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붉게 물든 설원

  




빙하기에서 호화롭게 쉬다가 나온 지 일주일 째.
소한은 앞장 서서 삽으로 눈길을 다지며 나아가고
당신은 그의 발자국을 정직하게 밟으며 뒤따르고 있습니다.
등을 짓누르는 배낭의 무게가 상당합니다.
새로 얻은 삽과, 석궁, 손도끼, 수건과 속옷.
하나씩 각기 들면 가벼울 것인데도 한데 모아 들고 있으니
이전보다도 발이 눈밭 위로 푹푹 빠집니다.
목욕을 하고 따뜻한 양털 담요를 두르고 푹신한 침대에서 잠을 잔 것도
아주 오래 전의 일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쌩하니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은 당신을 계속 혹독한 추위로 몰아넣고
뺨을 갈가리 찢어낼 것처럼 소리를 질러댑니다.
그저 걷기만 하는 여정은 어쩐지
순례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하면서도
희망의 불씨가 순례길보다는 확연히 적게 느껴져
약간의 우울함을 선사한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여정은 계속해서 이어질 뿐입니다.
적도로 도착하려면 길은 아직도 5000km나 남아 있으니까요.
그렇게 땀방울이 솟으면 바로 차갑게 얼어붙는 바람을 맞으며
얼마나 걸었을까요.
한참을 걷던 소한의 발걸음이 돌연 멈춰섭니다.
휘몰아치는 옅은 눈보라 사이로 그가 손을 들어
당신에게 정지 신호를 보냅니다.
당신은 반사적으로 그를 따라 멈추고
조용히 주변을 살핍니다.
라비헨:
Listen Roll
기준치:80/40/16
굴림:22
판정결과:어려운 성공
키륵- 끼익-
쇠를 긁어내는 듯도, 나무를 갉아먹는 듯도 같은
기괴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런 소리를 낼 존재라면 이곳엔 빙식체뿐이겠죠.
하지만 어째서인지, 빙식체의 걸음이 땅에 끌리는 소리는 아닙니다.
소한:(정면을 응시한 채 몇 걸음 뒤돌아 네 앞에서 멈추며) 라비. 눈 감아.
라비헨:(눈동자를 굴려 여기저기 훑는다) '대체 어디 있는 거지?'
소한:(여전히 정면을 본 채로) 감았어?
라비헨:갑자기? 알았,어. (이미 소한이 전투하는 모습을 봤기에 얌전히 눈을 감는다) 감았어.
소한:(손목에 매어둔 끈을 툭 풀며) 천천히 200까지 세고, 그때까지 내가 안 오면 도망가거나 눈을 파헤쳐서라도 숨어 있어.
할 수 있겠어?
라비헨:뭐야... 불안하게 왜 그러는데...
소한:핏자국이 쓸려 있어. 누군가 죽어 있을 거야.]
빙식체는 내가 처리하고 올 테니까 안전하게 있어. 근처에 다른 놈은 없지?
라비헨:...없어.
소한:그래. (짐가방을 툭 내려놓고, 도끼와 총만 챙겨 일어난다) 다녀올게.
라비헨:... 소한.
약속 지켜.
소한:당연하지.
소한의 그림자와 발걸음 소리가 천천히 멀어집니다.
그 사이로 찰칵, 하고 전투를 대비한 장전 소리가 울립니다.
당신은 싸늘한 설원 위에 우뚝 선 채로 눈을 감고
가만히 버팁니다.
시각을 차단하니 온갖 소리가 더욱 자세히 밀려 들어옵니다.
우드득, 콰득-
창백하게 얼어가는 시체의 뼈가
갈라지고 동강나는 끔찍한 소리가
소한의 걸음이 멀어진 곳 너머로 들립니다.
기괴한 마찰음과 으스러지는 소리에
안 그래도 싸늘한 기온이 더욱 뚝 떨어진 것만 같습니다.
이런 소리가 나는 것을 보면...
저 사람은 분명히 죽었겠죠.
소한이 멀리 떨어지자 빙식체가 내는 소리에 비해
비교적 가벼운 그의 발소리는 점차 칼바람 소리에 휩쓸려
말끔하게 지워집니다.
그렇게 장갑에 싸인 손 끝을 바르르 떨다가 꾹 쥐면
탕-!
소한의 머스킷 사격 소리가 적막한 설원에
메아리 치듯 울립니다.
