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황금 개울 마을
동굴의 폐쇄적인 어둠과 설산의 살벌한 냉기를 뚫고 내려온 끝에,
거짓말처럼 공기의 질감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코끝을 찌르던 날카로운 얼음 냄새 대신,
눅눅하고 묵직한 유황 향과 달큰한 흙내음이 섞인 바람이 불어오네요.
당신이 소한에게 반강제로 안긴 채로 언덕의 마지막 능선을 넘어서자
눈앞에 믿기지 않는 풍경이 펼쳐집니다.
눈이 거의 덮여 있지 않은 마을은, 마을 곳곳에 수로가 가득하고
꽝꽝 얼어붙은 얼음 대신 김이 옅게 피어오르는
맑은 물이 콸콸 흐르고 있습니다.
수로 주변의 바위들은 온기 덕분에 눈이 다 녹아내려
검푸른 본연의 색을 드러내고 있네요.
그 사이로 보이는 파릇한 이끼마저 낙원 같습니다.
오들오들 떨며 산을 타느라 감각이 없던 뺨에 습하고 따뜻한 공기가 닿자,
마치 수천 개의 미세한 바늘이 찌르는 듯한 얼얼한 해방감이 찾아옵니다.



여기서 얼마나 머물 거야?


그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광기에 가득찬 눈으로) 여긴 식량이 별로 없을테니까 최대한 온천을 즐겨놔야 해. 그러니까 밥 먹을 때 빼고 잠도 여기서...


온천 지대에 왔으니깐 당연히 온천에 들어가야지!
(슬쩍 네 어깨에 친근한 척 손을 올리며 남은 손으로 황금 빛깔의 온천을 가리킨다) 잘 봐, 소한. 너 저거 참을 수 있어?
저 빛깔을 보라고.

그래, 그럼 짐부터 풀고 쉴까.

엄청나게 추웠으니까 땀이 날 정도로 뜨겁게 놀자.


예를 들면- 저기 커다란 지붕 있잖아.





여긴 유황 지대고 곡식이 안 나서, 다른 마을과 교류를 하며 먹고 살았을 거야. 그러니 그런 물건은 예비로도 쟁여뒀을 리가.



황금빛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길을 따라 걸으니
발걸음이 솜털처럼 가볍습니다.
방금 전까지 동굴에서 질식할 뻔했음에도 말이죠.
당신의 품에 매달려 덜덜 떨던 소한의 처량한 행색도
이미 온천 증기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당신은 소한과 함께 마을 중앙부에서 가장 웅장한
목조 가옥 앞에 멈춰 섭니다.
입구부터 뜨끈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전용 노천탕이
완전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짙은 색의 삼나무로 지어진 집은 유황 성분 때문에
살짝 거무스름하게 변색되어 오히려 고풍스럽네요.
돈 깨나 많았던 집 같습니다.
그런데 어쩐지, 흠...
입구로 들어서니 목재로 된 데스크가 입구부터 놓여져 있는 것이
거주용이 아니라, 나그네의 숙박용 건물이었던가 싶군요.
하긴, 유황 온천은 그 자체로 관광 요소가 될 법하니까요.

데스크로 다가가 장부를 펼쳐보면
한때는 수많은 여행객의 이름과 사연이 적혔을 장부는
습기를 머금어 눅눅하게 변질되어 있습니다.
페이지를 팔락팔락 넘겨보면 날짜는 빙하기가 시작된 그
마지막 날에 뚝 멈춰 있습니다.
'객실 202호, 가족 3명', '305호, 보급 상인'...
빼곡한 글자들 위로 희미한 유황 냄새가 배어 나옵니다.
이곳은 다른 곳보다 따뜻한 곳이니만큼
여행객들이 한동안 거처로 썼다가 지나갔을 확률이 크겠죠.
아마 다들 그렇게 버티다가, 먹을 것이 없어지자 밖으로 나갔을 겁니다.
이 마을에 인기척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걸 보면
다 죽었다는 뜻이겠지만요.
소한은 당신이 장부를 읽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데스크 뒤쪽 선반으로 향해 묵직한 열쇠 꾸러미를 집어 듭니다.




돈 많은 귀족 나리들이 묵는 그런 곳 말하는 거야?









