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붉게 물든 설원
빙하기에서 호화롭게 쉬다가 나온 지 일주일 째.
소한은 앞장 서서 삽으로 눈길을 다지며 나아가고
당신은 그의 발자국을 정직하게 밟으며 뒤따르고 있습니다.
등을 짓누르는 배낭의 무게가 상당합니다.
새로 얻은 삽과, 석궁, 손도끼, 수건과 속옷.
하나씩 각기 들면 가벼울 것인데도 한데 모아 들고 있으니
이전보다도 발이 눈밭 위로 푹푹 빠집니다.
목욕을 하고 따뜻한 양털 담요를 두르고 푹신한 침대에서 잠을 잔 것도
아주 오래 전의 일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쌩하니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은 당신을 계속 혹독한 추위로 몰아넣고
뺨을 갈가리 찢어낼 것처럼 소리를 질러댑니다.
그저 걷기만 하는 여정은 어쩐지
순례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하면서도
희망의 불씨가 순례길보다는 확연히 적게 느껴져
약간의 우울함을 선사한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여정은 계속해서 이어질 뿐입니다.
적도로 도착하려면 길은 아직도 5000km나 남아 있으니까요.
그렇게 땀방울이 솟으면 바로 차갑게 얼어붙는 바람을 맞으며
얼마나 걸었을까요.
한참을 걷던 소한의 발걸음이 돌연 멈춰섭니다.
휘몰아치는 옅은 눈보라 사이로 그가 손을 들어
당신에게 정지 신호를 보냅니다.
당신은 반사적으로 그를 따라 멈추고
조용히 주변을 살핍니다.

| 기준치: | 80/40/16 |
| 굴림: | 22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키륵- 끼익-
쇠를 긁어내는 듯도, 나무를 갉아먹는 듯도 같은
기괴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런 소리를 낼 존재라면 이곳엔 빙식체뿐이겠죠.
하지만 어째서인지, 빙식체의 걸음이 땅에 끌리는 소리는 아닙니다.





할 수 있겠어?


빙식체는 내가 처리하고 올 테니까 안전하게 있어. 근처에 다른 놈은 없지?



약속 지켜.

소한의 그림자와 발걸음 소리가 천천히 멀어집니다.
그 사이로 찰칵, 하고 전투를 대비한 장전 소리가 울립니다.
당신은 싸늘한 설원 위에 우뚝 선 채로 눈을 감고
가만히 버팁니다.
시각을 차단하니 온갖 소리가 더욱 자세히 밀려 들어옵니다.
우드득, 콰득-
창백하게 얼어가는 시체의 뼈가
갈라지고 동강나는 끔찍한 소리가
소한의 걸음이 멀어진 곳 너머로 들립니다.
기괴한 마찰음과 으스러지는 소리에
안 그래도 싸늘한 기온이 더욱 뚝 떨어진 것만 같습니다.
이런 소리가 나는 것을 보면...
저 사람은 분명히 죽었겠죠.
소한이 멀리 떨어지자 빙식체가 내는 소리에 비해
비교적 가벼운 그의 발소리는 점차 칼바람 소리에 휩쓸려
말끔하게 지워집니다.
그렇게 장갑에 싸인 손 끝을 바르르 떨다가 꾹 쥐면
탕-!
소한의 머스킷 사격 소리가 적막한 설원에
메아리 치듯 울립니다.
당신은 조금은 걱정되는 마음으로,
그리고 조금은 기대하는 마음으로
눈꺼풀을 아주 가늘게 들어올립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탕-!
탕-!
두 발의 사격 소리가 연달아 울립니다.
공포가 밀려옵니다.
탄환을 되도록 아끼려하는 소한이 한 번에 세 발이나 쏘았다는 건
소한이 괴물을 상대로 고전하고 있다는 알람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설마, 이대로 소한이 죽으면 어쩌지? 지금이라도 나도 전투에 참여해야 하나?'
'그치만... 소한이 저렇게 고전할 정도면 내가 가봤자 짐이 되는 건 아닐까.'
'괜히 갔다가 소한의 발목을 붙잡는 꼴이 되어서 소한도 로만처럼 변해버린다면...'
(어느새 손톱자국이 날 정도로 꽉 쥔 주먹에 식은땀이 맺힌다.) '어떻게 해야 하지? 소한의 말대로 도망치는 게 옳은 걸까?'
계속해서 들려오는 소리에 긴장한 나머지
당신은 숫자를 세야 한다는 그의 말도 잊고
우두커니 지나갈 시간을 기다립니다.
탕-!
탕-!
두 발이 총성이 연이어 울리더니, 도저히 안 되겠는지
이제는 휙휙 날붙이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체감하기엔 200을 셀 시간은 이미 지난 것 같습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에는 뭐라도 하고 죽는 게 낫다는 생각에 소한이 만들어 준 석궁을 꺼내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한다) '씨... 왜 약속을 안 지키는 거야, 멍청아!'
시야를 가로막는 눈보라가 당신의 뺨을 날카롭게 할큅니다.
당신은 거칠게 어깨에 매어져 있던 짐가방을 내팽개치고
전투 소리만이 들려오는 경계선으로 발을 내디딥니다.
약속된 숫자는 의미도 잃었고,
당신의 예민한 귀는 칼바람 소리 너머로 들려오는
절박한 금속음 소리에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도끼가 단단한 빙식체의 표면을 때리는 불꽃 튀는 소리가
소한의 거친 숨소리를 쫓고 있습니다.
그렇게 당신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작은 언덕을 오를 쯤
펼쳐진 광경에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습니다.
순백의 눈밭을 기괴하게 갈라놓은 붉은 강.
단순히 누군가가 피를 흘려서 지어진 것이 아닌,
무거운 갈고리에 찢겨 고깃덩이처럼 끌려간 것처럼
선명하게 각인된 죽음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온 피부에 소름이 바짝 돋고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립니다.