당신은 조금은 걱정되는 마음으로,
그리고 조금은 기대하는 마음으로
눈꺼풀을 아주 가늘게 들어올립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탕-!
탕-!
두 발의 사격 소리가 연달아 울립니다.
공포가 밀려옵니다.
탄환을 되도록 아끼려하는 소한이 한 번에 세 발이나 쏘았다는 건
소한이 괴물을 상대로 고전하고 있다는 알람이나 다름없으니까요.
라비헨:(미간에 주름이 미세하게 질 정도로 눈을 세게 감으며) ... '큰일이라도 난 거 아냐? 이렇게 눈만 감고 있어도 되는 건가.'
'...설마, 이대로 소한이 죽으면 어쩌지? 지금이라도 나도 전투에 참여해야 하나?'
'그치만... 소한이 저렇게 고전할 정도면 내가 가봤자 짐이 되는 건 아닐까.'
'괜히 갔다가 소한의 발목을 붙잡는 꼴이 되어서 소한도 로만처럼 변해버린다면...'
(어느새 손톱자국이 날 정도로 꽉 쥔 주먹에 식은땀이 맺힌다.) '어떻게 해야 하지? 소한의 말대로 도망치는 게 옳은 걸까?'
계속해서 들려오는 소리에 긴장한 나머지
당신은 숫자를 세야 한다는 그의 말도 잊고
우두커니 지나갈 시간을 기다립니다.
탕-!
탕-!
두 발이 총성이 연이어 울리더니, 도저히 안 되겠는지
이제는 휙휙 날붙이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체감하기엔 200을 셀 시간은 이미 지난 것 같습니다.
라비헨:으으... 역시 안 되겠어. 이제 도망만 치는 건 질색이라고!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에는 뭐라도 하고 죽는 게 낫다는 생각에 소한이 만들어 준 석궁을 꺼내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한다) '씨... 왜 약속을 안 지키는 거야, 멍청아!'
시야를 가로막는 눈보라가 당신의 뺨을 날카롭게 할큅니다.
당신은 거칠게 어깨에 매어져 있던 짐가방을 내팽개치고
전투 소리만이 들려오는 경계선으로 발을 내디딥니다.
약속된 숫자는 의미도 잃었고,
당신의 예민한 귀는 칼바람 소리 너머로 들려오는
절박한 금속음 소리에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도끼가 단단한 빙식체의 표면을 때리는 불꽃 튀는 소리가
소한의 거친 숨소리를 쫓고 있습니다.
그렇게 당신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작은 언덕을 오를 쯤
펼쳐진 광경에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습니다.
순백의 눈밭을 기괴하게 갈라놓은 붉은 강.
단순히 누군가가 피를 흘려서 지어진 것이 아닌,
무거운 갈고리에 찢겨 고깃덩이처럼 끌려간 것처럼
선명하게 각인된 죽음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온 피부에 소름이 바짝 돋고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립니다.
라비헨:
SAN Roll
기준치:55/27/11
굴림:12
판정결과:어려운 성공
당신은 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구역질을 간신히 참고
몰아치는 눈발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실루엣을 쫓습니다.
몸집이 3미터가 족히 넘는 거대한 빙식체는
마을이 무너져 부모님이 잔해에 깔려 죽었을 때 말고는
처음 보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날렵하게 움직이는 실루엣이 무기를 휘두르며
그 괴물의 품 속을 파고들었다 물러서기를 쉼없이 반복합니다.
압도적인 괴물 앞에서 소한이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도끼 한 자루로 놈의 거대한 앞발을 받아내는 장면에
숨이 턱 막힙니다.
소한:(이를 악물며) ...크윽!
악쓰듯 빙식체의 공격을 받아내는 저 몸이
오늘따라 왜 이리 작아 보이는지.
몸이 우뚝 서서 제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거대한 포효가 당신의 고막을 찢을 듯 울립니다.
라비헨:
Spot Hidden Roll
기준치:55/27/11
굴림:50
판정결과:보통 성공
놈의 등 뒤에는 머스킷 탄환이 박힌 구멍들이 보이지만,
괴물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 소한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예전에 들은 적이 있습니다.
본래 인간이었다가 변이해 빙식체가 된 괴물들은 사람과 동일한 방식으로 죽일 수 있지만
이 빙하기에 갑자기 출현한 초기의 빙식체들은 그런 방식으로 죽지 않았다고.