귀족들 보면 손에 보석 반지 서너 개는 끼고 있던데.

그리고 시중도 없잖아.
지금 내 꼴로 특실에 들어가면 몰래 들어간 쥐새끼나 다름없을걸.

시중은... (잠깐, 얘 옆에 나밖에 없잖아)


짐부터 풀어야 온천에 들어가지.

근데 너도 특실 가서 자?
(아무 생각x) 여기 방 많잖아.


당신은 콧노래를 부르며 소한을 따라 계단을 올라갑니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오래된 목재가 '끼익, 끼익' 소리를 내며 당신들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3층까지 올라가 복도 끝의 굳게 닫힌 커다란 문을 열자
넓찍한 거실의 모습이 바로 드러납니다.
고급스러운 유화가 액자에 담겨 있고, 선반에 이미 빈 포도주병이 놓여 있네요.
소파도, 탁자도 고급품임을 증명하듯 먼지가 앉았어도 표면이 매끄럽고 윤이 돕니다.
거실 바로 옆에는 침실이 바로 붙어 있는 구조고,
안에 2인용 큰 침대가 두 개 놓여 있네요.
활짝 열려 있는 벽장 안으로는 비단 소재의 가운과
작은 향낭 주머니가 들어 있습니다.
많은 방랑객들이 스쳐지나갔을 게 뻔한 만큼
생필품은 거의 놓여 있지 않거나 비어 있네요.
그래도 이곳은 겨울에도 춥지 않은 환경이어서인지
비단으로 만들어진 이불은 반쯤 구겨진 채 침대에 놓여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선 항상 네가 먼저 여기저기 돌아다녔잖아.


오늘은 특히나 고되긴 했지. 죽을 뻔했으니까.
그럼 쉬고 있어. 난 마저 둘러보고 올게.

당신이 그렇게 그를 두고 나가려는 순간
우지끈!
소리를 내며 뒤에서 굉음이 들려옵니다.
...?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뒤를 돌아보면
원래 침대 기둥 한쪽이 없었는지
대각선으로 기울어져버린 시트 위로 소한이
바닥에 곤두질친 채로 머리를 부여잡고 있네요.
아, 웃으면 안 되는데 너무 웃깁니다...


당연히 멀쩡하지. (투덜)

괜찮으면 다행이고.


괜찮냐고도 했잖아.

그래, 고-맙다.









당신은 웃어서 슬슬 당기기 시작한 배를 살짝 쥐다가
특실 문을 나서 복도로 나가봅니다.
여관은 꽤 크기가 있어서 그런지
복도도 길고, 널찍한 편이네요.

문은 대체로 일렬로 왼쪽에만 나 있고
오른쪽은 창 너머 설경을 비추고 있습니다.
당신이 방금 나온 특실이 복도 맨끝 방인 것을 생각하면
복도 맞은편 끝에 있는 방이 그 다음으로 좋은 방이려나요.

복도의 끝과 끝. 당신이 방금 나온 특실이 화려하고 압도적인 화려함을 자랑했다면,
복도 반대편 끝에 위치한 이 방은 어쩐지 공기부터가 조금 더 서늘하고 정적인 느낌을 풍깁니다.
문고리를 잡자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집니다.
'끼이익—'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특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공간이 당신을 맞이합니다.
아무래도 여긴 여관 방문자들의 기록을 적어두는 사무실 같네요.
특실처럼 넓은 침대는 없지만, 대신 방 한가운데에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커다란 서필용 책상과 벽면을 가득 채운 서가가 놓여 있습니다.

그래도 뭔가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기록들과 서가를 살펴본다)
먼지 쌓인 서가에는 가나다순으로 정리된 방문객 명단과 물자 보급 장부들이 빽빽합니다.
대부분은 빛바랜 종이들이지만, 유독 깨끗하게 관리된 칸에는
'지열 유지 관리 기록'이라는 제목의 두툼한 서류철이 놓여 있네요.
커다란 책상 위에는 정교하게 그려진 마을 주변의 지질 지도가 펼쳐져 있습니다.
지도 곳곳에는 붉은 펜으로 '위험', '온도 저하' 같은 글자들이 휘갈겨 써져 있네요.

