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새로운 여정

 




그렇게 얼마나 잠에 취해 있었을까요.
따뜻하고도 단단한 것이 품에 안겨 있는 감촉에
당신은 부드러운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비빕니다.
이렇게 따뜻하게 잔 게 얼마만이었죠.
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오래 전일입니다.
코끝에서는 옅은 눈의 냄새가 나고
모포에서 스며든 잔열마저 당신을 부드럽게 감싸 안고 있네요.
늦잠이 그리워지는 온도입니다.
라비헨:으음... (웅얼거리며 부스스 눈을 뜬다)
잠기운으로 무겁게 늘어진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올리면
숨구멍으로 뚫어놓은 작은 구멍에서 햇살이 조금 비치고
당신의 눈앞에 새하얗게 흩어진 짧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소한입니다.
당신의 팔과 다리는 그에게 빈틈없이 얽혀 있고
맞붙은 가슴팍에서 작게 심장 소리가 울립니다.
사고 회로가 천천히 정지합니다.
...
라비헨:'내가 왜 이 새끼랑 꼭♥ 붙어서 자고 있는 거지?' ...꿈인가?
소한:(네 숨소리가 흐트러지는 것을 눈치채고는 감고 있던 눈을 뜬다) 깼어?
라비헨:아니, 역시 아직 꿈나라구나. (다시 눈을 감는다)
소한:...뭐야? 꿈 아니거든?
라비헨:꿈이 분명해. 그게 아니면 이 자세는 설명이 안 되니까.
말 걸지 마. 다시 자야 하니까.
소한:(어이X)
라비헨:그리고 내 꿈에 나오지 마.
소한:그래라 그래. 난 일어난다.
라비헨:그래, 빨리 가.
엉켜있던 팔다리를 진절머리 내며 떼어내자마자
소한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킵니다.
그리고는 굴 입구를 막아둔 마개를 밀어 밖으로 나갑니다.
잠시 썰렁한 냉기가 발치를 건드렸다가 체온에 녹아 사라집니다.
당신은 어떻게든 다시 잠을 청하려 눈을 감습니다.
근데... 아씨.
왜 내가 저 새끼랑 꼭 붙어 자고 있었던 거지?
자면서 그렇게 추웠나?
기분이 묘하게 더럽네요.
라비헨:
Listen Roll
기준치:80/40/16
굴림:51
판정결과:보통 성공
눈을 감고 있으면 근처를 살피는
뽀득뽀득, 눈 밟는 걸음 소리가 들립니다.
수렵이 취미였다고 하더니, 아침 식사거리라도 찾으러 가는 모양이죠.
뭐, 그러거나 말거나.
중요한 건 이 공간이 여전히 따뜻하다는 거지만요.
라비헨:(뒤척거리다가 방금 전까지 꼭♥ 붙어서 잤다는 사실이 열받아서 머리를 잔뜩 헝클어뜨린다) 에이씨...
다음엔 판떼기라도 사이에 놓고 자야 하나...
(심란해서 잠도 전부 달아나버려, 머리를 대충 손으로 정돈하고 마른 세수도 하고 나온다)
몸을 일으켜 소한이 나갔던 가죽 덮개를 밀어내고 밖으로 나오면
눈보라가 사라진 백색의 세계가 당신의 시야를 가득 채웁니다
매섭게 뺨을 때리던 눈보라는 거짓말처럼 잦아들고,
구름 사이로 고개를 내민 겨울 해가 설원 위로 부서지고 있군요.
당신은 갑작스러운 광량에 눈을 가늘게 뜨며,
차디 찬 아침 공기를 깊게 들이마십니다.
폐부 깊숙이 박히는 냉기가 어젯밤 소한과 엉켜 자며 올랐던
묘한 열기를 식혀주는 기분이라 차라리 다행스럽네요.
탁 트인 암벽 지대의 전경은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대비되어
비현실적인 고요함을 자아냅니다.
저 멀리 허리춤까지 쌓인 눈 위로 길게 이어진 발자국 끝에,
익숙한 실루엣이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것이 보입니다.
소한은 벌써 주변 정찰을 마친 것인지,
단단한 어깨 위에 맺힌 서리를 털어내며 당신 쪽으로 고개를 돌립니다.
소한:(천천히 다가오며) 뭐야. 더 자는 줄 알았더니.
라비헨:(흘긋) ...잠 다 깼어.
소한:그러냐. 잠 버릇 한 번 고약하더만.
라비헨:? 내가 뭐.
네가 고약한 거겠지.