세계의 온 마을을 초토화시키고 인류를 절멸 수준까지 밀어낸 장본인들 중 하나가
당신의 눈 앞에 있음을, 당신은 어렴풋이 직감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유일한 약점은 보통,
몸 어딘가에 박혀 있다는 불가사의한 핵.
하지만 당신이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시야가 부족하기 때문인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
라비헨:
Spot Hidden Roll
기준치:55/27/11
굴림:2
판정결과:극단적 성공
잠시 눈보라가 멎어들고 설원의 풍경이 제대로 눈에 들어옵니다.
당신은 석궁의 조준경에 눈을 대고 소한이 고전하는 동안
거칠게 심호흡을 하고 빙식체의 피부를 샅샅이 훑어봅니다.
그러나 어째서일까요,
보이지가 않습니다.
몸의 앞과 뒤, 정수리까지 모두 보임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GM:
그때, 당신의 눈가에 무언가 번쩍이는 빛이 비칩니다.
빙식체가 소한을 공격하기 위해 위치를 이동하는 순간
눈에 푹 파묻힌 발치에서 보인 것입니다.
오른쪽 발목, 눈에 파묻혔다가 사라지는 곳.
저길 어떻게든 맞추는 수밖에 없습니다.
거리는 약 40m.
사격 가능 범위입니다.
라비헨:
쇠뇌(석궁)
기준치:60/30/12
굴림:45
판정결과:보통 성공
피해:8
당신은 석궁에 화살을 올리고 당긴 뒤
심호흡을 한 채 조준경으로 위치를 가늠하곤,
빙식체가 또 다시 걸음을 떼는 순간 주저 없이
석궁 시위를 놓습니다.
쐑-!
당신이 시위를 떠나보낸 화살은 칼바람을 뚫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빙식체의 오른쪽 발목,
그 푸르스름한 빛이 일렁이던 틈새를 정확히 꿰뚫습니다.
카아아아아아악—!
고막을 찢는 듯한 비명이 설원을 뒤흔듭니다.
발목에 박힌 화살을 기점으로 빙식체의 거대한 몸 전체가 경련하듯 떨리더니,
지탱하던 무게 중심이 급격히 무너져 내립니다.
산만 했던 괴물이 거구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눈밭 위로 '콰앙—!' 소리를 내며 처박힙니다.
지면을 울리는 충격으로 사방으로 눈가루가 폭발하듯 튀어 오르고,
소한을 짓누르던 압도적인 살기도 일순간 흩어집니다.
소한은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 채로
괴물의 앞발 아래에서 몸을 굴려 가까스로 빠져나옵니다.
쓰러진 빙식체가 고통에 겨워 발을 휘저으며 다시 일어나려 발버둥 치지만,
당신이 맞춘 발목 부근에서는 이미 차가운 냉기가 검은 연기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습니다.
놈의 기동력이 완전히 상실된 셈입니다.
소한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놈의 머리 위로 번뜩이는 도끼날을 내리꽂습니다.
'퍼억—!'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괴물의 머리통이 갈라지고,
안에서 형체를 알 수 없는 시퍼런 연기가 하늘로 솟구칩니다.
당신은 자신이 나서 놓고도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한동안 가만히 소한과 시선을 맞교환합니다.
천천히 손목에 장착해뒀던 석궁을 풀어내자,
소한이 비틀거리며 당신에게 걸어와
괴물의 힘을 받아내느라 살갗이 여기저기 터진 손으로
당신의 뺨에 양손을 댄 채 안전을 살핍니다.
그의 표정 또한, 당신과 마찬가지로 얼떨떨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러나 그 걱정스러운 얼굴이 분노하는 얼굴로 바뀌는 것 또한
순식간이네요.
소한:(낮게 깔린 목소리로) ...이 바보 같은 녀석아...! 내가... 도망치라고...! (입술을 잘게 씹으며) 죽으면 어쩌려고 왔어! 숫자 세는 법 까먹었어?
라비헨:하아...하... (숨을 삼키고는) 안 까먹었어.
200까지 셌는데 네가 안 돌아왔잖아.
소한:네가 여기까지 오는 건 내가 제시한 선택지에 없었잖아!
피도 못 보면서! 무슨 생각이야!
라비헨:(인상을 팍 쓰며) ...그게 구해준 사람한테 할 말이야?