| 기준치: | 55/27/11 |
| 굴림: | 12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당신은 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구역질을 간신히 참고
몰아치는 눈발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실루엣을 쫓습니다.
몸집이 3미터가 족히 넘는 거대한 빙식체는
마을이 무너져 부모님이 잔해에 깔려 죽었을 때 말고는
처음 보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날렵하게 움직이는 실루엣이 무기를 휘두르며
그 괴물의 품 속을 파고들었다 물러서기를 쉼없이 반복합니다.
압도적인 괴물 앞에서 소한이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도끼 한 자루로 놈의 거대한 앞발을 받아내는 장면에
숨이 턱 막힙니다.

악쓰듯 빙식체의 공격을 받아내는 저 몸이
오늘따라 왜 이리 작아 보이는지.
몸이 우뚝 서서 제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거대한 포효가 당신의 고막을 찢을 듯 울립니다.

| 기준치: | 55/27/11 |
| 굴림: | 50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놈의 등 뒤에는 머스킷 탄환이 박힌 구멍들이 보이지만,
괴물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 소한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예전에 들은 적이 있습니다.
본래 인간이었다가 변이해 빙식체가 된 괴물들은 사람과 동일한 방식으로 죽일 수 있지만
이 빙하기에 갑자기 출현한 초기의 빙식체들은 그런 방식으로 죽지 않았다고.
세계의 온 마을을 초토화시키고 인류를 절멸 수준까지 밀어낸 장본인들 중 하나가
당신의 눈 앞에 있음을, 당신은 어렴풋이 직감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유일한 약점은 보통,
몸 어딘가에 박혀 있다는 불가사의한 핵.
하지만 당신이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시야가 부족하기 때문인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

| 기준치: | 55/27/11 |
| 굴림: | 2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잠시 눈보라가 멎어들고 설원의 풍경이 제대로 눈에 들어옵니다.
당신은 석궁의 조준경에 눈을 대고 소한이 고전하는 동안
거칠게 심호흡을 하고 빙식체의 피부를 샅샅이 훑어봅니다.
그러나 어째서일까요,
보이지가 않습니다.
몸의 앞과 뒤, 정수리까지 모두 보임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 당신의 눈가에 무언가 번쩍이는 빛이 비칩니다.
빙식체가 소한을 공격하기 위해 위치를 이동하는 순간
눈에 푹 파묻힌 발치에서 보인 것입니다.
오른쪽 발목, 눈에 파묻혔다가 사라지는 곳.
저길 어떻게든 맞추는 수밖에 없습니다.
거리는 약 40m.
사격 가능 범위입니다.