이것 말고는 건질 게 없네. (미련 없이 근처에 있는 다른 방으로 향한다)
복도 밖으로 나와보면 같은 풍경입니다.
당신이 그래도 조심스럽게 내부를 살피다보면
멀지 않은 곳에 '비품실'이라고 적힌 팻말이 걸린 문이 있네요.

비품실 문을 열자마자 훅 끼쳐오는 것은 오랫동안 갇혀 있던 건조한 나무 냄새와
세탁제 특유의 빳빳한 향입니다.
설원에서의 퀴퀴한 가죽 냄새와 동굴의 습한 흙내음에 지쳐 있던 당신에게는
마치 보물처럼 느껴지는 청결한 냄새네요.
선반에는 하얗게 세탁되어 각 잡힌 채 쌓여 있는
여유분 수건과 시트들이 가득합니다.
비록 먼지가 얇게 앉았지만, 툭툭 털어내면
당장이라도 쓸 수 있을 만큼 상태가 좋습니다.
한쪽 구석에는 투명한 유리병에 담긴 목욕 소금과 비누
그리고 은은한 라벤더 향이 나는 방향제 주머니들이 상자에 담겨 있고,
실내 전용 쿠션 슬리퍼와 부드러운 목욕 가운들이 걸려 있습니다.
빙하기가 덮치던 시기가 가을이었던 걸 생각하면
아마 겨울 용품은 조금 더 안쪽에 있을 것 같습니다.

시간만 넉넉했다면 빨래도 했을텐데 아쉽네.
물건이 많으니까 나중에 소한이랑 다시 오는 걸로 하고... (방향제를 하나 챙긴다) 이건 방에다 놔야지~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본다)
조금 더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안쪽에는 문 달린 붙박이장들이 가득합니다.
하나하나 열어보는 수밖에 없겠네요.
붙박이장은 총 다섯 개입니다.

첫번째 붙박이장을 열면 봄/가을 용도인지 들어있는 물건이 별로 없습니다.
앞쪽에 있던 것과 비슷한 물건들이 들어있네요.
그래도 쌀쌀함을 대비한 것인지 어깨 위에 덮을 수 있는 무릎 담요 몇 장과
일반 객실용에 비치하는 면 재질 베개 커버가 놓여 있습니다.
조금 실망해서 두번째 붙박이장을 열어보면
이번에는 여름 용도인지 시원한 린넨 재질의 가운들과 이불이 들어 있습니다.
침구 용품의 크기가 작아서인지 아래쪽에는
여분용 베개솜이 차곡차곡 놓여져 있네요.

아, 소한이 베개 챙겨달라 그랬지 참.
근데 얼마나 챙기지? 머리 아프다고 했으니깐 여러 개 챙기면 좋으려나. (팔 한 쪽에 베개솜을 3개 낑겨서 챙긴다)
베개솜이 폭신해서인지 당신의 옆구리는 금방 가득찹니다.
계절 순서를 생각하며 열어본 세 번째 장롱 안에는
예상했던대로 겨울 침구가 놓여 있습니다.
다만 여행객들이 피난을 위해 챙겨간 것인지 담요는 없고
아주 두툼한 오리털 이불만 한 개 놓여 있네요.

(삐질...) 무, 무거워...
헥헥...
소한이 같이 왔으면 번쩍 들었을 텐데
왜 여기 오자마자 게을러진 건지 모르겠네요.
당신은 온몸이 두터운 솜과 깃털 침구로 반쯤 무장된 채
다음 장을 열어봅니다.
이번에는 직원용 란인지, 깔끔한 백색 셔츠와 금실이 수놓아진 조끼,
정장 바지, 직원 명패, 넥타이 따위가 들어 있네요.
하단에 달린 서랍을 열면 티슈와 칫솔, 치약, 비누 등등이 들어 있습니다.