소한:껴안은 건 너거든?
라비헨:그럴 리 없어.
소한:난 정자세로 자고 있었는데. 그렇게 구라 까면 양심에 안 찔려?
라비헨:구라가 아니라 진짜니까 그렇지.
내가 진짜로 그런 잠버릇이었으면 몰랐을 리 없다고. 그리고 네가 밀어냈겠지.
소한:? 내가 왜.
라비헨:? 너도 나 별로 안 좋아하잖아.
소한:아무 생각 없는데.
라비헨:맨날 화상이니 뭐니 하면서 바보 취급했으면서.
소한:화상인 것도 맞고 바보인 것도 맞잖아.
라비헨:난 꾸준히 아니라고 했거든?
소한:그 말이 신뢰가 가야 말이지.
라비헨:구라는 네가 치고 있네.
소한:어휴... (아침부터 시끄럽게 구네) 불이나 피워둬. 사냥감 잡아올 테니까.
라비헨:(손을 휘휘 저으며) 알았어. 빨리 저리 가.
소한:(대꾸도 안 하고 멀어진다)
당신은 멀어지는 소한의 뒷모습을 보며 코웃음을 칩니다.
아무 생각 없다니, 저렇게 무심한 얼굴로 사람 속을 긁어놓는 재주를 보면
분명 즐기고 있는 게 틀림 없는데 구라는.
라비헨:한결같이 재수없는 새끼...(중얼)
당신은 툴툴거리며 어제 묵었던 암벽 굴 근처로 다가가
쌓여 있는 눈을 대충 치워냅니다.
품에서 홍심석을 다시 꺼내 손에 쥐면
돌에서는 여전히 따끈한 온기가 돌고 있습니다.
흠...
이걸 쓸까, 아니면 이미 있던 성냥이랑 부싯돌을 쓸까.
잠시 고민이 되는군요.
라비헨:비싼 거라고 했으니까 싼 거 먼저 써야지... (홍심석을 주머니에 넣고 성냥과 부싯돌을 꺼낸다)
당신은 근처를 둘러보며 늘어진 잔가지들을 모으고
가방을 뒤져 솔방울을 꺼낸 뒤
천천히 동굴 안에서 모닥불을 피웁니다.
매캐한 연기가 코끝을 찔러 기침이 나오려 하지만,
타닥- 소리와 함께 작은 주황색 혓바닥이 솔방울을 집어삼키자
매캐함 대신 천천히 아늑한 온기가 피어오릅니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요.
눈 밟는 소리가 점차 다가옵니다.
빙식체는 아니고, 사람의 발걸음입니다.
이 넓은 설원에 사람이라고는 둘밖에 없으니
분명 소한이겠지요.
아니나 다를까, 조금 기다리고 있으면
소한이 뺨에 묻은 피를 눈뭉치로 닦아내며
동굴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의 어깨에는 생명을 잃고 축 늘어진
토끼 한 마리가 매여 있습니다.
갑자기 어제 로만의 피가 얼굴에 튀던 장면이 재생되며
속에서 헛구역질이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라비헨:
SAN Roll
기준치:55/27/11
굴림:32
판정결과:보통 성공
위액이 시큼하게 목구멍을 물들이다가 멈춥니다.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이틀 전의 일이 충격이었던 걸까요.
죽은 토끼는 커녕 소한의 뺨에 묻은 핏기마저 보기가 거북합니다.
소한:(동굴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며) ? 왜 그래.
라비헨:(패닉에 빠져 점점 숨이 가빠지더니 눈동자가 세차게 떨린다) 헉... 헉...
흐... (고통스럽게 눈을 질끈 감고는 주저앉는다)
소한:(순간 당황해 급히 옆으로 다가오며) 뭐야, 너 왜 그래? 다쳤어?
라비헨:(두 팔을 미친 듯이 긁어대며 중얼거린다) 미안해, 로만...헉, 헉...! 미안해... 잘못했어... 내가... 내가 널...
소한:(네 두팔을 홱 붙잡아 떨어뜨리며) 왜 그러냐니까. 어디 아파?
라비헨:(가슴을 부여잡고 헐떡이며 금방이라도 과호흡이 올 것처럼 어깨를 들썩인다. 비릿한 쇠 냄새가 코끝을 스치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히고, 시야가 까맣게 점멸한다) 피... 피가... 흐으...윽, 아아...! (결국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머리를 박다시피 웅크린다)
소한:...피? (잠시 생각에 빠진다. 피를 원래 무서워하나?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금 토끼 고기를 들고는, 동굴 밖으로 발걸음을 뻗는다. 도축이라도 맡기려고 했는데, 내가 하게 생겼네. 어쩔 수 없지 뭐) 밖에서 손질하고 올 테니까 진정하고 있어.