소한:하씨... 진짜 열받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네 몸을 덥썩 껴안는다)
라비헨:(팍 쳐내며 씩씩거리고 노려본다) 너 진짜 죽을 뻔했어. 알아?
도망치는 거? 숨는 거? 그건 네 선택지겠지.
소한:아는데 뭐! 그럼 너도 죽으라고 끌고 와?
라비헨:도망만 치는 건 이제 지긋지긋해! 내 선택지에는 참견하는 것도 있었어!
결과적으로 안 죽었잖아.
(울 것처럼 눈을 잔뜩 구기며 떨리는 목소리로) 그럼 된 거 아냐...?
소한:(한참이나 인상을 쓰고 너를 노려보다가 시선을 아래로 푹 떨구고 한숨을 쉰다) 어휴. 화상...
라비헨:고맙다는 말은 뒤져도 안 하지, 너.
소한:지금 그 말이 먼저 나오게 생겼어?! 걱정하는데!
라비헨:그럼 난?
걱정해서 참견하러 왔어.
그게 뭐.
그게 그렇게 잘못됐어?
소한:(골치 아파 죽겠다, 진짜) ...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이마를 짚고 한숨만 푹푹 쉬다가, 진정할 때쯤 고개를 든다. 그래도 납득할 건 납득해야 해서) ...아니. 잘못하진 않았지.
하아... 구해줘서 고마워. 덕분에 살았으니까.
...근데 어떻게 한 거야. 게다가 우리 짐은?
라비헨:(여전히 억울함이 풀리질 않아서 잔뜩 인상을 쓴 채) ...숫자 세라고 했던 곳에 잠깐 놓고 왔어.
별 거 없어. 핵을 맞춘 게 다야.
소한:(방금까지 화를 낸 지라 약간 머쓱해져서 뜸을 들인다) ...용케도 찾았네. 난 못 찾았는데.
라비헨:... 다친 데는?
소한:손바닥 터진 것 말고는 멀쩡해. (네 앞으로 두 손을 내밀어 손바닥을 위로 가게 한 채 보여준다)
라비헨:그럼 됐어. (불만 가득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먼저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난다) 마저 앞으로 가자고.
소한:(여전히 화가 난 모양이지만 딱히 달랠 방법도 모르겠고, 네가 먼저 이동하는 걸음을 가만히 뒤따라간다)
두 사람의 발걸음이 머물렀던 붉은 눈밭 위로
다시금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쳐 혈흔을 덮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여전히 가시지 않은 억울함에 입술을 꾹 깨문 채,
소한을 앞질러 짐을 놔둔 곳으로 향합니다.
뒤에서 들려오는 소한의 발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더 조심스럽게 느껴지지만,
지금은 그 주저하는 기색조차 얄밉기만 합니다.
곧 짐을 버려두고 갔던 곳에 도착해 배낭을 거칠게 낚아채자
소한은 자신의 짐도 조용히 들어올리고는 등에 맵니다.
소한:(잠시 네 안색을 살피다가) 오늘은 체력도 많이 썼고 할 일도 있어서 근처에서 야영할까 하는데. 괜찮아?
라비헨:(눈을 마주치지 않고 말없이 끄덕인다)
소한:(잠시 고민하다가 네 손에 툭 매달려 있는 끈을 보고는 제 손목에 다시금 맨다. 그리고는 주변을 살피다 위가 베어나가 밑둥만 남은 나무 둥치를 가리키며) 저기로 가자. 굴 미리 만들어줄게.
라비헨:(어딘지 보지도 않고 끄덕끄덕)
소한:(단단히 화난 듯한 네 기색에 머뭇거리다 입을 연다) ...아직도 화났어? 미안하다니까.
내가 왜 그랬는지 너도 이해 못하는 거 아니잖아.
라비헨:... 알아.
그치만 나도 생각없이 행동한 건 아니란 말야.
소한:알지. 나도 놀라서 그런 거야.
라비헨:...
네가 말했잖아. 혼자 다니면 정신병 걸리기 쉽다고.
혼자가 돼서 조금 더 살다 죽는 것보단 뭐라도 해보고 죽든 말든 하는 게 낫잖아.
소한:(이해를 못한다) 그렇다고 둘 다 죽으면 개죽음밖에 더 돼? ...한 명이라도 될 수 있는 데까진 살아야지.
넌 착하고 붙임성도 있으니까, 나 아니더라도 다른 파티를 찾기만 하면 금방 들어갈 거야.