지금 입었다간 추워 죽겠지만.
칫솔, 치약, 비누만 챙겨야겠다.
근데... 어떻게 들지?
(낑낑거리며 손에 한가득, 그리고 고민하다 결국 입에 티슈를 문다) 흐...
으으- '안되겠다, 일단 특실에 한 번 다녀와야겠어...!!' (뒤뚱거리며 특실로 돌아간다)
두툼한 오리털 이불과 솜뭉치에 파묻혀 뒤뚱뒤뚱 걸으면
어쩐지 스스로가 거대한 흰색 구름덩이가 된 것 같습니다.
무게는 상당히 무겁지만요.
시야는 침구에 가로막혀 발가락 끝만 겨우 보이고
입에 문 티슈 때문에 숨을 쉴 때마다 흡흡 소리가 납니다.
당신은 비품실을 나와 복도 끝 특실 문 앞에서 멈춰 섭니다.
그러고보니 손이 없는데, 문고리를 어떻게 열죠.
하는수없이 온몸으로 쿵쿵 들이받으며
"음믐므! (소한!)" 하고 소리를 지르자
소한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문을 열어주더니
당신의 모습을 보고는 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습니다.

바보야.
(네 몸에 둘러진 침구를 대신 들고, 입에 물린 티슈도 빼낸다) 왔다갔다 하면 되잖아. (;;)
으... (네 입에서 빼낸 티슈를 보고는 인상을 쓴다. 침 묻었잖아...)

(툴툴) 안에 내용물은 멀쩡하거든?
베개도 챙겨달래서 제일 먼저 챙겨갖고 왔더니만...




(슬쩍) 알아서 뭐하게.




내려다보지마. 짜증나니깐.
그리고 제대로 성인이거든?

열 아홉?
(아니 근데) 네가 키가 작은 걸 나더러 어떡하라고.

네가 더럽게 큰 거라고.
(발끈해서 나이를 말해버린다) 난 스물 두 살이라고!










크게 차이도 안 나는구만 뭐!


(씩씩거리며 잔뜩 화가 난 게 티나게 발을 팍, 팍, 소리내며 앞으로 나아간다) 너 이리로 와. 엉덩이 차주겠다는 거 지금 할 거니까.


아깐 얌전히 엉덩이 쳐맞겠다며!



(네가 있는 그대로 발차기라도 날릴까봐 벽에 등을 붙이고 물러선다)









진정했으니까 이제 내려놔.

챙겨온 물건 보니, 비품실 다녀온 것 같던데 더 챙겨올 거 있어?







야. 야...!
소한은 그 말을 끝으로 당신이 소리를 지르건 말건
무심하게 밖으로 툭 나가 버립니다.
특실 안에는 당신이 놓인 멀쩡한 침대 하나와
다리가 부러져 기운 침대 하나,
그리고 이불 번데기가 되어버린 당신만 남았네요.
실내는 벽지고 천장이고 호화스럽지만
심심하기 그지없습니다.
당신은 한참이나 씩씩거리다가 하는수없이
이불째로 침대에 폭삭 드러눕...
뭐야, 침대가 아니라 구름에 누웠나요?
가르랑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뺌을 시트에 비비며 가르랑거린다) 귀족 나리들은 이런 침대에서 자는 게 일상이겠지... 너무 좋다...
... 침대를 통째로 가져가는 방법은 없나.
아무래도 없겠죠.
당신은 포근한 침대 시트와 이불에 꽁꽁 싸인 채로 눈을 감습니다.
하... 진짜 여기서 살 순 없나.
먹을 게 없다는 사실이 한탄스러울 따름입니다.
깜빡, 깜빡.
피로가 쌓였던 몸이 편안한 환경에 놓이자
속절없이 졸음이 밀려옵니다.
어차피 소한이 올 때까지 시간도 걸릴 테니
한숨 자도록 하죠.
당신은 하의는 반쯤 실종 상태고 상의는 방한복만 껴입고 있다는 사실도 잊으며
그대로 쿨- 잠에 빠집니다.
.
.
.
그렇게 얼마나 잤을까요.
단잠에 취해 고롱고롱 자고 있다보면
근처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힙니다.
눈꺼풀 위로 비치던 햇빛은 듬성히 기울어져 있고
부스스한 눈꺼풀 위로 초점 없이 눈곱만 끼어 있네요.