라비헨:(두 손으로 귀를 막고 계속해서 미친 사람처럼 로만의 이름을 부르며 사과한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드는 것이 보일 정도로 처절하게 떨며) 미안해... 전부 다 나 때문이야... 너를 그렇게 두고 가는 게 아니었어... 미안해, 흐윽...
소한:... (트라우마라도 눌린 모양이네. 놔두면 괜찮아지겠지. 배낭에서 물을 꺼내 들고는, 터벅터벅 나가버린다)
축축하게 젖은 동굴 바닥의 냉기가 뺨을 타고 흐르지만,
당신의 머릿속은 온통 붉은빛으로 타오르고 있습니다.
동생의 마지막 모습이 거칠게 일렁이는 불꽃 속에서 되풀이되며,
비릿한 금속취가 폐부를 찔러오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차가운 바닥을 긁어내며 의미 없는 사과를 내뱉고, 또 내뱉으며
스스로를 갉아먹듯 부르르 떨다가 아주 느릿하게,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천천히 정신을 차립니다.
고통스럽게 고막을 때리던 자신의 거친 숨소리가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합니다.
시야를 가득 채웠던 검은 점들이 흩어지고,
적막한 동굴 안의 풍경이 다시 느릿하게 초점을 맞춥니다.
곁을 지키던 소한의 온기는 이미 사라졌고,
입구 쪽에서 새어 들어오는 푸른 빛만이 당신의 처량한 그림자를 비춥니다.
안에는 모닥불을 피워뒀는데도 뼛속까지 얼어붙은 기분입니다.
당신이 엉망이 된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억지로 정신을 붙잡으려 애쓰고 있으면
동굴 밖에서는 생 살코기가 으스러지는 퍽, 퍽 도끼질 소리가 울립니다.
살갗이 도려내지는 소리, 뼈가 부러지는 소리,
핏기를 제거하기 위한 물이 쏟아지는 소리.
여전히 등뒤로 소름이 타고 오르지만
그래도 보는 것보다는 듣는 것이 낫습니다.
당신이 모닥불을 쬐며 한참을 웅크리고 있으면
곧 소한이 깍뚝 썰린 고기를 한 움큼 들고 동굴로 돌아옵니다.
소한:(동굴 바닥에 도로 앉으며) 상태 괜찮아졌어?
그렇게 말하는 소한의 등 뒤로
옅은 피 비린내가 납니다.
당신이 공황을 보인 탓인지 심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는 수준이로군요.
라비헨:(코를 틀어막으며) 하아... 하... 나, 잠깐만- 바람 좀 쐬고 올게.
(도망치듯 밖으로 나간다)
소한:(딱히 말릴 생각 없이) 그래. 아침밥 해둘게.
소한의 말을 건성으로 듣고 동굴 밖으로 나오면
허겁지겁 동굴 입구를 빠져나오자마자, 날 선 겨울바람이
당신의 뜨거워진 뺨을 가차 없이 내리칩니다.
폐부 깊숙이 밀려드는 시린 공기가 코끝에 들러붙어 있던
비릿한 쇠 냄새를 강제로 씻어내는군요.
당신은 무릎을 짚고 서서 차가운 눈가루를 한 움큼 집어 얼굴을 문지릅니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소름 끼치는 냉기 덕분에,
방금까지 당신을 집어삼키려던 붉은 환영들이 조금씩 부서져 내립니다.
당신은 거칠게 몰아쉬던 숨이 차분해질 때까지,
소한의 발걸음만 찍혀 있는 하얀 설원을 멍하니 응시합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습니다.
동굴 안에서는 소한이 식사 준비를 하는지
작게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울립니다.
진정될 때까지 한참을 그렇게 서 있으면
동굴 입구에서 새어나오는 연기 사이로
아까의 쇠비린내 대신 제법 고소하고 짭짤한 냄새가
섞여들기 시작합니다.
배꼽시계가 그 냄새를 맡자 꼬르륵 요란하게도 울립니다.
라비헨:(점차 정신이 돌아오며, 방금 전 소한 앞에서 꼴사납게 약한 모습을 보였던 자신이 머릿속을 스친다.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아이씨... 쪽팔리게 진짜... 하필 저 새끼한테 보여줘서는...
