구는 건 너도 마찬가지거든?
소한:둘 중 하나라도 안 해야 살아남지.
라비헨:(물이 느리게 찰랑거리며) 어차피 같이 다니는 이상은 싫어도 정 붙을걸...
나도 사람인데 일부러 못되게 구는 건 못 한다고.
소한:...너라도 붙이지 마.
라비헨:...? 네가 안 붙이는 게 더 가능성 있어 보이는데.
소한:아닌데.
라비헨:뭐가 아냐? 다정하게 굴고 있는 건 너잖아.
(중얼) 좀 재수없긴 하지만.
소한:(네 쪽으로 시선이 돌아가지 않도록 부러 책에만 시선을 고정하며) ...신경쓰여서.
라비헨:?
왜?
내가 죽겠다고 쌩 난리쳤으니까?
소한:...아니. 그거 말고.
라비헨:그럼 뭐.
소한:... 나중에. 정 붙으면 얘기할게.
라비헨:(흐릿-) 그거... 10년은 기다려야 하는 거 아냐?
소한:그건 나도 모르지. (팔락)
라비헨:싱거운 녀석. (작게 콧방귀를 뀌고는 욕조에서 나올 준비를 한다)
새로 물 받아줄게.
소한:(힐끔 고개를 돌리더니, 챙겨온 수건을 툭 던진다) 몸이나 잘 말려. 감기 걸린다.
라비헨:(탁 잡으며) 내가 북부 사람인 걸 잊어버렸어? 이래 보여도 튼튼하다고.
소한:그래도. 걱정 시키지 마. (담담히 대답하고는 도로 책에 시선을 준다)
라비헨:허... '언제부터 나를 그렇게 걱정했다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는다)
소한:(네가 몸 닦는 소리를 들으며, 무심히 페이지를 또 넘긴다) 내일은 다른 집도 팔 거야. 거기서 옷 찾아서 깨끗하게 갈아입고 가자고.
라비헨:그래그래~
... 가만.
내려서 왔잖아, 우리.
소한:그렇지
라비헨:어떻게 돌아가?
소한:단단히 굳은 얼음층에 말뚝을 박을 거야.
이미 재료 있는 거 확인했어
라비헨:처, 철저하네... (주섬주섬 다시 옷을 하나씩 입는다)
(털썩 네 옆자리에 앉고는) 다음 집도 얻을 게 많으면 좋을텐데.
소한:(네가 옷 입는 소리에 귀를 쫑긋하다가 옆을 돌아보며) 기껏 깨끗이 씻었는데 같은 옷 입었어?
라비헨:딱히 새로 입을만한 게 없었거든. 너한테 준 목도리랑 장갑이 다야.
그렇다고 잠옷을 입을 순 없잖아.
소한:어차피 여기서 잘 거잖아. 오늘은 밖에 나가지도 않을 건데.
라비헨:... 알았어. 다른 옷 입고 올게. (다시 일어나 옷장이 있던 방으로 향한다)
당신은 소한의 기색에 떠밀려 다시 옷방으로 향합니다.
거실의 훈훈한 온기를 등지고 복도로 들어서니
방금 씻고 나온 몸에 닿는 공기가 유독 차갑게 느껴지는군요.
당신은 아까 눈여겨 보았던 침실의 옷장 문을 다시금 열어젖힙니다.
겨울 외출복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지만,
거친 설원 위에서는 입기 힘든, 부드럽고 가벼운 실크 잠옷이
가지런히 개어져 들어 있습니다.
실내 온기가 제법 올랐다지만
이걸 입어도 안 추울 정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뭐... 그래도 어쩌겠어요.
몸에 양털 담요를 두르면 되겠죠.
라비헨:(눈을 가늘게 뜨며 실크 잠옷을 쭉 펼쳐 들어올린다) ... 진짜 이것뿐이라고? 완전 얇은데.
실크는 이런 느낌이구나...(만지작만지작)
한 번 입어볼까. (실크 잠옷으로 갈아입는다)
매끄러운 감촉이 피부에 닿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짧은 탄성을 나옵니다.
거친 가죽과 빳빳한 면직물, 그리고 땀에 절어 무거웠던 외투들만 걸치던 몸에
포근하게 감겨오는 실크의 느낌이 비현실적일 정도로 가볍고 부드럽습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로 얇은 옷감이지만,
보온성이 강해서인지 적당히 쌀쌀하다 느껴질 정도입니다.
당신이 거울 앞에서 어색하게 소매를 만져보다가,
침대 위에 대충 놓아뒀던 양털 담요를 어깨에 푹 두르면
세상에, 이만한 호사가 없네요.
구름에 파묻힌 것 같습니다.
당신은 담요 자락을 끌며 다시 거실로 걸어 나옵니다.
타닥거리는 장작 소리만이 들리던 고요한 거실에서,
당신이 신은 거친 설원용 신발만이 탁탁 마룻바닥 딛는 소리를 냅니다.
소한은 어느새 책을 다 훑어봤는지 주방에서
또 다시 물을 끓이고 있네요.
라비헨:'또 뭔가 하고 있네.' (등뒤로 다가가서 어깨 위로 얼굴을 빼꼼 들어올린다) 뭐 하고 있는 거야?
소한:목욕물 끓이는 ㅈ... (하고 뒤를 돌아봤다가 너무 가까워진 얼굴에 잠시 흠칫한다)
라비헨:내가 하려고 했는데 기다리기 힘들 정도로 찝찝했어?
소한:그런 거 아냐. 목욕한 직후라 나른할 테니까 내가 하는 게 낫겠다 싶었어.
라비헨:내 목욕물 네가 채웠는데 네 목욕물도 네가 채워? 에휴... 요령 없는 놈.
(폭닥한 양털 담요를 어깨에 들려주고) 비켜봐. 내가 할테니까.
아, 그 담요는 침실에서 찾은 거야. 느낌 되게 좋지 않냐?
소한:(잠시 손을 뻗어 만지작거리다가) ...그러게. 부드럽네. (말을 마치고는 등을 돌려 네 어깨에 도로 둘러준다)
얇게 입었으니까 네가 입어.
라비헨:? 그래.
너도 역시 좋지?
나 양털 담요는 처음 덮어보거든.
어쨌든 너도 좋아하는 거 하나 더 생겼네.
소한:...싱겁긴. (잠시 고민하다가 주방 서랍에서 노끈을 꺼내 담요 윗부분에 놓고 담요째로 둥글게 말더니, 네 목에 착 둘러준다) 안 타게 조심하고. 난 도구 점검한다.
라비헨:응. 목욕물 준비 다 되면 부른다?
소한: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