라비헨:뭐래...
그리고 개죽음 안됐잖아.
소한:그건... 그렇지. 덕분에.
라비헨:눈 한복판에서 파티를 찾을 수 있을 거란 확신은 있어?
그전에 죽는 게 더 빠를걸.
소한:가능성은 걸어봐야지. 희망을 좇아야 한다고 한 건 너잖아.
라비헨:그래서 가능성 걸었잖아.
너한테.
소한:...
참나, 말이 되는 소리를 하니까 반박할 수도 없고.
라비헨:(눈썹을 찌푸리며) 소한... 너 바보야?
눈앞에 파트너가 아직 살아있는데 새 파트너 찾을 계획을 굳이 해?
소한:...
(시선을 조금 피하며 딴 소리를 한다) 어떤 파트너를 만나도 전투는 대체로 내가 홀로 맡아서. 안 익숙한 거야.
기분 상하게 할 의도는 없었어.
라비헨:그런 거면 됐어.
(어깨를 툭툭 치며) 그래서 어디서 묵는다고? 나머진 이따 얘기하자.
고된 하루였잖아.
소한:...그래. 이쪽이야. (싸늘하던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지자 걱정 없이 발을 뗀다)
설원의 차가운 공기는 여전히 폐부를 찌르지만,
방금 전까지 감돌던 날 선 긴장은 한풀 꺾였습니다.
소한이 안내하는 나무 밑동 쪽으로 이동하면
거대한 고목이 부러져 나간 자리는 천연의 차양막이 되어 눈보라를 막아주고 있군요.
소한은 익숙하게 삽을 꺼내 들어 단단히 다져진 설면을 찍어내립니다.
당신도 천천히 가방에서 삽을 들어 같이 파내려가고,
이윽고 어느 즈음에서 멈추어 수평으로 파내면
소한이 익숙하게 안에서 탁, 탁, 소리를 내며 텐트를 조립하고
가방에서 모포를 꺼내어 아래에 깔아준 뒤 당신을 먼저 들여보냅니다.
당신은 안쪽 깊숙이 자리를 잡고 앉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어쩐지 소한이 바로 따라 들어오려는 기미 없이
밖에서 가죽 마개를 펼치고 가만히 있네요.
소한:나 잠시 어디 좀 다녀올게. 잠깐만 혼자 쉬고 있어.
라비헨:...? 해 다 졌는데?
소한:지금 하고 올 일이 있어. 내일은 안 돼.
라비헨:알았어.
이번엔 진짜 약속 지켜야 해.
이상한 데서 죽지 말고.
소한:죽으러 가는 거 아니야. 마무리하러 가는 거지.
다녀올게. 라비. (그 말을 끝으로 네가 쉬고 있는 텐트 입구를 가죽 덮개로 막는다)
라비헨:뭐 하러 가는지 말도 안 하네...
(털썩 손을 뒷통수에 대고 누우며) 뭐, 알아서 잘 오겠지. 근처에 괴물 소리는 안 났으니까.
좁고 아늑한 텐트 안, 가죽 덮개 너머로 소한의 발소리가 눈을 밟으며 멀어집니다.
당신은 그가 깔아준 모포를 끌어당겨 몸을 둥글게 맙니다.
텐트 내부의 공기는 당신의 숨결로 금세 미지근해지지만,
소한이 늘 누워 있던 옆자리가 비어 있으니 묘하게 공기가 쎄하네요.
해가 질 때 굴로 들어왔으니 밖은 이제 완전히 어둠에 잠겼을 것입니다.
바람이 텐트 위의 눈밭을 살며시 빗질하는 소리,
고목의 잔가지가 흔들리는 소리...
시각이 차단된 공간에서 당신의 예민한 귀는 온갖 미세한 음향을 포집합니다.
피로가 해일처럼 밀려옵니다.
소한은 대체 이 밤 중에 무슨 마무리를 한다는 건지.
몇 번을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 놈입니다.
그렇게 나직이 하품을 몇 번 쏟아내고
눈꺼풀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하며
어둠에 고요히 잠겨 있었을까요.
깜빡 잠이 들려나 싶던 찰나,
가죽 덮개 너머로 '뽀득, 뽀드득' 하고 익숙한 발소리가 다가옵니다.
소한의 발걸음입니다.