| 기준치: | 60/30/12 |
| 굴림: | 45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 피해: | 8 |
당신은 석궁에 화살을 올리고 당긴 뒤
심호흡을 한 채 조준경으로 위치를 가늠하곤,
빙식체가 또 다시 걸음을 떼는 순간 주저 없이
석궁 시위를 놓습니다.
쐑-!
당신이 시위를 떠나보낸 화살은 칼바람을 뚫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빙식체의 오른쪽 발목,
그 푸르스름한 빛이 일렁이던 틈새를 정확히 꿰뚫습니다.
카아아아아아악—!
고막을 찢는 듯한 비명이 설원을 뒤흔듭니다.
발목에 박힌 화살을 기점으로 빙식체의 거대한 몸 전체가 경련하듯 떨리더니,
지탱하던 무게 중심이 급격히 무너져 내립니다.
산만 했던 괴물이 거구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눈밭 위로 '콰앙—!' 소리를 내며 처박힙니다.
지면을 울리는 충격으로 사방으로 눈가루가 폭발하듯 튀어 오르고,
소한을 짓누르던 압도적인 살기도 일순간 흩어집니다.
소한은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 채로
괴물의 앞발 아래에서 몸을 굴려 가까스로 빠져나옵니다.
쓰러진 빙식체가 고통에 겨워 발을 휘저으며 다시 일어나려 발버둥 치지만,
당신이 맞춘 발목 부근에서는 이미 차가운 냉기가 검은 연기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습니다.
놈의 기동력이 완전히 상실된 셈입니다.
소한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놈의 머리 위로 번뜩이는 도끼날을 내리꽂습니다.
'퍼억—!'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괴물의 머리통이 갈라지고,
안에서 형체를 알 수 없는 시퍼런 연기가 하늘로 솟구칩니다.
당신은 자신이 나서 놓고도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한동안 가만히 소한과 시선을 맞교환합니다.
천천히 손목에 장착해뒀던 석궁을 풀어내자,
소한이 비틀거리며 당신에게 걸어와
괴물의 힘을 받아내느라 살갗이 여기저기 터진 손으로
당신의 뺨에 양손을 댄 채 안전을 살핍니다.
그의 표정 또한, 당신과 마찬가지로 얼떨떨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러나 그 걱정스러운 얼굴이 분노하는 얼굴로 바뀌는 것 또한
순식간이네요.


200까지 셌는데 네가 안 돌아왔잖아.

피도 못 보면서! 무슨 생각이야!



도망치는 거? 숨는 거? 그건 네 선택지겠지.


결과적으로 안 죽었잖아.
(울 것처럼 눈을 잔뜩 구기며 떨리는 목소리로) 그럼 된 거 아냐...?




걱정해서 참견하러 왔어.
그게 뭐.
그게 그렇게 잘못됐어?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이마를 짚고 한숨만 푹푹 쉬다가, 진정할 때쯤 고개를 든다. 그래도 납득할 건 납득해야 해서) ...아니. 잘못하진 않았지.
하아... 구해줘서 고마워. 덕분에 살았으니까.
...근데 어떻게 한 거야. 게다가 우리 짐은?

별 거 없어. 핵을 맞춘 게 다야.





두 사람의 발걸음이 머물렀던 붉은 눈밭 위로
다시금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쳐 혈흔을 덮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여전히 가시지 않은 억울함에 입술을 꾹 깨문 채,
소한을 앞질러 짐을 놔둔 곳으로 향합니다.
뒤에서 들려오는 소한의 발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더 조심스럽게 느껴지지만,
지금은 그 주저하는 기색조차 얄밉기만 합니다.
곧 짐을 버려두고 갔던 곳에 도착해 배낭을 거칠게 낚아채자
소한은 자신의 짐도 조용히 들어올리고는 등에 맵니다.





내가 왜 그랬는지 너도 이해 못하는 거 아니잖아.

그치만 나도 생각없이 행동한 건 아니란 말야.


네가 말했잖아. 혼자 다니면 정신병 걸리기 쉽다고.
혼자가 돼서 조금 더 살다 죽는 것보단 뭐라도 해보고 죽든 말든 하는 게 낫잖아.