...
...!
내 온천!
이불을 두른 상태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자
이불이 아래로 스르르 흘러내립니다.
...아니 잠깐.
나 왜 홀딱 벗고 있지?!
당황해서 이불을 주섬주섬 도로 끌어안으면
거실 측에서 들리던 부스럭 소리가 멈추더니
탁탁 발 소리를 내며 소한이 침실로 들어옵니다.





(들고 온 가운을 네 쪽으로 툭 던지며) 일어났으면 해 지기 전에 온천욕하러 가자.
네 다른 옷은 세탁해서 실내에 널어뒀어.

그럼...
아까 입던 옷은?







어쨌든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이제 일어나. (가까이 다가가 네가 덮은 이불을 홱 들춘다)

몽유병 같은 거 없어. 멍청아!
(가운을 탁 잡고 걸친다) '하여튼 끝까지 재수없는 놈.'

(네가 옷 갈아입는 모습을 빤히 보다가 저도 가운으로 갈아입으려 가볍게 옷을 풀어헤치기 시작한다)


당신은 쿵쾅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복도로 나섭니다.
가운 하나만 걸친 채 복도를 걷자니,
아까 소한이 한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돕니다.
아니, 내가 대답까지 하고 옷을 벗어 던졌다고?
말도 안 돼! 그런 적 없었다고!
...자면서 좀 덥다고 느껴지긴 했지만.
아니 물론, 언젠가부터 적정 온도가 돼서
더 푹 자긴 했지만!
기억 안 난다고!
당신은 괜히 애꿎은 가운 깃을 바짝 여미며 씩씩거리고는
계단을 툭툭 내려갑니다.
밖을 나서자 마을 전체를 덮은 황금빛 물안개가 보입니다.
바깥에는 눈이 오는지 하늘이 부옇게 번져 있고
온천 지대인 이곳만 뜨겁게 올라오는 김 때문에
바닥이 습기로 촉촉하게 젖어 있습니다.
휙, 불어온 찬 바람이 가운 틈새로 스며듭니다.
하긴 아무리 이곳이 따뜻하다고 해도
해도 가물가물 넘어가는 마당에 바람이 따뜻하긴 어렵겠죠.
당신은 아무도 없는 넓은 온천장에 들어서자마자 가운을 홱 벗어 던지고
뜨거운 물속으로 몸을 풍덩 담급니다.
챠악- 물 튀기는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튀는 황금빛 물방울이 뺨을 적시고
뜨끈함이 온몸을 물들입니다.

뜨거운 유황 성분이 온몸의 근육을 부드럽게 이완시키자,
날 서 있던 마음도 조금씩 말랑해집니다.
생각해보면... 음.
설령 제가 옷을 벗어던진 게 아니더라도 소한이 나쁜 의도로 그랬을 리는 없겠죠.
그 무뚝뚝한 성격에 대신 세탁까지 해 널어둔 정성을 생각하면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판이긴 합니다.
과정이 민망해서 그렇지...
당신이 물 속에 얼굴을 반쯤 담그고 보글보글 거품을 내며
따뜻한 여유를 만끽하고 있으면, 온천장 입구의 나무문이 드르륵 열립니다.










황금빛 수면 위로 피어오르는 뽀얀 증기가 두 사람 사이를 몽환적으로 가로막습니다.
소한은 정말 아무 생각도 없다는 듯, 바위에 머리를 기댄 채 깊은 한숨을 내쉬며
온천의 열기를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네요.
뜨거운 물이 목덜미를 타고 흐르자, 긴장했던 근육들이 녹아내리며 정신이 아득해집니다.
물결이 찰랑거릴 때마다 유황 특유의 묵직한 향이 코끝을 간지럽히고,
탕 속의 고요함은 세상의 모든 소음을 지워버립니다.
소한은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지만,
물속을 타고 전해지는 미세한 파동이 그의 존재감을 일깨웁니다.
쓸데없이 가깝다고 툴툴거렸지만 막상 멀어지고 나니
이 넓은 온천장에 혼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

(어깨를 늘어뜨리며 얼굴 절반을 탕에 담그고 푸르르르- 입으로 거품을 일으킨다) '나야 넓게 쓸 수 있으니 좋지.'

온천은 처음 와 봐?



나보다 아는 거 많잖아.

고향 마을 밖으로 나간 적은 거의 없었으니까.