그는 굴 앞에 멈춰 서서 거친 숨을 고르더니,
조심스럽게 가죽 덮개를 열고 안으로 몸을 밀어 넣습니다.
소한:(안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네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윤곽에 눈을 깜빡이며) 안 자고 있었나 보네.
라비헨:(한 번 흘긋거리곤 다시 옆을 바라본다) ...마음 편히 잘 수가 있어야지. 걱정되는데.
ㄱ, 그리고! 여기 좁아 터지긴 했어도 혼자 누우면 춥단 말야.
소한:(생각지도 못한 말에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피식 바람빠진 소리를 내며 웃는다. 어이없어, 진짜) 언제는 나가서 자라며.
라비헨:...
(시침 뚝-) 기억 안 나.
소한:머리가 안 좋아서 큰일이네. (네가 시치미를 떼는 게 어쩐지 싫지 않아서, 안으로 들어선 후에 작은 병을 내민다) 야, 선물.
라비헨:'이 자식이?' (삐죽이며 네 쪽으로 몸을 살짝 돌린다) 뭐?
? 이게 뭐야?
소한:독.
라비헨:세상에 독이 정말 많네. 이것도 독, 저것도 독.
독 아닌 건 뭔데?
소한:글쎄. 내일 아침밥? (툭)
(그렇게 말하고는 병 마개를 딴 뒤 네 손에 병을 쥐여준다) 마셔. 달더라.
라비헨:허, 독이 맞는지 기미상궁까지 해주셨어? (라고 말하면서 피식 웃는다)
소한:어. 영광으로 알아.
라비헨:눈물나게 고-맙네. (의심없이 병에 입을 대고 마신다)
손바닥에 쏙 들어올 만큼의 작은 병 입구에 입술을 대고
꼴깍, 가볍게 한 모금 머금자
잘 익은 사과의 싱그러운 향과 함께
혀끝이 아릴 정도로 진한 꿀의 향취가 섞여들어옵니다.
마치 액체로 된 보석을 마시는 듯한 감미로움입니다.
주스인가 싶어 아껴 마시려고 입에서 굴리다가
목구멍으로 넘기면, 그제서야 화한 알코올 향이 올라옵니다.
식도를 탄 액체가 가슴팍까지 화끈하게 달구며
은은한 잔열을 남깁니다.
술 향기가 오래도록 머무는 것을 보아하면
도수가 꽤 센 술이었나 보네요.
주스인 줄 알았는데.
세상에 이런 술도 있다니.
라비헨:(코끝이 쨍해질 정도의 도수 높은 술에 얼굴 반쪽이 일그러진다.) 흐...
웬 술이야?
소한:기분 전환하라고 챙겨왔어. 언덕에서 죽어있던 방랑자 짐 가방에서.
입에 안 맞아?
그럼 나 다시 줘. (손바닥을 내민다)
라비헨:(휙) 입에 안 맞는다고는 안 했거든?
소한:(어차피 억지로 뺏으려던 생각은 없었다) 그래. 귀한 거니까 아껴 마셔.
라비헨:너는 안 마셔?
술 안 좋아해?
소한:아니. 좋아하지.
라비헨:(술을 다시 주며) 그럼 너 가져. 네가 찾은 거잖아.
소한:됐어. 원래 선물은 좋은 거 주는 거야.
라비헨:선물이라고?
나한테?
왜?
소한:(머리가 안 좋나?) 네가 나 구해줬잖아.
보답이야.
라비헨:... 보답을 바란 건 아녔는데.
이런 걸 줄 거라고는 예상도 못 했고.
소한:... 난 말이 서툴러서. 이런 거라도 감사 표시 하는 거야.
라비헨:말하기 싫은 줄 알았는데 서투른 거였어?
소한:...고맙다고는 했었잖아.
라비헨:그랬었지.
(장난) 서투른 김에 한 번 더?
소한:? 뭐를?
라비헨:고맙다는 말.
소한:...아.
고, 마워. 라비. 덕분에 살았어.
라비헨:'쟤가 웬일로 순순히 말을 듣네?' (점점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풉-, 아하하!
(눈가를 훔치며) 하아... 진짜로 할 줄은 몰랐는데.
소한:? 왜 웃어. 네가 하라며.
라비헨:너, 큽... 평소에 내 말 안 듣잖아.
소한:(담담) 그건 네가 비효율적이거나 비합리적인 억지를 부릴 때고.