넌 착하고 붙임성도 있으니까, 나 아니더라도 다른 파티를 찾기만 하면 금방 들어갈 거야.

그리고 개죽음 안됐잖아.


그전에 죽는 게 더 빠를걸.


너한테.

참나, 말이 되는 소리를 하니까 반박할 수도 없고.

눈앞에 파트너가 아직 살아있는데 새 파트너 찾을 계획을 굳이 해?

(시선을 조금 피하며 딴 소리를 한다) 어떤 파트너를 만나도 전투는 대체로 내가 홀로 맡아서. 안 익숙한 거야.
기분 상하게 할 의도는 없었어.

(어깨를 툭툭 치며) 그래서 어디서 묵는다고? 나머진 이따 얘기하자.
고된 하루였잖아.

설원의 차가운 공기는 여전히 폐부를 찌르지만,
방금 전까지 감돌던 날 선 긴장은 한풀 꺾였습니다.
소한이 안내하는 나무 밑동 쪽으로 이동하면
거대한 고목이 부러져 나간 자리는 천연의 차양막이 되어 눈보라를 막아주고 있군요.
소한은 익숙하게 삽을 꺼내 들어 단단히 다져진 설면을 찍어내립니다.
당신도 천천히 가방에서 삽을 들어 같이 파내려가고,
이윽고 어느 즈음에서 멈추어 수평으로 파내면
소한이 익숙하게 안에서 탁, 탁, 소리를 내며 텐트를 조립하고
가방에서 모포를 꺼내어 아래에 깔아준 뒤 당신을 먼저 들여보냅니다.
당신은 안쪽 깊숙이 자리를 잡고 앉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어쩐지 소한이 바로 따라 들어오려는 기미 없이
밖에서 가죽 마개를 펼치고 가만히 있네요.




이번엔 진짜 약속 지켜야 해.
이상한 데서 죽지 말고.

다녀올게. 라비. (그 말을 끝으로 네가 쉬고 있는 텐트 입구를 가죽 덮개로 막는다)

(털썩 손을 뒷통수에 대고 누우며) 뭐, 알아서 잘 오겠지. 근처에 괴물 소리는 안 났으니까.
좁고 아늑한 텐트 안, 가죽 덮개 너머로 소한의 발소리가 눈을 밟으며 멀어집니다.
당신은 그가 깔아준 모포를 끌어당겨 몸을 둥글게 맙니다.
텐트 내부의 공기는 당신의 숨결로 금세 미지근해지지만,
소한이 늘 누워 있던 옆자리가 비어 있으니 묘하게 공기가 쎄하네요.
해가 질 때 굴로 들어왔으니 밖은 이제 완전히 어둠에 잠겼을 것입니다.
바람이 텐트 위의 눈밭을 살며시 빗질하는 소리,
고목의 잔가지가 흔들리는 소리...
시각이 차단된 공간에서 당신의 예민한 귀는 온갖 미세한 음향을 포집합니다.
피로가 해일처럼 밀려옵니다.
소한은 대체 이 밤 중에 무슨 마무리를 한다는 건지.
몇 번을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 놈입니다.
그렇게 나직이 하품을 몇 번 쏟아내고
눈꺼풀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하며
어둠에 고요히 잠겨 있었을까요.
깜빡 잠이 들려나 싶던 찰나,
가죽 덮개 너머로 '뽀득, 뽀드득' 하고 익숙한 발소리가 다가옵니다.
소한의 발걸음입니다.
그는 굴 앞에 멈춰 서서 거친 숨을 고르더니,
조심스럽게 가죽 덮개를 열고 안으로 몸을 밀어 넣습니다.


ㄱ, 그리고! 여기 좁아 터지긴 했어도 혼자 누우면 춥단 말야.


(시침 뚝-) 기억 안 나.


? 이게 뭐야?


독 아닌 건 뭔데?

(그렇게 말하고는 병 마개를 딴 뒤 네 손에 병을 쥐여준다) 마셔. 달더라.