넌 어떻게 살았는데?







전원 생활을 하고 싶어?

그건 아니지만, 추억이 많은 건 부럽게 느껴져서.

공장 운영 배울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 있다며.




음... (<<사실 이쪽도 위로는 잘 못한다)
언젠가 꿈에서 인사하러 오지 않을,까...


(거리를 벌렸던 만큼 다시 슬쩍 네게 다가가 어깨를 툭툭 두드려준다) 친구도 너를 원망하지 않을 거야.


(쩝...) 어... '이제 무슨 말을 하냐...'
추억이야 뭐... 다시 쌓으면 되는 거고...!


... '얘랑 추억을...? 여기서 아니라고 할 수도 없잖아.' 그으-렇지?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우리 벌써 잊지 못할 추억 하나 만들었잖아...!
그, 뭐야, 같이 협동해서 괴물도 잡고...! 아까도 죽을 뻔했는데 살아서 죽여주는 설원도 보고...!
또... 어... (슬슬 생각나는 게 없어서 머리와 함께 눈을 데굴데굴 굴린다) 같이 맛있는 사과 파이도 먹었고...!
오늘은 이렇게 온천욕도 하고 있잖아. 이런 시기에 온천욕을 즐기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같이...!

라비. 나 궁금한 게 있는데.





하아- (바위에 머리를 기대며) X나 어려워.



자꾸 챙겨주고 싶게 만들잖아, 네가.


가만히 두면 금방 죽을 것 같고.

"잘" 했으니까 살아남았지.
그리고 "애새끼"는 사실이 될 수 없어.

앞으로 애새끼라고 안 부를게. 딱히 깔보려던 건 아니었지만, 네가 그렇게 느낀다면.




(천천히 탕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작게 몸을 떤다) 나 먼저 나가서 저녁 준비한다. 더 늦어지기 전에 씻고 나와.

(덩달아 몸을 일으키고는) 나도 같이 갈래.




입 열면 한번씩 열받긴 하지만.


그리고 ... 평소엔 안 싫어.



.
.
.
소한이 여관 내부에서 찾아냈다는 옥수수와 전지분유로 만든 수프와
여전히 맛이 조금 텁텁한 빵을 찍어먹고 배를 적당히 채우면
시간은 어느새 밤이 됩니다.
방 문을 열자, 아까 당신이 찾아온 산더미 같은 오리털 이불이
달빛을 받아 뽀얗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겨울 이불이 저거 하나였죠.
마음 같아서는 따로 자라고 하고 싶지만
창문을 타고 넘어오는 밤 공기는 차갑게 뚝 떨어졌고
다른 객실에서 이불도 못 찾았고
이불은 이것 하나뿐이니
다른 선택지가 달리 없기도 하네요.
아, 그래도 객실이 이렇게 많은 곳에서까지
또 자기는 좀 그런데...





창밖으로는 유황 안개가 밤의 냉기와 만나 더욱 짙게 마을을 가로지르고,
실내에는 오직 달빛과 온천수의 열기, 옆에 누운 소한만이
희미한 온기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오리털 이불이 몸을 온통 덮어버린 그 속에서
비단 가운은 살결에 닿을 때마다 매끄럽고 서늘한 감촉을 남기고,
몸을 비틀 때마다 품이 벌어지거나 흘러내리네요.
어쩐지 이런 여관 방에 둘이서, 그것도 흘러내리는 얇은 옷만 입은 채 누워 있으려니
민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알았어. 진짜 잘게. (만일을 대비해 소한과 거리를 벌리고 이불 끝자락으로 몸을 옮겨 잠을 청한다)