이런 거에 인색하진 않아.
라비헨:야, 뭐? "비효율적"? "비합리적"??
소한:뭐. 내가 틀린 말 했나.
라비헨:흥... 됐어.
(홧김에 병을 반이나 비우고는 입가를 훔친다) 흐... 나 혼자 다 마실 거니까.
소한:그래, 혼자 다 마셔. 네 거야.
(이젠 네 옆에 익숙하게 풀썩 드러누우며) 적당히 마시고 누워. 자자, 라비.
라비헨:달라고 해도 이제 안 줄 거거든?
벌써? 지금 한참 좋은데... (얼굴이 살짝 빨개졌다)
소한:(눈을 느릿하게 깜빡거리며) ...그럼, 하고 싶은 얘기 있어?
라비헨:하고 싶은 얘기...
네 고향에 대해 얘기해봐.
소한:...내 얘기를?
라비헨:(끄덕) 계속 나만 조잘거렸잖아.
소한:(잠시 고민하다가) ...그건 그렇지.
내 고향은 살짝 추운 사계절이 있는 해안 마을이었어. 형제는 없고, 부모님이랑 나 이렇게 셋이 살았지.
아버님께서는 귀족들에게 납품하는 증기기관 설비를 생산하는 공장의 공장장이셨어. 난 어릴 때부터 가업을 물려받으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고, 딱히 반발심도 없어서 어릴 때부터 자주 설비를 견학하고 공부했지.
그리 재미있는 얘기는 아냐.
라비헨:왜? 나랑 달라서 재밌기만 한데. 계속해봐.
소한:음... 어... (또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다) 어릴 때부터 조립하고 만드는 게 좋아서, 몰래 아버지 공장에서 부품을 가져와 모형 기차를 만들기도 했어. 근데 이런 얘기가 재밌어? 특이하네.
라비헨:궁금하니까 재미있지. 안 궁금한데 말했으면 재미없었을 거고.
그래서 손재주가 좋은 거였구나?
소한:손재주는 어릴 때부터 타고났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지. 마침 가업 물려받기엔 좋은 재능이었어. 마을이 초토화되기 전까지는.
라비헨:그렇구나...
(다시 병을 홀짝이며) 기차 만드는 거 좋아해?
소한:좋아했...(까지 말하고는 지난 네 말을 되새기며) 좋아하지.
...나중에 손수 만든 기차를 시범 운행하는 경험을 해보고 싶었어.
라비헨:흠. 그럼 적도까지 가서 할 거 없을 때 해보면 되겠네.
소한:...탑승시킬 사람이 있으면.
라비헨:ㅈ, 잠깐... 진짜 사람이 타는 기차를 만들고 싶단 거였어?
소한:? 응.
라비헨:혼자서?
소한:전문 장비들의 설계 구조는 아니까, 시행착오 겪으면 만들 순 있겠지.
라비헨:꽤 오래 걸리지 않아? 기차는 엄청 커다랗잖아. 물론 난 기차를 실제로 본 적도, 탄 적도 없어.
소한:...당연히 엄청 오래 걸리지. 인부도 없는데.
(살짝 시선을 틀며) 사실상 불가능하니까 잊어버리고 산 거야.
라비헨:그런가? (다시 꿀맛 나는 술을 음미하고는 입맛을 다신다) 난 그렇게까지 불가능하단 생각은 안 드는데.
규모를 좀 줄이면 되지.
아니면 혹시 알아? 우리 말고 또 적도로 가는 사람이 있을지.
소한:그것 참... 낙관적이네.
뭐... 원래 살던 거주민들은 여전히 살 가능성이 높긴 하니까, 완전히 틀리다고 확언할 수도 없나.
라비헨:(들고 있던 병을 네 쪽으로 까딱이며) 그렇지.
사는 것도 포기를 안 하면서 그런 건 뭐하러 포기해.
소한:(덤덤) 생존이 우선이니까지.
라비헨:글쎄, 적도에 가서까지 생존이 우선일까?
정말 살만한 곳일 수도 있고.
꿈 좀 가지는 게 사치면 기준이 너무 박한 거 아냐?
소한:...
그러는 넌 적도에 가면 뭘 할 건데? 꿈 얘기는 안 했잖아.
라비헨:... 아직 없어. 적도로 가는 건 로만의 꿈이었으니까.