(수치심이 가득 밀려온다. 하필이면 저 재수 없는 새끼 앞에서 그런 약한 꼴을 보이다니. 자존심 상해서 입술을 짓씹는다) 으으... 짜증나, 짜증나, 짜증나...!!
들어가기 싫다...
(이미 진정했음에도 한참을 눈 위에서 서성이다가 눈을 벅벅 문지른다. 최대한 당당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안으로 돌아간다) ... 나 왔어.
잠시 진정한 뒤 동굴 안으로 다시금 들어서면
소한은 무심한 표정으로 불꽃 위에 작은 냄비를 걸쳐두고
나무 스푼으로 내용물을 휘휘 젓고 있다가 고개를 듭니다.
소한:어, 앉아. 바로 먹어도 돼.
(그렇게 얘기하고는 그릇을 꺼내 맑은 토끼고기 스튜를 담는다)
라비헨:(힐끔...) '나중에 놀리는 거 아니겠지? 맨날 화상이니 바보니 하니까 이것도 틀림없이 언젠가 걸고 넘어질 거다.'
흠흠... 그래.
소한:자. (정신 좀 제대로 차리라는 의미로 그릇 가득 스튜를 담아주고는 내민다)
라비헨:ㄱ, 고마워. (뻣뻣하게 그릇을 받는다)
소한:(네게 그릇을 건네주고 저는 남은 냄비째로 대충 먹기 시작한다)
(스푼을 들어 천천히 스튜 속 고기를 집어먹으며) 도축은 어려울 테고, 전투 특화도 아니고. 할 수 있는 건 뭐 있어?
청력이 좋은 건 도움이 될 것 같다만.
라비헨:(움찔) ... 지금 내가 도움이 안 된다고 하는 거야?
소한:아니, 그냥 묻는 건데.
없어도 상관 없어. 있어야만 생존 가치가 있는 건 아니니까.
라비헨:...도축은 원래 할 줄 알았는데, 그냥... 그렇게 됐어.
활은 쏠 줄 알아. 들고 다니기 불편하기도 하고... 도망다니는 편이 나아서 지금은 의미없지만.
소한:(그렇군) 석궁은 쏠 줄 알아?
라비헨:어느 정도는...
소한:재료 구하면 만들어줄게. 기죽지 마.
라비헨:기 안 죽었거든?
소한:그래. 빨리 먹어. 10분 뒤 출발할 거야.
라비헨:...역시 넌 짜증나는 놈이야.
발목 잡을 일 없게 할테니까 걱정하지 마.
소한:내가 뭘 어쨌다고. (고기를 질겅질겅 씹다가, 국물을 후루룩 마신다)
라비헨:'이게 좋은 놈인지 개자식인지...' (자신도 후딱 식사하기 시작한다)
당신은 입안으로 들어오는 뜨거운 스튜의 온기를 느끼며,
소한의 태도를 곱씹고 또 곱씹습니다.
무심하게 툭 내뱉는 말들이 가시처럼 박히다가도,
석궁을 만들어주겠다는 의외의 제안에는 묘하게 말문이 막힙니다.
당신은 복잡한 마음을 숨기려 그릇 바닥이 보일 때까지
빠르게 스튜를 들이켜고는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소한은 이미 식사를 마친 것인지, 익숙한 손놀림으로
냄비를 설원 속 눈에 문질러 닦고 배낭에 결속하고 있네요.
그가 배낭을 어깨에 메고 동굴 입구로 향하자,
당신도 서둘러 짐을 챙겨 그의 뒤를 따라나섭니다.
소한:(손에 들린 지도와 나침반을 살펴보며) 적도랬지. 산간은 빙 둘러서 간다. 준비는?
라비헨:다 했어. 놓고 가는 것도 없고.
소한:좋아. 가자. (지도를 접어 나침반과 함께 배낭 옆에 꽂고는, 로프를 대신 쥐고 네게 반대쪽을 내민다) 눈보라가 언제 칠지 모르니 손목에 묶어둬. 조난당하지 않게.
라비헨:이런 건 보통 허리에 묶는 게 낫지 않아?
소한:끈이 길지 않아서. 허리에 매면 너무 짧아져.
라비헨:그렇구나. 알았어.
당신은 로프를 쥔 뒤 오른쪽 손목에 간단히 묶고는
시리도록 하얀 설원을 소한과 함께 건너갑니다.
눈부신 햇살을 반사하는 순백색 때문에
눈이 아리도록 부십니다.
그래도 계속해야겠지요, 이 여정을.
적도까지 도달하기 위해서요.