.
.
.
아침 햇살이 창가의 황금빛 안개를 뚫고 방 안으로 쏟아집니다.
밤사이 식지 않은 온천의 지열 덕분에 방 안은 여전히 몽글몽글한 온기가 감돌고,
두툼한 오리털 이불은 그 열기를 고스란히 머금어
기분 좋은 무게감으로 당신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당신은 잠결에 품에 안긴 단단한 것을 더욱 끌어안고는
기분 좋은 콧소리를 흘립니다.
정말이지 개운한 아침이네요.
역시 사람이 직접 만든 실내와 고급 침구는 가히 최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품에 안겨 있는 단단하고 뜨끈한 기둥 같은 것도
거기에 한 몫...
...
잠깐.
여긴 그런 게 없습니다.
적어도 소한 빼고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음과 동시에
당신의 무겁디 무거운 눈꺼풀이 제발 아니라는 뜻으로
위로 치켜져 올라갑니다.
그러나 현실은 늘 잔혹(?)한 법이죠.
밤새 '안전거리'를 지키겠다며 이불 끝자락으로 도망쳤던 당신은 온데간데없고,
지금 당신은 소한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그의 허리를 다리로 꽉 감싸고 있습니다.
어깨끈은 이미 팔뚝 아래로 흘러내린 지 오래고,
가운 자락은 허리춤까지 말려 올라가 소한의 허벅지와 당신의 맨다리가 그대로 맞닿아 있네요.
오갈 데 없어진 눈동자가 순하게 잠든 소한의 옆모습과
어깨 아래로 타고 내려간 가운 자락을 스쳤다 떨어집니다.

(질끈) '이놈의 잠버릇 진짜 미치겠네!! 역시 끈으로 팔다리를 묶고 자야 하나...'


더, 더 자! 더.


아, '내가 이불을 가져갔지.' (후다닥 이불을 네게 꼭꼭 덮어주며) 춥구나. 더 자.


(민망해서 뒷통수를 긁적인다) 또 잠버릇이 나와버려서...








(강제로 엉겨붙은(?) 채로 얼빠진 얼굴로 천장을 바라본다) '이게 뭐지...'


... '좀 더 잘까.' (생각을 그만두고 다시 잠을 청한다)
당신은 결국 이 미묘한 침대 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될대로 되라라는 마음으로 눈을 감습니다.
얇은 비단 가운 사이로 전해지는 체온과 규칙적인 숨소리가 다가들자
방금 전의 당혹감보다는 다시금 아득한 졸음이 밀려옵니다.
.
.
.
그렇게 또 얼마나 잤을까요.
눈이 뜨여 주변을 살펴보면 또 다시 원상복구입니다.
어깨를 기대고 잠들었던 소한의 몸에 당신의 팔다리가 또 올라가 있네요.
아니, 이놈의 잠버릇은 어디까지 가는 거야?!
...
이제 진짜 일어나야겠습니다.
태양이 중천에 떴으니까요.



'빨래 다 말랐는지 확인하러 갈까.' (처음으로 푹 자는 소한을 배려해 최대한 살금살금 이불 속에서 빠져나오려 한다)
당신은 소한의 허벅지를 누르고 있던 자신의 다리를
아주 천천히, 1밀리미터씩 뒤로 뺍니다.
비단 가운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리는 적막 속에서 말이죠.

| 기준치: | 75/37/15 |
| 굴림: | 92 |
| 판정결과: | 실패 |
그러나 너무 긴장했던 탓일까요,
발을 바닥으로 디디려던 찰나의 순간,
발끝이 바닥에 미끄러지며 당신의 상체는
곤히 잠든 소한의 상체 위로 곤두박질칩니다.
벌어진 가운 사이로 확 닿는 체온의 열기와
규칙적인 심장 소리가 민망해 죽을 것 같습니다.
제발, 제발 깨어나지 마...!

| 기준치: | 55/27/11 |
| 굴림: | 97 |
| 판정결과: | 실패 |
그러나 당신의 간절한 바람이 무색하게도
감각이 예민한 소한은 손쉽게 눈을 뜹니다.
그리고는, 깜빡, 깜빡, 눈 앞의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듯
고개를 살짝 들어 당신을 바라보네요.


아, 아침체조...?
(대답을 듣기도 전에 손으로 네 눈을 텁- 가리고는) 얼른 다시 자.
못 본 걸로 해.

내 눈은 왜. (천천히 네 손을 내리고 상황을 보며 빤히 파악한다) 나가려다 미끄러졌어?

그래.


어... 미안.



...아, 맞다. 밖에서 내내 얼어있던 게 여기 와서는 다 녹았을 거라, 밖에 나가기 전엔 다 처리해야 해. 안 그러면 전부 썩을 거야.

...근데 너 안 추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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