(다시 술을 홀짝이며 반 농담으로 중얼거린다) 양조장이라도 차려볼까...
소한:... 미래를 계획하는 건 좋은데, 양조장 주인이라고 그곳 술을 다 마셔도 되는 건 아니야. 알지?
라비헨:에, 안 돼?
소한:... 너 술꾼이야?
라비헨:술꾼이라니, 너무하네.
제대로 마신 건 네가 산장에서 줬을 때가 다라고.
소한:그 뒤로 맛들인 거냐고.
라비헨:넌 밥에 맛들인다는 말을 쓰냐?
소한:...?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지? 이해가 안 된다)
(그렇다는 건) 술이 주식이야?
라비헨:주식...까진 아니지. 그래도 이건 필.수.품. 이라고.
필.수.품.
소한:필수품은 개뿔... 사치재잖아.
라비헨:(병을 꼭 끌어안으며) 이렇게 힘든 시기에 이만한 따뜻함이 없잖아...
소한:(저게 저리도 소중할까;;) 그래, 많이 마시고 따뜻해져.
라비헨:이미 따뜻해졌어.
...좀 더워, 그리고.
소한:난 추운데.
(얘는 얼마나 마셨길래 덥다는 소리까지 하는지, 원)
라비헨:춥다고?
(병을 좌우로 흔들어보며) ... 다 마셔서 이제 못 주는데.
소한:(다 마신 거였냐고...) 됐어, 누워 이제. 자자.
라비헨:(조금 취해서) '얘 혹시 삐졌나?'
(네 등을 콕콕 찌르며 약간 어눌해진 발음으로) 야... 소한...
술 안 줘서 섭섭해?
소한:...? (천천히 등을 돌려 네 쪽을 바라본다. 상상도 못한 발언이다, 진짜) 섭섭할 거면 내가 그걸 너한테 줬겠냐.
라비헨:그건...그렇지-
소한... 이거 더 없어?
소한:... (사실 챙긴 술이 더 있긴 한데, 부상 당했을 때 소독용으로 쓰거나 체온 떨어질 때 비상용으로 쓰려고 숨겨뒀다)
...
없어. (거짓말)
라비헨:흐으으... 이럴 수가...
진작 아껴 마실걸....
소한:내가 처음부터 아껴 마시라고 했잖아. (어이 x)
라비헨:네가 맛있는걸 줘서 그렇잖아.
소한:어휴, 화상아.
라비헨:그리고 아끼면 간질, 아니..감질맛 나서 마신 것 같지도 않았을 거라구...
지금 딱 좋아...
근데 이제 없어서 슬퍼.
소한:(이제 말까지 더듬네, 제대로 취했구만...)
찾으면 또 줄게.
그러니까 내일도 길 떠날 준비하게, 잠이나 자자.
라비헨:정말??
소한:(끄덕)
라비헨:으음... 그럼 또 구해줘야 하잖아...
네가 보답이라고 했으니까.
소한:그냥 줄게.
라비헨:그냥 준다고??
소한... 너...
소한:?
라비헨:(찌잉-) 미쳤어?
소한:...
(황당)
라비헨:너...정말...
좋은 놈이구나!
소한:... (고작 술 양보했다고? 좋은 놈이 되는 건가? 이 놈의 머릿속은 알 수가 없어)
술주정 그만 부리고 자.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고는, 너를 억지로 눕혀 모포를 덮는다)
라비헨:으어어... (저항도 못하고 눕혀져 앓는 소리를 낸다)
흐으으- (작게 떨더니) 야...
소한...
소한:응.
라비헨:(슬슬 졸린 듯 눈을 꿈뻑거리며) 나 쫌... 추워.
근데... 더워.
진짜 이상해.
이럴 수 있어?
소한:(골치 아파 뒤지겠네. 내가 해결해줄 수 있는 것도 없는데 왜 나한테 얘기하는 거야)
열은 올랐는데 피부쪽 혈관이 확장돼서 열을 밖으로 빼내고 있어서 그래. 가만히 있으면 괜찮아져.
라비헨:그렇구나...
(키득키득) 똑똑하네...
(모포 위로 두 손을 가지런히 놓고 천장을 바라본다) 그럼 가만히 있을게...
가만히..
(쿨...)
소한:... (어휴, 술냄새 나... 인상을 잠시 구겼다가, 한숨을 푹 쉬고는 모포를 꼼꼼히 둘러주고 저도 잠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