손바닥에 쏙 들어올 만큼의 작은 병 입구에 입술을 대고
꼴깍, 가볍게 한 모금 머금자
잘 익은 사과의 싱그러운 향과 함께
혀끝이 아릴 정도로 진한 꿀의 향취가 섞여들어옵니다.
마치 액체로 된 보석을 마시는 듯한 감미로움입니다.
주스인가 싶어 아껴 마시려고 입에서 굴리다가
목구멍으로 넘기면, 그제서야 화한 알코올 향이 올라옵니다.
식도를 탄 액체가 가슴팍까지 화끈하게 달구며
은은한 잔열을 남깁니다.
술 향기가 오래도록 머무는 것을 보아하면
도수가 꽤 센 술이었나 보네요.
주스인 줄 알았는데.
세상에 이런 술도 있다니.

웬 술이야?

입에 안 맞아?
그럼 나 다시 줘. (손바닥을 내민다)



술 안 좋아해?




나한테?
왜?

보답이야.

이런 걸 줄 거라고는 예상도 못 했고.




(장난) 서투른 김에 한 번 더?



고, 마워. 라비. 덕분에 살았어.

(눈가를 훔치며) 하아... 진짜로 할 줄은 몰랐는데.



이런 거에 인색하진 않아.



(홧김에 병을 반이나 비우고는 입가를 훔친다) 흐... 나 혼자 다 마실 거니까.

(이젠 네 옆에 익숙하게 풀썩 드러누우며) 적당히 마시고 누워. 자자, 라비.

벌써? 지금 한참 좋은데... (얼굴이 살짝 빨개졌다)


네 고향에 대해 얘기해봐.



내 고향은 살짝 추운 사계절이 있는 해안 마을이었어. 형제는 없고, 부모님이랑 나 이렇게 셋이 살았지.
아버님께서는 귀족들에게 납품하는 증기기관 설비를 생산하는 공장의 공장장이셨어. 난 어릴 때부터 가업을 물려받으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고, 딱히 반발심도 없어서 어릴 때부터 자주 설비를 견학하고 공부했지.
그리 재미있는 얘기는 아냐.



그래서 손재주가 좋은 거였구나?


(다시 병을 홀짝이며) 기차 만드는 거 좋아해?

...나중에 손수 만든 기차를 시범 운행하는 경험을 해보고 싶었어.








(살짝 시선을 틀며) 사실상 불가능하니까 잊어버리고 산 거야.

규모를 좀 줄이면 되지.
아니면 혹시 알아? 우리 말고 또 적도로 가는 사람이 있을지.

뭐... 원래 살던 거주민들은 여전히 살 가능성이 높긴 하니까, 완전히 틀리다고 확언할 수도 없나.

사는 것도 포기를 안 하면서 그런 건 뭐하러 포기해.


정말 살만한 곳일 수도 있고.
꿈 좀 가지는 게 사치면 기준이 너무 박한 거 아냐?

그러는 넌 적도에 가면 뭘 할 건데? 꿈 얘기는 안 했잖아.

(다시 술을 홀짝이며 반 농담으로 중얼거린다) 양조장이라도 차려볼까...




제대로 마신 건 네가 산장에서 줬을 때가 다라고.



(그렇다는 건) 술이 주식이야?

필.수.품.




...좀 더워, 그리고.

(얘는 얼마나 마셨길래 덥다는 소리까지 하는지, 원)

(병을 좌우로 흔들어보며) ... 다 마셔서 이제 못 주는데.


(네 등을 콕콕 찌르며 약간 어눌해진 발음으로) 야... 소한...
술 안 줘서 섭섭해?


소한... 이거 더 없어?

...
없어. (거짓말)

진작 아껴 마실걸....




지금 딱 좋아...
근데 이제 없어서 슬퍼.

찾으면 또 줄게.
그러니까 내일도 길 떠날 준비하게, 잠이나 자자.



네가 보답이라고 했으니까.


소한... 너...



(황당)

좋은 놈이구나!

술주정 그만 부리고 자.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고는, 너를 억지로 눕혀 모포를 덮는다)

흐으으- (작게 떨더니) 야...
소한...


근데... 더워.
진짜 이상해.
이럴 수 있어?

열은 올랐는데 피부쪽 혈관이 확장돼서 열을 밖으로 빼내고 있어서 그래. 가만히 있으면 괜찮아져.

(키득키득) 똑똑하네...
(모포 위로 두 손을 가지런히 놓고 천장을 바라본다) 그럼 가만히 있을게...
가만히..
(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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